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8화 (8/77)

〈 8화 〉 대학생 유부남

* * *

" 아, 그…. 저.... "

호기롭게 입을 떼기는 뗐는데 막상 또 이야기하려니까 제대로 말이 안 나온다.

" 편하게 해요. 편하게. 이런 거로 굳이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으니까. "

긴장을 풀어주는 교수님의 한마디.

그 한마디에 살짝 용기를 얻었지만 그래도 나는 나를 마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자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천천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 이번에 중앙대학교 마석 관리 과에 들어온 21살 오, 오유진입니다. "

" 네. "

" ..... 끄, 끝인데요? "

" 네? 아, 그래요? 고개도 못 들고 푹 숙인 채로 말하는 거 보니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인가 보네요? "

" 조, 조금... "

" 소년답네요. 뭐, 본인이 소개를 길게 하던 짧게 하던 그건 본인의 마음이니까…. 그, 유진 학생이라고 했죠? "

" 네. 오유진입니다. "

" 그래요. 일단 유진 학생의 자기소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고 혹시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유진 학생한테 궁금한 점이라던가 알고 싶은 점을 물어볼 학생이 있나요? 있으면 손을 들어주세요. "

아니야. 하지 마. 제발 손 들지 마. 무조건 들지 말아 줘. 제발 들지 말아 주세요. 제발 무조건 절대로 들지 말아 주세요. 절 그냥 얌전히 자리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너희들도 앞에 나와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우물거리고 얼굴도 평범한 남자한테 딱히 묻고 싶은 거 없을 거 아니야. 그러니, 제발...

" 저, 질문 있습니다! "

" 아, 질문 있네요. "

맨 앞줄에 앉아서 교수님의 말에 크게 대답하면서 엄청난 친화력을 뽐냈던 여성분이랑 친구 사이처럼 보이던 통통한 여성분이 손을 들고 질문 의사 표시를 나타냈다.

하, 신이시여. 솔직히 저는 당신을 원망해도 합법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저의 기도는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는 겁니까? 남들의 기도는 그렇게나 잘 들어주면서 왜 하필 나만.

뭐, 어쩌겠어. 내 처지가 원래 이런 건데.

그럼 많은 거 바라지는 않을게.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 마석 관리 과에 들어온 특별한 이유가 궁금한데 혹시 말해주실 수 있나요? "

" 아, 이유요? 별로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어, 단지 마석 관리 과는 졸업만 하면 취업을 하기 쉽기도 하고 국가 자격증을 딴다면 얼마든지 공무원으로 빠질 수 있으니까요. 고, 공무원은 월급은 짜지만 잘릴 걱정 없이 오래 다닐 수 있고 연차만 쌓인다면 월급도 오르니까…."

마석 관리 과는 졸업을 하기만 한다면 일단 취업이 가능했다. 물론, 큰 기업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영세기업에 들어가겠지만, 과를 졸업하기만 해도 취업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국가자격증만 취득하게 된다면 나라에서 보장해주는 일자리인 공무원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대기업에 입사할 수도 있음으로 아내의 경제적 부담을 많이 덜어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과에 들어온 것이다. 오직 그것밖에 없다.

" 유진 학생이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정론인 대답을 해줬네요. 사실 그게 대학에 들어오는 궁극적인 이유죠. "

그렇죠. 교수님.

" 그럼, 그 질문은 여기서 끝내고 또 유진 학생에게 묻고 싶은 사람 있으십니까? 있다면 손들고, 아 저기 있네. "

이번에는 후드티를 입고 입은 채로 마스크를 쓰고 계시던 음침한 여성분이 손을 들었다.

" 21살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복학하신 건가요? "

" 아, 아니요. 복학 아니고 신입생이에요. 제가 20살 때는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곧바로 못 들어왔는데 이제는 생활이 조금 안정이 돼서... "

" 무슨 일을 하셨길래? "

어, 이거 이야기하자면 엄청 긴데. 남들이 들어서 좋을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잠깐만, 근데 내가 굳이 무슨 일을 한 것에 대해 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 이유가 있나? 없잖아.

" 그건 개인적인 사정이라서 말씀을 못 드리겠는데... "

" 그렇죠. 그건 유진 학생의 개인 사정이니까 거기까지 굳이 말할 이유는 없어요. 굳이 말 안 해도 괜찮아요. 여기 이 질문은 제가 여기서 끊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이해해주세요. "

아주 타이밍 좋게 끊어주셨네.

뭐, 21살이 솔직히 많은 나이도 아니잖아? 대학교 다니다 보면 25살, 26살도 심심찮게 보일 텐데 말이야. 그리고 여기 있는 이 분들 중에서도 나랑 나이가 똑같은 분들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을걸?

저거 봐. 몇몇 사람들 나이 이야기 나오자마자 곧바로 머리를 책상에 박거나 입술을 씹어버리고 있잖아.

" 자, 그럼 뒷사람도 해야 하니까 유진 학생에 대한 질문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할 학생 있나요? 아, 여기 바로 앞에 있네. 우리, 목청 큰 과대 희망자. "

아.

요주의 인물이다.

맨 앞줄에 앉아서 싱글벙글 웃음을 띠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과대 희망자이자 친화력이 아주 높은 개 씹인싸 여성분의 시선이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겠는데, 이분은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그냥 한 공간 안에 같이 있으면 뭔가 불편하다.

' 제발 앞에 사람들처럼 무난한 질문을 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

앞의 두 사람의 질문은 내가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들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발 당신도 앞의 두 사람처럼 그냥 형식적인 질문을 해주면 좋겠....

"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묻겠습니다! 혹시 유진 씨는 어떤 타입의 여성분이 취향입니까!? "

어떻게 불길한 예감은 이렇게나 잘 들어맞는 걸까. 아, 그냥 아무렇게나 대답해줘야겠다.

" ... 그냥,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요. "

" 아, 외모나 성격 이런 거 아예 안 본다는 이야기입니까!? "

" 네. 외모나 성격 이런 거 보지 않아요. 애초에 제 주제도 떨어지는데 제가 그런 걸 감히 잴 수가 있을 리가.... "

" 에이, 충분히 그 정도면 잘생기셨는데! 자신감을 가지세요! 유진 씨! "

이 사람은 질문이 아니라 그냥 헌팅하는 거 같은데. 그냥 빨리 후딱 해치워버리고 자리로 돌아가 버리자.

"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질문도 끝났으니 자리로 돌아가보겠... "

" 아니요! 마지막으로 물을 질문이 있습니다! 유진 씨 혹시 여자친구 있으신가요!? "

" ... "

안 끝난 거야? 교수님 이거 끝내줘야 하시는 거 아닌가요?

기대를 살짝 걸어보고 고개를 살짝 돌려보았지만, 교수님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말릴 생각이 없으신 것 같다.

" 맞아. 나도 그거 궁금했는데. 저분 여자친구 있을까? "

" 아마, 있을걸? 원래 수수하신 생기신 분들이 더 잘 노는 법이야. "

" 아까 외모랑 성격 안 본다고 했으니까 만약 여자친구 없다고 하면 나중에 대시해 볼까? 난 너무 잘생긴 분들은 부담스럽더라고. "

" 지랄하고 있네. 그냥 말만 그렇게 한 거지. 세상 어떤 남자가 실제로 여자 외모랑 성격을 안보겠냐? 그리고 여자친구 없어서 네가 대시해봤자 어차피 차일 테니까 꿈 깨라. 병신새끼야. "

여자친구가 있냐는 질문 하나에 강의실에 앉아있던 나머지 여성분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자기들끼리 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어차피 교수님은 지금 이 상황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가만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니 그건 또 내 처지가 곤란해질 것 같고.

' 하아. '

결국, 꺼낼 수밖에 없는 건가.

지금 이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괜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내 처지가 귀찮아질 게 확실히 보이기 때문에 지금 이 질문에 대해서 내가 답을 확실히 하는 게 좋아 보였다.

' 하고 싶지 않았는데. '

여기서 진실을 확실히 꺼내 놓아야 괜히 이상한 사람들이 더 이상 나에게 접근을 하지 않겠지.

그래, 말하자.

" 여자친구 없으신가요!? "

" 네. 없어요. "

" 오!? 그런가요!? 그럼 기회는 언제든지 열려 있는 게 맞겠... "

" 그 대신. "

나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형광등 빛에 비추어져 반짝반짝 빛이 나는 약지에 끼워져있는 반지가 강의실에 앉아있는 모두에게 목격되었다.

" 아내는 있어요. "

" 아! 아내가 있으시구나!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모든 여자에게 기회는 열려…. 잠깐만요. 저기요. 뭐라고 하셨어요? "

" 역시, 좋을때지. 원래 젊을 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면서 연애를 많이 해봐 ㅇ.... 잠깐만, 유진 학생. 방금 뭐라고 했지? "

강의실에 있는 모두가 얼빠진 얼굴을 지은 채 마치 자기가 잘 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여러분들이 잘못 들은 게 아닙니다.

" 저, 여자친구는 없는데 아내는 있어요. 이거 커플링이 아니라 결혼반지거든요. "

모두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떡 하니 벌리고 있을 때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교수가 먼저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 어, 그러니까 유진 학생이 결혼을 했다는 거지? 유부남? "

" 네. "

" 그럼, 그러니까... 언제 결혼을 한 건지 내가 물어봐도 괜찮으려나? "

" 아, 20살 때 바로 결혼을 했습니다. "

" 아이고. 그렇구나. 결혼했는지는 정말 예상하지도 못했네. 이거 진짜 미안해서 어떡하나. 그런 줄 알았으면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게 막았을 텐데. "

" 아니요. 괜찮아요. "

그 순간 눈동자를 살짝 움직여 강의실 내부를 둘러보자 여자친구가 있냐고 나에게 물어봤던 장본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건지 입을 틀어막은 채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 밖에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시시덕거리고 있던 여성분들 모두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교수님도 입술이 마르는 건지 자꾸 혀를 날름거리며 난감하다는 듯 계속 말을 더듬고 있었다.

" 어, 혹시 내가 물어보긴 좀 미안한데 일이 이렇게 돼버리니까 아무래도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혹시, 괜찮겠지? "

" 네. 뭐, 제가 대답할 수 있는 선이라면. "

" 아이를 혹시 가지고 있나? 그, 요즘 말하는 속도위반. 이런 거라서 급하게 결혼을 한 건가? "

아....

하긴, 요즘은 내 나이 때 결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정답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주었다.

" 아니요. 속도위반 이런 건 아니고 그냥 서로 좋아해서 연애 결혼 한 겁니다. 아직 아이는 없어요. "

" 아, 그렇구나. 아아, 그래. 내가 괜한 오해를 했네. 그래 서로 사랑하니까 결혼을 한 거겠지. 아, 음, 자, 자리로 돌아가도 괜찮네. 몸조심하고 그럴 일은 없긴 하지만 혹시나 과 내에서 집적거리는 녀석들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나한테 와서 얘기해주면 되니까... "

" 배려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

" 어어... 자리로 돌아가게나. 음. 어. "

나의 폭탄 발언 덕분에 분위기 좋던 강의실 안은 어색하고 서먹한 공기가 감돌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내 잘못 아니다? 난 그냥 질문에 성실해 대답해줬을 뿐이라고. 날 원망하지는 말아줘. 얘들아.

' 하, 힘들었다. '

자기소개 짧게 하고 질문 몇 마디 나눈 거 가지고 왜 이렇게 심장이 벌렁거리고 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 거지?

' 제발, 다른 오리엔테이션 때는 자기소개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다. '

한 번 한 거로도 이렇게나 힘든데 이걸 두 번, 세번 연속으로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릿속이 아찔해져 간다.

" 제발 다른 오리엔테이션 시간 때는 교수님이 아무것도 안 해주시기를. "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

나는 뒷자리에 앉은 채 거사를 치르고 허약해진 몸을 스스로 마사지해 주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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