〈 13화 〉 대학생 유부남
* * *
학생, 직장인, 어린아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학생일 때 배로 나타나는 법이지만 지금, 이 순간 유진에게는 그러한 효과가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 하아, 결국 이 시간이 와버렸구나. "
심판의 시간이 다가와 버렸다.
남들은 전부 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긴 채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술을 마시거나 친구들과 같이 즐겁게 게임을 할 생각해 싱글벙글 웃었지만, 오직 이 강의실 안에서 그만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코앞에 닥쳐온 죽음을 보고서 태연하게 미소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럴 때일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긍정이고 나발이고 씨발, 나한테 남은 건 이제 절망밖에 없다고.
마치 조국이 멸망하는 순간을 눈앞에서 지켜본 충신처럼 세상이 꺼질 듯이 깊게 내쉬는 한숨은 저절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모아버렸다.
" 아아아아.... "
한숨을 내쉬다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잔뜩 긁어대며 헝클어버리는 그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을 취하고선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집에 돌아가기 싫다. 외박하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외박이라는 것은 이룰 수도 없고 이뤄서도 안 되는 꿈같은 이야기일 뿐.
아마, 말을 하고 외박을 하던 말을 안 하고 외박을 하던 나라는 사람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하룻밤을 꼴딱 지새운다면 진짜로 병원에 실려 갈 때까지 맞을 게 뻔할 것이다.
아내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 바보야. 왜 그때 그런 말을 한 거냐니까. 예전에도 한 번 실수해서 엄청나게 깨진 적 있으면서 왜 또 어이없게 실수를 하냐고! "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사실, 예전에도 이러한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다.
아까 점심시간 때처럼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실수를 해서 아내한테 죽도록 주먹과 발길질로 구타당한 적이 있는데 난 또 왜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게 된 걸까.
그때 죽기 직전까지 맞고 난 뒤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눈도 붓고 뺨도 많이 맞아서 양 볼도 퉁퉁 부었으며 흉터도 많이 생겨서 뼛속까지 다시는 말실수를 하지 말자고 새겼으면서 도대체 왜 다시....
'' 하, 이래봤자 소용없겠지. "
계속 나 자신을 자책해봤자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시간을 되돌리는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이제 와서 과거의 일을 후회해봤자 나는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향을 선택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 일단 집에 빨리 가자. "
아내가 먼저 집에 도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나보다 늦게 도착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모를까, 나에게 그런 확신 따위는 없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내가 갈 수 있는 속도 내에서는 최대한 빨리 가는 게 가장 아내의 심기를 초장부터 불편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니까.
분명 아내가 나보다 집에 일찍 도착했으면 대충 나의 도착 예상 시간을 정해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 시간을 넘어서 집에 귀가한다면 그때부터는 이제 한 대 맞을 거 열대로 늘어나는 거고 발로 한 번 차일 거 열 번으로 늘어나는 거지.
말도 안 되는 계산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 집, 아니 우리 부부 사이에서는 이게 충분히 말이 되는 계산법이었다.
그러니,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혼자 마음속으로 걱정을 끙끙 앓으며 한숨을 내쉬는 것보다는 속도를 내며 빠르게 집에 뛰어가는 것이 필요했다.
" 얼른 가자. "
집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없으면 아주 베스트겠지만 아내가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이 맞아떨어진다면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무릎을 꿇어야겠지.
아, 맞다. 연고 사 가야지. 잊을 뻔했네.
" 메모하자. 메모. "
곧바로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컴퓨터 사인펜의 뚜껑을 연 다음 내 손등 위에 삐뚤빼뚤하게 꾹꾹 눌러가며 잊지 말자는 의미로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
' 이렇게 적어놓으면 절대로 안 잊어버리지. '
집에 가는 길에 약국에서 산 연고 하나가 오늘 아내한테 맞아서 생긴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의 마수에서 나를 유일하게 지켜줄 텐데 이걸 잊어버리면 절대로 안 되지.
컴퓨터 사인펜을 아무렇게나 책상 위에 던져두고서는 그다음 곧바로 얼른 부랴부랴 짐을 싼 다음 옷을 대충 동여매고 가방을 들쳐멨다.
그리고 바로 빠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황급히 강의실 밖을 나가면서 뜀박질을 시작하려는 그 순간.
" 형! "
" 어? "
어깨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고개를 돌리자 가방을 챙겨 맨 채로 어느새 내 어깨에 경섭이가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 같이 가요! 형! "
가, 같이 가자고? 그쪽 아직 집에 안 갔었던 거에요? 분명 아까까지 강의실 안에 나 혼자 있었는데 언제부터 들어와 있었던 거야? 아니, 그나저나 계속 붙어있던 창우 씨는 어디 가고?
" 차, 창우씨는 어디 갔어요? 그분이랑은 안 가시는 거예요? "
" 창우는 여자친구가 데리러 왔다고 해서 차 타고 떠나버렸어요. 나쁜 새끼가 끝까지 태워달라고 했는데 안 태워주더라고요. 그 개새끼. "
창우 씨는 여자친구가 있었구나. 하긴, 그렇게 잘생겼는데 여자친구가 없는 건 말이 안 되긴 하지.
아니야. 잠깐만, 이런 생각 할 시간이 없어. 유진아 정신 차려! 이상한 것에 한눈 팔지 말란 말이야! 지금 네가 소비하는 1초, 1분이 너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는 시간이라고!
" 아... 그럼 경섭 씨도 여자친구랑 같이 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
" 저 여자친구 없어요. 그리고 운전면허도 없는걸요? 헤헤. "
" 아... "
" 그러니까, 우리 같이 집 가요! 어차피 형도 지하철 타야 하지 않아요? 어디 방면으로 가요? 가는 방면이 같으면 같이 지하철 타서 오붓하게 이야기하며 가면 되는... "
미안해요. 경섭씨. 나도 이러고는 싶지 않았는데 내가 너무 급해서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 나를 용서해줘요.
" 미, 미안해요. 제가 지금 너무 바빠서 빠, 빨리 집에 가봐야 하거든요. 그래서 가, 같이는 못 갈 거 같아요. "
집에 같이 돌아가자는 제안을 최대한 정중히 거절해주었다.
" 에? 급한 일이 있다고요?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시길래 마치 똥 마려운 사람처럼 아까부터 발을 동동 구르시는 거예요? "
" 그, 그게 개인 사정이라서... "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아내한테 죽도록 맞을 것 같아요. 라고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저 개인 사정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고 저절로 이빨로 서서히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벌써 대화를 하느라 2분 정도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2, 2분이라면 건물 밖으로 나와서 주차장 끝까지 갈 수 있는 시간인데….
하지만 그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것인지 경섭은 해맑게 웃으면서 팔짱을 낀 채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에이, 형! 괜히 저랑 같이 집에 가기 어색해서 그러는 거예요? 헐, 그러면 완전 섭섭한데? 우리 엄청 친해졌는데 이러면 저 삐져버린다고 ㅇ.... "
" 미안해요! 내, 내일 제대로 사과할게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
더 이상 참을 수는 없었다.
이 이상 강의실 안에 남아있다면 경섭이의 마수에 몸이 잡혀버려 수다를 떨며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지하철역까지 가는 미래가 뻔히 보였기 때문에 경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가방끈을 조여 매고 곧바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한가하게 강의실 안에서 같이 집에 가는 걸 결정하고 있을 시간따윈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아까 경섭이와의 대화로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으므로 나는 젖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 입술을 꽉 깨문 채 캠퍼스 내를 달리고 또 달렸다.
한편, 빛보다 빠른 속도로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경섭은 쓸쓸히 혼자 남은 강의실 안에서 멀뚱히 서 있는 채 외마디 비명만을 남기고 있었다.
" 아..... 가, 가셨네.... "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강의실 안에서 경섭은 뻘쭘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푹 아래로 숙였다.
" 혼자 가야겠네……."
* * *
" 감사합니다! "
" 네, 수고하세요. "
2,400원밖에 안 하네. 대용량 연고인데 가격이 꽤 싸네. 난 대충 4000원 이상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뭐, 싸게 샀으니까 개이득이겠지. 그리고 이 정도 양이면 적어도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테고.
약국은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 있어서 정말 다행인 것 같네. 위급상황에서도 얼마든지 빠르게 가까이 있는 약국에 찾아가서 약을 사면 되니까 시간이 지체될 일도 없고.
사실, 원래라면 지금 집에 돌아가는 동네 골목길에서도 뜀박질해야 했지만 더이상 나에게 그걸 시행할 힘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몇 분의 시간이 걸렸는지 아는가?
40분이다.
신기록.
원래 집에 오는데 1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내가 무려 20분이나 시간을 단축해버렸다. 뭐, 지하철역으로 가자마자 딱 타이밍 좋게 지하철이 역 안으로 들어왔으니까 솔직히 운이 좋기도 했지.
하지만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잖아? 내가 딱 타이밍 맞게 지하철에 탑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힘들어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린 덕분이니까.
" 아직도 숨차 죽겠어. 하아... "
그러나, 쉬지 않고 계속 뜀박질을 하니 확실히 몸의 한계에 부딪혔고 더 이상 멈추지 않고 뜀박질을 한다면 아내한테 맞아 죽기 전에 길거리에서 쓰러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길가에서 쓰러지면 전부다 말짱 도루묵이잖아. 그리고 어차피 이제 조금만 걸으면 집에 곧바로 도달하므로 이제 뛰지 않고 걷고 있는 것이다.
" 하아, 그나저나 오늘따라 내가 걷는 이 길이 왜 이렇게 무서워 보이는 걸까? "
항상 걷고 두 눈으로 보는 동네 골목길이었지만 오늘따라 내가 걷는 이 길은 놀이공원 귀신의 집을 걷는 것보다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염라대왕이 사는 거처로 내 발로 돌아가는 길이라서 그런 건가? 벌써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고 저절로 입술은 빠짝 말라져 갔다.
카레 가루와 연고와 여러 저녁 반찬 재료들이 잔뜩 담겨 있는 마트 봉지를 잡고 있는 내 손에도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가로등도 없어 어두컴컴하고 온갖 건물에 균열이 가 있고 길바닥에 쓰레기가 나뒹구는 길가를 지나쳐가면서 걷고 또 걷자 어느새 내가 거주하는 빌라 앞까지 도달해버렸다.
" 어, 불이 안 켜져 있네? "
안으로 들어가기 전 고개를 살짝 들어 우리 집의 창문을 바라보았는데 바깥에서 볼 때 우리 집의 형광등이 안 켜져있었다.
잠깐만, 집 안의 형광등이 안 켜져 있다는 것은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거잖아. 그러면 아내는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 오... '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천근만근 무거웠던 나의 마음도 살짝 가벼워졌고 잔뜩 침울해져 있던 내 얼굴에도 활색이 돌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 나의 발걸음도 상당히 가벼워졌으며 도어락의 번호를 누르는 내 손가락도 굉장히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딱, 딱, 딱, 삐리릭.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불이 켜지지 않아 상당히 어두컴컴한 집 안이 나를 반겨주었다.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하니 진짜로 집에 사람이 없는 게 확실했다. 즉, 아내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 하, 다행이네. 시간은 벌었어. "
신발을 벗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따스한 집안의 기운이 나를 편하게 감싸주었다. 일단, 아내가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니까 바로 샤워를 하는 것보다는 저녁을 준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사랑이 가득 담긴 카레와 함께 따스한 밥, 그리고 예쁘게 썬 단무지를 미리 식탁에 세팅해놓고 최대한 머리를 조아리면서 행동하면 아마 아내도 심하게 나를 갈구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사람의 화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격해졌던 감정이 수그러들기 마련이니까.
" 일단, 옷은 먼저 벗고 그다음 일을 하는 게.... "
일단 여태까지 입고 있었던 옷은 벗어두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 요리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 후 거실의 불을 켜는 순간이었다.
거실의 형광등이 켜지자 내 눈동자에 목격되는 사람의 인영.
그것은 소파에 앉은 채로 마치 석상처럼 단 1mm의 미동도 보여주지 않으며 다리를 꼬고 등을 기대 앉은 채로 고개만을 돌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히에에에에에에엑! "
그는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곧바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 어서 와. "
선유린.
아내가 소파에 앉아서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