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대학생 유부남
* * *
" 여기 앞자리 앉아도 괜찮을까요? 자리가 비는 것 같아서... "
고개를 살짝 내려보자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꽉 차 있었던 내 앞자리는 가방 하나 올려져 있지 않은 상태로 깔끔해져 있었다.
' 어라? 어디 갔지? '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앉아 있었는데 그사이 어디로 간 거야?
바람과 함께 사라지셨네. 뭐, 안 봐도 일단 다른 수업을 들으러 갔거나 그게 아니면 뭐, 집으로 갔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그나저나 이 남자분은 왜 나한테 이런 걸 질문하는 거지? 내가 저 자리에 지금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난 단지 뒷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일 뿐인데.
어느 자리에 앉든지 그건 본인의 마음인고 굳이 나한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는 걸 잘 아실 텐데.
' 되게 예의 바른 사람이네. '
인싸이면서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예의도 차리는 완벽한 사람인 거야? 전부 다 갖추신 욕심 많은 사람이시네.
" 아, 예. 앉으셔도 괜찮아요. "
"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야! 앉자. "
" 아까부터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생겼네. 저기, 아까 제일 처음으로 자기 소개했던 형 맞죠? 이름이 오유진이라고 했던가? 유진이 형 맞죠? "
뭐지? 갑자기 훅 들어오는데?
" 반가워요! 형! 아마, 우리 친하게 지내요! 그런데, 자기소개 괜찮겠어요? 괜히 그런 거 에타에 올라가면 귀찮아 지실 텐데. "
" 맞아. 에타에 괜히 올라갔다가 다른 과 학생들도 알아버리면 여러모로 귀찮아 지실 텐데. 괜히 걱정되네요. 일단 저랑도 친하게 지내요! 알겠죠!? "
" 네? "
뭐지.
이 오묘한 상황은 도대체 뭐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이 미친 친화력은 또 뭐지?
" 제 이름은 윤경섭! 잘 부탁드려요. 형! "
" 제 이름은 박창우! 잘 부탁해요 형! "
" 자, 이름도 소개했고 곧바로 개인적 질문 들어갑니다! 아까부터 궁금해서 미치는 줄 알았네! "
" 나도나도! 빨리 물어봐 이 머시마야! "
" 형! 어떻게 하다가 결혼하시게 된 거에요? 20살에 결혼하는 건 난 인터넷에서만 봤는데 그걸 실제로 보니까 진짜 존나 신기해서... "
" 맞아 맞아! 나도 그거 엄청 궁금했는데, 연애 스토리 같은 거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주시면 안 돼요? 점심시간에 점심 먹으면서 들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
버틸 수가 없다.
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시여. 왜 저를 또다시 이런 시련 위에 올려다 놓으신 겁니까. 이분들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몇 번이고 말했듯이 나는 소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내가 자기소개 시간에 결혼했다고 대놓고 결혼반지를 보여주면서 말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아내의 엄명도 있었고, 무엇보다 난 대학 생활을 조용히 지내고 싶었으니까. 유부남이라고 대놓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서 나에게 다가오지 않겠지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대뜸 나한테 다가와서 자기들이 궁금한 게 있다고 해서 뭐냐고 물었는데 내 앞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묻길래 당연히 된다고 대답해주자마자 이 녀석들은 내 앞자리에 앉아서 나한테 온갖 질문 공세를 쏟아내는 중이었다.
마치 몇십 년은 동고동락하고 지내면서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는 친구들처럼 친근하게 나한테 계속 말을 거는데 부담스러워서 미칠 지경이다.
미칠 듯이 솟아오르는 인싸력을 나 같은 모태 아싸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이 녀석들의 질문 공세에서 벗어나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가 샘솟아 올랐지만 말하는 중간에 끊어버리고 밖으로 후다닥 나가버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또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계속 듣자니 그건 또 그거대로 부담스러워서 미칠 것 같고. 도대체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해야 하는 걸까?
" 형? 형! "
" 어? ㅇ, 왜? 왜 그러세요? "
미칠 것 같은 어색함에 저절로 존댓말이 튀어나오게 된다.
아니, 그런데 얘네들은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이라는 게 없는 건가? 나랑 안면을 틔우고 처음으로 대화를 튼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저렇게 친근하게 날 대한다고?
나, 나에게는 죽어서도 이루지 못할 절대 불가능한 행동들인데.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그의 행동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학생 두 명이 손사래를 내저었다.
" 아이, 왜 그러세요. 형은 그냥 말 놓으라니까요? 형이 저희보다 1살 더 많은데 왜 존댓말 쓰는 거예요? 아까도 저희가 말 놓아도 된다고 말했잖아요! "
도대체 너희가 언제 그렇게 말했니? 난 듣지도 못했는데 너희들 혼자서 복화술이라도 하는 거니?
" 지랄 하지 마. 우리 그런 말 한 적 없어. "
" 아, 없어? "
저거 봐, 없다고 하잖아.
근데 사실 너희가 말했든 말을 하지 않았든 애초에 아까부터 정신을 다른 데다 두고 있어서 너희가 무슨 말을 했든지 간에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거야.
그런데, 그나저나 말을 놓으라고? 어.... 솔직히 그건 내가 이루기에는 너무 힘든 부탁인데. 미안하다. 나는 솔직히 너희같이 친화력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아.
" 아니에요. 저, 저는 말 안 놓는 게 편해서... "
" 네? 하지만, 그러면 약간 그림이 이상하잖아요? 저희가 반말이랑 존댓말을 섞어서 쓰는데 저희보다 나이가 많은 형이 오히려 동생들한테 존댓말을 쓰면... "
" 괜찮아요. 저는 괜찮으니까 여러분들은 펴, 편한대로 하시면 돼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
" 아니, 뭐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면 어쩔 수 없겠는데. 진짜 안 불편한 거 맞죠? 형? 괜히 나중에 딴소리 하기 없기에요! "
존댓말이고 반말이고 자시고가 아니라 난 그냥 너희들이 내 앞에 앉아서 나한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불편한 사실이야. 진짜 미칠 것 같다고.
근데 이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해봤자 뭐 하겠어. 정작 이걸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없어서 가만히 입 꾹 다물고 있어야 하는데.
" 형, 그나저나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요? 멍하니 초점 없는 눈으로 가만히 있으시던데. "
" 아, 그게 그냥.... "
" 솔직히 말해서 아까 저희 질문 안 듣고 계셨죠? "
어, 어떻게 알았지?
눈빛에 감도는 실망감에 마음이 순간 철렁거렸다. 뭔가 미움을 받는 것 같아서 뭔지 알지도 못하지만 일단 난 황급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아, 아니에요. 드, 듣고 있었어요. "
" 에이, 거짓말하지 마요. 그럼 아까 저희가 각자 이름을 말하면서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이야기 듣고 계셨으면 저희 둘 이름이 뭔지 아시겠네요? "
" 한 번 맞춰보세요! "
이름을 맞춰보라고? 내가 너희 둘 이름을?
씨발, 큰일 났다. 사실 아까부터 다른 생각 하느라 얘네들이 하는 이야기 하나도 안 듣고 있었는데.
" 어.... "
" 어서요! "
" 기, 김춘삼이랑 김돌쇠? "
" 예!? "
아니야?
" 김춘삼이랑 김돌쇠는 도대체 어디서 꺼낸 이름인 거에요!? 옛날 동화책에서도 그런 이름은 안 쓴단 말이에요! "
아, 아니야? 김춘삼이랑 김돌쇠 아니야?
이로써 내가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던 게 들통이 나버렸다.
안돼. 분명 얘네들 기분이 나빠졌을 거야. 이럴 때 필요한 건 빠른 사과였다. 아내와의 동거생활과 결혼생활로 깨달은 수많은 진리 중 하나.
잘못하면 곧바로 대가리를 박고 용서를 빌어라. 그러면 큰 화재로 번질 불이 작은 불씨 정도로 끝난다는 것.
나는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 죄, 죄송해요. 사실 다른 생각 하고 있느라 안 듣고 있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
그의 머리가 책상에 박힐 것처럼 깊숙이 숙여지자 오히려 그들은 당황스럽다는 듯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 아, 아니. 너무 그렇게 미안해하면 저희가 오히려 더 미안한데.... "
" 고, 괜찮아요. 형! 다른 생각하다 보면 못 들을 수 있죠! 막, 사과를 받으려고 말한 게 아닌데 이게 이렇게 돼버렸네. 그럼 처음부터 싹 다 말해주자 경섭아. 그게 낫겠지? "
" 그래, 그게 낫겠다. 일단 형이 아예 안 듣고 있었다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게요. 이번에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똑바로 들어야 해요. 알겠죠? 형. "
요, 용서해준거니? 다행이다. 나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 거구나.
고마워. 얘들아. 이번에는 꼭 잘 듣고 있을게. 난 고개를 필사적으로 끄덕거려주었다.
" 일단, 제 이름은 윤경섭이에요. 제 옆에 앉아있는 이 노랑머리 양아치처럼 보이는 녀석은 박창우에요. 아, 얘가 이렇게 보여도 문신은 없어요. "
" 야! 노랑머리 양아치라니!? 그렇게 말하면 형이 오해한다니까!? 뒤질래? "
퍽ㅡ
방금 때리는 소리가 꽤 컸는데?
" 아 씨발, 존나 아프게 때리네! 애초에 그게 사실인 걸 어떻게 해. 이 머시마야! 너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네 얼굴 보여주면서 양아치 같아요? 안 같아요? 라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전부 다 전자라고 말할걸!? "
" 이 미친 새끼가? 야, 그거 사람 차별하는 발언인 거 아냐? 세상에 머리 노랗게 물들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
" 거대한 유방을 가지신 아름다운 소크라테스 님이 말했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이야. 씨발, 그리고 네가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금발은 무슨 금발이야!? "
왜 너희끼리 이야기하다가 싸우는 거야. 나 때문에 싸우는 거야? 아니야. 그러지 마. 그런 거면 나 엄청 불편하단 말이야.
" 싸, 싸우지마세요. 제가 죄송해요. "
" 예? 아, 싸우는 거 아니에요! 윤경섭 개새끼야! 너 때문에 형이 우리 둘 싸우는 줄 알고 괜히 오해하잖아! "
" 형! 우리 싸우는 거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친한 사이라서 원래 이러고 노는 거니까 크게 신경을 안 쓰셔도 괜찮아요. "
그게 싸우는 게 아니라고? 주먹을 휘두르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봐놓고서는?
아니, 뭐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면 저렇게 다투면서 노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하는데 방금의 살기는 일생일대의 원수를 마주 보는 것처럼 넘실넘실 거리고 있었는데...
아니지. 신경 쓰지 말자. 본인들이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 내가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지. 그나저나 다행이네. 괜히 나 때문에 싸우는 것 같아서 엄청나게 조마조마하고 불편했단 말이야.
" 아, 제가 괜히 오해를.... "
" 아니에요. 원래 처음 보면 오해하기도 하더라고요. 어쨌든 아까 이미 말했지만, 그땐 형이 집중을 안 해서 못 들었으니까 이번에 제대로 말할게요. "
" 뭐, 뭘? "
" 뭘 그렇게 긴장을 하고 그래요? 저희가 말할 게 큰 부탁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친하게 지내자는 거에요. 이거 어려운 부탁 아니죠? 형? "
" 네? 치, 친하게 지내자고요? "
" 네! 뭐, 어려운 부탁 아니잖아요. 돈을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저희가 먼저 다가가서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건데. 형은 그냥 받기만 하면 돼요! 어때요? 쉽죠? "
이게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고?
나한테는 천 톤짜리 바위를 내 손으로 직접 옮기라는 소리보다도 더 힘든 부탁인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도 친하게 지내자고?
너희랑 내가?
미친 소리 하지 마!
이 나쁜 새끼들아!
나는 너희들이 지금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불편해서 미칠 것 같은데 이제는 친하게 지내면서 같이 학교 내를 돌아다니자고?
차라리 나보고 사약을 가져다주란 말이야! 나 같은 음침한 사람이 너희들 같은 화려한 인싸들과 같이 어울려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같이 점심도 먹고 수업 다 끝나고 백화점도 가고! "
" 엄청 재밌을 거 같은데? 화장품도 사러 가고 가끔 술도 먹으러 가고, 형이 연애 코치도 좀 해주고! 꺄! 너무 재밌을 거 같은데? "
" ... "
미안해. 얘들아.
나, 나쁜애들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너희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
아니, 그렇다고 너희가 싫다는 건 아니야. 그냥 불편할 뿐이지.
애초에 나는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고 놀려고 대학교에 온 것도 아니란 말이야. 그냥 조용히 구석에 박혀서 아무 일도 없이 없는 사람 취급 받으면서 살아가고 싶단 말이야. 그러니, 제발 날 내버려 두면 안될까?
" 어때요? 형? 엄청 재밌겠죠! "
죄송해요. 단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것 하나면 저절로 이 두 명을 나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수십번도 외쳤을 그 한마디.
하지만 막상 진짜로 그 말을 하려니 입은 떼어지지 않았고 저절로 눈은 내리깔게 되었으며 고개는 푹 숙여졌다. 결국, 역시나 이렇게 돼버리는구나.
흑심을 품고 온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나랑 친해지고 싶다면서 웃으며 다가온 이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도저히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아까 내가 생각한것 처럼 거절의 말을 내뱉는건 정말 쓰레기같은 짓이었으니까.
" 조, 좋아요. 치, 친하게 지내요. 저희. "
그래서 난, 웃어주었다.
조금 굳은 얼굴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