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대학생 유부남
* * *
자기소개 시간이 끝나고 교수는 자신의 교재를 챙겨 밖으로 빠르게 떠나갔다.
역시나, 학생의 수가 많고 중간으로 가면 갈수록 인싸들의 질문 타임이 길어지는 바람에 모두가 자기소개를 끝마치지는 못했다.
다들 개꿀 빨았네. 제기랄. 왜 하필 나는 첫 번째였던 거냐고.
" 됐다. 됐어. 이미 지나간 일 지금 불평불만 벌여봤자 뭐하겠니. "
" 컥, 커억! 큭! 크으으응. 퓨르르르르. "
그 순간 옆에서 들리는 강렬한 코 곪에 잠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내가 앉아있는 책상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시 흩어지는 사람들의 시선들.
" 엄청나게 잘 주무시네. 이분. "
아침부터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었던지라 우리 과에 있는 사람들 중 그 어떤 사람도 이 여자분의 생김새가 어떤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학번도 뒷번호였던 건지 이름이 호명되지도 않아서 이름이 어떻고 나이가 몇 살인지도 아예 모르고.
근데, 진짜로 이분은 어젯밤에 도대체 뭘 했길래 지금까지 자고 있는 거지? 몸이 움찔거리거나 깨려는 기색도 없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 같은데?
" 커억! 크릉! "
숨넘어가시겠는데? 이러다가 실려 갈 것 같아. 다음 시간에는 일어나실 수는 있을까? 아, 그러고 보니 다음 시간이 뭐였지?
곰곰이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보니 등교하면서 몇 번이고 봤던 시간표가 머릿속에서 번쩍 떠올랐다.
그래, 마석 결정도 계산 과목이었다.
' 오, 강의실에 그대로 앉아있으면 되네? '
개꿀! 따로 강의실 이동 안 해도 되네. 이 자리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어야겠다.
그나저나 자기소개의 효과가 꽤 있었던 걸까?
나를 포함한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한 책상에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 첫인사를 나누거나 친하게 지내자는 등 친목을 도모하고 있었다.
좋네. 아주 좋아. 다들 저렇게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면서 나에 대한 신경을 아예 꺼주면 그거야말로 베스트지.
' 아내한테 카톡 보내봐야겠다. '
2시간 연강도 끝났고 할 것도 없으니 이쯤 돼서 아내한테 안부 문자나 한 번 보내봐야겠네.
할 거 없을 때는 핸드폰만 한 것도 없지. 가만히 앉아서 핸드폰 만지고 있다 보면 교수님 들어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살짝 만지고 있어야겠다.
유진>[나, 이제 한 수업 끝났어요]
카톡!
" 대답 한 번 엄청 빠르네. 계속 핸드폰만 붙잡고 내 카톡이 올 때까지 기다린 건가? "
아내>[그래?]
유진>[네. 그런데 여보. 대답이 엄청 칼 대답이네요? 설마, 핸드폰 계속 들고 있는 채로 제가 카톡 보낼 때까지 기다리신 거예요?]
아내>[뭔 개소리야. 잠시 쉬는 시간에 핸드폰 들고 게임하고 있었는데 네가 그때 마침 카톡 보낸 거야]
유진>[여보가 핸드폰을 게임 같은 거 안 하는 걸 내가 다 알고 있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카톡 보낼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니. 가끔 보면 여보도 진짜 귀여운 면이 있네요]
아내는 컴퓨터 게임은 자주 하는데 핸드폰으로 하는 게임은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뭐라고 했더라? 핸드폰 게임만 시작하면 자꾸 현질을 해버려서 끊었다고 했던가?
아무튼, 일하다 쉬는 시간에 현장에 앉아서 땀에 푹 젖은 채 핸드폰을 붙잡고 내 카톡이 오기를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니까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내>[아이 씨발. 게임하고 있었다니까 사람 말을 왜 이렇게 못 믿고 지랄인 거야. 너 자꾸 내 말 무시할래?]
괜히 부끄러워 하는 거 봐. 분명 얼굴을 제대로 붉힌 채 씩씩 성을 내면서 열심히 화면을 두드렸겠지.
뭐, 여보가 그렇게 부끄러워서 인정하지 않고 계속 부정한다면 제가 눈 딱 감고 믿어드릴게요. 워낙 이런 애정표현 같은 걸 표현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게 바로 당신이니까.
유진>[알겠어요. 여보가 그렇다니까 제가 믿어드릴게요]
아내>[씨발, 말투가 전혀 믿는 말투가 아닌데 뭘 믿어. 하늘 같은 아내가 아니라고 하면 그냥 아니라고 처 믿어. 알겠어?]
알겠다니까. 그렇게나 간절하면 내가 눈을 진짜 완전 꼭 감아줄게.
유진>[알았어요. 믿을게요]
아내>[그래야지. 그나저나 카톡은 왜 갑자기 보낸 거야?]
유진>[그냥, 쉬는 시간 되니까 할 게 없어서 보냈어요. 겸사겸사 뭐 하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아내>[수업 시간에 뭐 배웠어?]
유진>[오리엔테이션이라서 뭘 배우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수업 방향이 흘러갈 건지 그리고 성적 비율에 관해서 설명 잠깐 듣고 바로 친목 도모하라고 교수님이 자기소개로 넘겨버리셨어요]
아내>[자기소개? 대학교에서도 자기소개를 시켜? 그런 건 보통 중학교 때까지 하지 않나?]
유진>[사람마다 다 다른 거죠. 이번 교수님 말로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인맥이 중요하니까 미리 여기서 친목을 다지라는 의미로 자기소개 시간을 가진 거라더냐. 뭐라나]
아내>[음, 뭐 틀린 말은 아니네. 그나저나 너는 자기소개 했어?]
유진>[했죠. 그것도 맨 처음으로]
아내>[맨 처음으로? 운도 안 좋네. 하필 맨 처음이 걸려버리고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자기소개했어?]
유진>[그냥 이름하고 나이가 몇 살만 말하고 끝냈어요. 그리고 질문 좀 받다가 끝냈죠]
아내>[뭔 질문 받았는데?]
유진>[그냥 우리 과에 들어온 이유가 뭐고 나이가 21살이던데 복학생인지 물어보고 끝났어요]
여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을 받은 것은 아내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원래 이런 건 말해줘봤자 괜히 나만 혼나고 서로 속도 상할 것 같으니까 이건 센스 있게 알아서 빼버린 거지.
아내>[음. 뭐, 과 사람들 중에 친한 사람 없지?]
유진>[없어서 지금 여보랑 카톡하고 있잖아요. 원래 제 성격이 남들이랑 잘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고 여보가 신신당부한 것도 있으니까]
아내>[그래. 잘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만 해. 여자랑 이야기하거나 친해질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친해지려면 무조건 남자랑 친해져야 하는 거 알지? 무조건 명심해야 해]
여보.
이미 유부남인 걸 까버렸기 때문에 괜히 다가왔다가 과에 있는 남자들한테 미친년이라고 찍힐 수도 있어서 여자들이 다가오려고 하지도 않아요.
유진>[알겠어요. 꼭 명심할게요. 대신 조별 과제나 짝을 이뤄 리포트를 작성해야 할 때는 어쩔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계시죠? 그때는 저한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아내>[알고 있어]
유진>[휴. 전 혹시라도 여보가 까먹고 다시 뭐라고 잔소리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아내>[그런 건 안 까먹어. 아, 이제 일 들어가야겠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쉬는 시간이 끝났나 보다.
유진>[벌써 쉬는 시간이 끝난 거예요? 너무 짧게 쉬는 거 아니에요? 원래 체력이 제일 중요한 법인데 피로가 다 풀릴 때까지 푹 쉬시지]
아내>[현장에서 그딴 게 지켜질 리가 없잖아? 그냥 대충 숨만 고르고 다시 일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난 젊어서 이 정도 쉬어도 충분히 몸 회복되니까 별 상관없어]
유진>[정말이죠?]
하긴, 아내를 일반적인 여성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를 하는 건 어불성설이지.
아내>[내가 이딴거로 거짓말을 할 리가 있냐? 아무튼 공부 열심히 집중해서 하고 수업 다 마치면 괜히 딴 길로 새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와. 알았지?]
유진>[네, 알겠어요. 다치지 말고 무조건 안전하게 일해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알죠?]
아내>[내가 이 일이 몇 년 차인데 그걸 모르겠어? 그냥 위험하다 싶으면 무기고 뭐고 전부 다 놔두고 도망갈 거니까 괜히 시답지도 않은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해. 나중에 수업 다 끝나면 전화해]
유진>[알았어요]
끊어진 대화 속 나는 괜히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걱정에 머리를 살살 매만지게 되었다.
항상 아내가 일을 나갈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아내에게 잘못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아내가 하는 일이 보통 험한 일이 아니니까.
뭐, 아내가 경력도 꽤 많고 연차도 높은 편이며 그 누구보다도 안전을 중요시하게 여기면서 자기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남편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남편이니까.
' 그럼 오늘 저녁은 뭐로 만들어야 할까? '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5시나 6시 정도 될 것 같은데 그러면 바로 저녁 준비해야겠네. 아, 저녁밥으로 뭘 만들어야 하지?
집에 딱히 음식 재료도 없는데. 그럼 마트에 한 번 갔다 와야 하는데 마트를 가기에는 시간도 너무 애매하고 어떡해야 하지? 그냥 시켜 먹을까?
' 아니야. 시켜 먹는 건 안돼. '
배달료가 너무 아까워. 요즘 아내가 저녁이랑 혼술을 너무 같이 많이 먹는 바람에 생각보다 생활비에 타격이 크단 말이야.
배달 한 번 시켜 먹으면 술값 포함해서 한 번에 3만 5천 원에서 4만 원 정도가 하루 만에 단번에 빠져나가니까 이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금액이 자리를 엄청 많이 차지하더라고.
' 그럼 만드는 것밖에 없는데. 앞으로는 저녁을 호화롭게 차리는 건 시간상 안 되고. '
한 번에 대용량으로 많이 만들어서 배고플 때마다 꺼내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한데.
사골이라도 끓일까? 아니면 카레? 오, 카레 괜찮은데? 한 번에 많이 만들어서 큰 냄비에 담아두면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데워먹으면 되잖아?
" 괜찮네. 그럼, 오늘 저녁은 카레로 하자. 그럼 집 가는 길에 마트 들러서 가루 사서 들어가면 되겠네. "
미리 핸드폰 노트에 기록해놓아야겠네.
그는 빠르게 카톡을 끈 다음 핸드폰의 필기장을 열어 오늘 저녁밥 메뉴와 같이 곁들일만한 반찬거리들을 고민하며 하나하나 천천히 정리를 시작했다.
자기 또래의 다른 남성들이 과의 여성들과 함께 어울리며 하하 호호 웃고 떠들고 있었고 바로 옆에서는 한껏 시끄럽게 코를 골며 힘껏 그를 방해했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어차피 코 곪 소리는 매일 밤 침대 옆에서 듣는 소리였기 때문에 적응이 완료된 상태였으니까.
' 이 정도면 우리 아내에 비해서는 아기 수준이지. '
그나저나 카레랑 어울리는 반찬이 뭐가 있더라? 흠, 깍두기를 담글까?
아, 그런데 깍두기는 조금 익혀야 맛있어서 지금 당장 만들어봤자 바로 먹을 수는 없는데. 차라리 단무지를 사서 정사각형 모양으로 잘라서 그릇에 따로 담아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 종갓집 김치를 마트에서 그냥 살까? 아, 그런데 아내는 마트에서 산 김치들 엄청 맛없어하는데. "
예전에 한 번 김치를 직접 담그기 힘들어서 마트에서 김치를 사서 그녀에게 대접했다가 욕만 오지게 들어먹은 적이 있어서....
하, 씨발. 메인 메뉴를 딱 정하고 나니까 이번에는 사이드 메뉴가 또 나를 괴롭히네.
원래 세상에서 잘 지내고 계세요? 이 모자란 아들은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 와서야 엄마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아침, 점심, 저녁을 매일매일 준비하던 모습. 정말 다시 떠올리니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옛날에 그것도 모르고 매일 반찬 투정만 했었죠.
지금 제 잘못을 전부 다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엄마. 제 말이 들린다면 제발 대답해주세요. 전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저기... 형? "
그 순간 귓가를 간질이는 미성.
" 어? "
그 미성에 나는 골똘히 돌아가던 머리를 잠시 멈추고서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각자 화사한 색깔로 염색을 하고 짧은 반바지와 반팔과 반짝거리는 귀걸이를 찬 채로 아까까지 분명 인싸 여자들과 웃고 떠들고 있었던 남자애 두 명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왜, 나한테 온 거지? '
인싸 여자들과 아까까지 놀고 있었다는 것은 즉, 이 남자애들도 인싸라는 뜻. 애초에 외모를 보자마자 누가 봐도 " 나 잘나가요. " 라는 티가 팍팍 나는걸.
그런데, 이 애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나 같은 아싸한테 온 거지?
" 저기, 형. 저희가 궁금한 게 있는데... "
" 뭐, 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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