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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12화 (12/77)

〈 12화 〉 대학생 유부남

* * *

" 점심 뭐 먹을래? 다 같이 나가서 한솥 먹고 오실? "

" 한솥 말고 밑으로 쭉 내려가면 돈가스집 있는데 그것도 괜찮아. 지금 빠르게 걸어서 갔다 오면 충분히 시간 될걸? "

두 번째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모두가 바쁘게 가방을 챙기고서는 다들 즐거운 점심시간을 즐기러 몸을 일으키지만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몸을 축 늘어뜨렸다.

가방을 챙기고 의자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길 힘조차 없었으니까.

" 아아, 진짜 너무 지루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방금 그 교수님. "

수업 중간에 잠을 참느라 미치는 줄 알았다. 거의 자장가 수준이던데?

두 번째 수업 시간은 말 그대로 정말 지옥 그 자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단지 오리엔테이션만 했을 뿐인데 첫날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 곤히 잠에 빠져들었을 정도니까.

' 진짜 수업 제대로 들어가면 볼만하겠네. '

아마 다들 좀비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기지개를 살짝 펴주자 뼈가 뚜두둑 소리를 내며 마치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한 번에 들이킨 듯이 시원한 감각을 온몸에 퍼뜨려주었다.

" 그나마 교양수업이라서 다행이지. "

만약 저게 전공 수업이었다면 진짜 아찔했을 것 같네.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 그런데 장학금 받으려면 저렇게 재미없는 수업도 전부 꼼꼼히 들어가면서 학점을 일일이 챙겨야 하는 건데 저 수업 중간고사랑 기말고사는 어떻게 해야 하?

딱 보니까 교수님 수업 진행이 책만 주야장천 읽으시는 스타일인 것 같은데. 아, 따로 공부 계획서라도 작성해야 하나?

" 형! "

그 순간 내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미 싱글벙글 웃음을 띠면서 점심을 먹으러 나갈 준비를 마친 경섭이와 창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같이 점심 먹으러 가요! "

" 점심이요? "

" 네! 창우 이 새끼가 바로 저 버리고 탈주하려는 거 제가 억지로 붙잡았거든요! 같이 학식 먹어보러 가실래요? "

학식이라고?

중앙대학교 학식을 먹으러 가자고?

"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 저희 대학교 학식에 환상을 가지지 않는 게 좋을걸요? 쓰레기 그 이하에 불과한 음식들이라서 차라리 편의점에 가서 삼각김밥을 사 먹는 게 훨씬 더 이득이에요. "

중앙대학교 학식은 맛없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한 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두 번 이상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전설의 음식.

새내기들이라면 대학교 학식에 환상을 가질 수 있었지만 나는 새내기이면서도 원래 세계에서 대학교를 다녀본 중고 새내기였기에 우리 대학교 학식이 얼마나 맛없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가성비가 좋다는 개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있는데 조금만 걸어서 밖으로 나가면 밥버거 집이 있는데 2,800원에 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었다.

그에 비해 학식은 최소 3,500원 이상의 가격을 가지고 있는데 맛은 차라리 음식물 쓰레기통에 들어 있는 음식을 섭취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맛이 최악이라서....

" 그 정도예요? "

" 무엇을 상상하던지 그 이상일걸요? "

내 말을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학식에 관한 내 평가를 제대로 알아듣기만 한다면 너희들 지갑 속 3,500원이라는 거금을 지켜줄 테니까.

티끌 모아 태산 알지?

" 형이 그 정도로 말하는 거면 엄청 심각하다는 건데.... "

" 에타에 올라오는 글 본 적 없어? 새내기들 질문에 선배들이 댓글 다는 것만 봐도 존나 맛없다고 도배되던데? 그럼, 우리 나가서 먹자. "

" 나가서 먹을 데가 어디 있지? 지금 한솥 가면 사람 개 많을 텐데. "

" 너 나랑 등교하면서 본 찜닭집 알지? 거기 같이 갈래? 치즈랑 납작 만두랑 싹 올려서 고기랑 당면을 밥 위에 올려서 쫙 먹으면 개 지릴 것 같은데. "

" 아! 거기? 근데, 지금이면 사람 많지 않을까? "

" 다들 간단하게 한 끼 해결하고 강의실로 돌아갈 테니까 오히려 없을걸? 형! 어때요? 같이 가요! "

찜닭집 잘 알지. 거기 은근 유명한 맛집이고 예전에도 종종 가서 맛있게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같이 식사를 하러 가자는 그들의 제안은 내가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 아, 미안해요. 오늘은 둘이서 같이 가서 오붓하게 먹고 와요. "

나는 정중히 그들의 동행 제안을 거절했다. 얘네들과 같이 가는 게 거북하고 불편해서 안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배가 별로 안 고팠다.

아까 커피를 마시어서 그런 건지 몰라도 배가 그렇게 고프지는 않았고 이 상태로 내가 얘네들을 따라서 점심을 먹으러 가봤자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굉장히 많이 남길 것 같았다.

" 예? 같이 가시지. "

" 미안해요. 배가 별로 안 고파서 괜히 따라갔다가 음식만 잔뜩 남기고 올 것 같거든요. 괜히 남기고 오면 돈 아깝잖아요? "

" 음, 그러면 어쩔 수가 없네요. 대신 내일은 무조건 같이 먹어야 하는 거 알죠? 내일도 같이 안 먹으면 저 진짜 삐질지도 몰라요! "

" 알겠어요. 내일은 무조건 같이 점심 먹기로 약속할게요. 그러니, 오늘만 봐줄 수 있어요? "

" 배가 안 고프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죠. 야 창우야! 지금 가자! "

둘은 몸을 돌려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강의실에 남은 것은 나 혼자뿐.

어차피, 운 좋게도 다음 수업도 이 강의실에서 계속하기 때문에 굳이 이동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나는 가방을 놔둔 채로 바로 핸드폰을 켰다.

' 전화 한 번 해볼까? '

강의실 안에 있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니까 굳이 카톡을 할 필요는 없겠지. 전화번호부 제일 위 상단에 있는 아내를 클릭하고서는 곧바로 나는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떨어진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아내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걸 보니 나도 어지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뚜루루ㅡ 뚜루루ㅡ

달칵ㅡ

" 어, 왜 전화했어. "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시크한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 뭐해요? "

" 뭐하긴. 너 시계 안 보고 살아? 지금 점심시간이니까 당연히 밥 먹고 있지. "

전화기 너머로도 음식을 쩝쩝 씹어먹는 소리가 세세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밥 잘 챙겨 먹고 있구나. 괜히 일이 바빠서 밥을 거르고 있는 건 아닐까 봐 혼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네.

" 뭐 먹고 있어요? "

" 그냥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 먹고 있지. "

" 좋은 것 좀 드시지.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만 계속 먹으면 건강 나빠져요. "

" 건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고작 이거 먹는다고 건강이 나빠지는 거면 전 세계 사람들의 반 이상은 이미 사망하고도 남았을걸? "

" ...그렇네요. 그래도 가끔은 몸에 좋은 음식도 가져가서 드세요. 매일 편의점 도시락만 먹으면 재미없을 거 아니에요. "

" 편의점 도시락도 종류가 여러 개로 있어서 괜찮아. 애초에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도시락을 싸주면 되잖아. 네가 싸줄 거 아니면 괜히 딴지 걸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

" 피. 걱정한 건데 짜증만 내고. "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는 건지 그녀는 나의 작은 투정을 들은 채 만 채 하고는 곧이어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했다.

" 너도 점심시간이지? 밥은 먹었어? 아니면 먹으려고 가는 길? "

" 점심시간은 맞는데 배는 안 고파서 그냥 강의실에 혼자 앉아있어요. 같은 과 남자애들이 같이 가자고는 했는데 그냥 저 혼자 남아있다고 말했고요. "

" 같은 과 남자애들이랑 벌써 친해졌나 봐? "

" 네. 걔들이 먼저 다가와 줘서 얼떨결에 친구가 돼버렸거든요. 나쁜 애들은 아니에요. 오히려 해맑고 잘 챙겨주는 좋은 애들이죠. "

" 하긴, 네 성격에 먼저 애들한테 다가갈 리는 없지. 뭐, 남자애들이랑 친해지는 건 상관없지만 내가 수없이 말한 것처럼 여자애들이랑은 안되는 거 알지? "

그 말만 몇 번째야. 귀에 딱지 눌러앉겠어요. 여보.

" 알아요. 아니까 그 말은 이제 그만 해요.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사리 생길 것 같단 말이에요. "

" 나도 여러 번 말하기 싫은데 굳이 계속 말하는 거는 그만큼 중요한 거니까 그러는 거야. 조심하라는 거지. 알겠어? "

" 알았어요. 아 맞다! 오늘 저녁은 카레 만들려고 하는데 괜찮죠? "

" 카레? 흠... "

제발 아내에게서 오케이 사인이 나와야 한다. 만약 여기서 오케이 사인이 나오지 않고 불만이 튀어나온다면 다시 처음부터 저녁 메뉴와 사이드메뉴를 고민해야 했다.

그것만큼은 싫어! 저녁 메뉴 카레 고르는 것도 엄청나게 고심해서 고른 거란 말이야!

" 뭐, 상관은 없는데 대신 순한 맛으로 사면 안 되는 거 알지? 순한 거는 맛없어. "

" 알고 있죠. 매운 거로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사이드 메뉴는 단무지로 결정했는데 괜찮죠? 여보 어차피 마트에서 산 김치는 안 먹잖아요. "

" 그렇지. 김치는 무조건 집에서 담근 걸 먹어야 제맛이니까. 김치랑 깍두기가 없는 게 아쉽기는 한데 단무지 정도면 나쁘지 않으니까 그대로 준비하면 될 것 같아. 너, 나중에 시간 내서 김치랑 깍두기 한 번 담가라. 알았지? "

" 알았어요. "

다행히 허락이 떨어졌다. 좋아. 큰 고비를 넘겼네.

" 그나저나, 너 점심은 안 먹는다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중에 가면 배고플걸? 뭐라도 먹어놔. "

" 글쎄요. 그건 뭐, 나중에 가서 생각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정 배고프면 편의점에 들러서 빵 한 봉지 사서 까먹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 너는 나한테 맨날 좋은 거 먹으라면서 잔소리 존나 하더니 정작 너는 왜 맛있고 좋고 비싼 거 안 먹으려고 그러냐? 그런 거 싫어해? 싼 입맛이야? "

아니거든요. 여보.

" 싼 입맛이라뇨. 저도 남들이랑 똑같이 맛있는 거 먹으면 좋아하고 잘 꾸며져 있는 음식 보면 감탄하고 한단 말이에요. 저도 남자예요. "

나도 TV에서 유명 셰프들이 요리하는 거 보면 감탄하고 침을 꿀꺽 삼키면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식욕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니까.

" 그렇지만 제가 그런 걸 안 먹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어요. 그런 음식들은 대부분 비싸니까요. "

비싼 걸 먹으면 기분도 좋고 맛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배에 들어가면 전부 똑같고 그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난 엄청나게 큰돈을 쓸 자신이 없었다.

" 한 푼이라도 아껴 생활비에 보태야 하는데 제가 그런 거 먹고 돌아다닐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여보도 알잖아요? 우리 대출금 갚아야 하는 거 빡빡하게 남아있.... 헙! "

세상에 진짜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대출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일찍 결혼을 한 우리에게도 당연히 산더미 같이 큰 대출 빚이 많이 존재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입 밖으로 꺼내버렸다. 나의 실수를 인지하고 빠르게 입을 막아버렸지만 이미 물은 쏟아버렸고 쏟아버린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아내와 나 사이의 대화가 순간 끊어졌고 곧이어 그녀의 욕이 나의 귓가를 관통했다.

" ... 에이 씨발. 밥 먹는데 갑자기 그런 막막한 이야기를 하고 지랄이야. 그런 말 굳이 안 해도 잘 알고 있다고! 썅, 밥맛 다 떨어졌네. "

" 죄, 죄송해요. "

" 너 그 말은 대출금 아직 갚으려면 보지 빠지게 나보고 일하라는 뜻 맞지? 일해라 노예야 이런 뜻 맞지? "

비상! 비상! 12등급 사이오닉파 에너지 감지! 아내의 분노 1단계가 감지되었습니다!

전군 비상 경계령을 내려라! 지금 당장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아내의 분노를 잠재워야 한다!

" 아니에요! 그런 뜻 아니고 저도 말하다 보니까 의도치 않게 나온 건데 이게, 그러니까... "

" 우리 유진이가 하늘 같은 아내를 그냥 대출금 갚는 돈 버는 기계로 보고 있다니. 뭐, 잘 알았어. "

차라리 짜증이나 화를 내줘. 차라리 나한테 분노를 쏟아내라고! 오히려 평소와는 맞지 않게 잔잔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는 게 더 무섭단 말이야!

" 그, 그게 아니라... "

수습을 해야...

" 조금 있다 집에 가서 봐. "

전화가 끊어졌다.

내 귓가에는 의미 없는 뚜뚜ㅡ 소리가 울려 퍼질 뿐이었고 나는 그대로 전화기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버려 그대로 전화기를 바닥으로 툭 떨어뜨려 버렸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여태까지 그렇게 조심해놓고, 왜 결국 오늘 일을 벌이는 거냐! 유진아! 이 멍청한 새끼야!

짜증을 내고 욕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말투가 차분해졌다는 것은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알려주는 중요한 이정표 같은 것.

" 망했다. "

아마, 집에 돌아가면 난 죽은 목숨이 될 것이 분명했다.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보아도 나에게 그려지는 미래는 암흑 그 자체뿐.

여태까지 조심 잘했으면서 왜 막판에 그런 실수를 범하는 거냐고. 이 멍청한 자식아. 예전에 그렇게 한 번 실수해서 봉변당해놓고 왜 또....

" 으아아아... 큰일났네, 큰일났어! "

손으로 오른쪽 뺨을 매만지자 느껴지는 탱탱한 촉각이 온몸을 지배해 나갔다.

내일이 되면 이렇게 탱탱하고 말랑말랑한 내 오른쪽 뺨이 퉁퉁 부은 채로 까끌까끌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겠지.

" 미리 연고라도 사둘까. "

백 퍼센트 필요할 것 같은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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