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대학생 유부남
* * *
아내>[사람 많아?]
유진>[네, 좀 많아요. 아무래도 인기가 많은 과니까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네요]
아내>[그래? 여자들도 많아?]
여자들도 많냐고?
고개를 살짝 들어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대략 봤을 때 후드티를 쓰고 있거나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서 정확한 성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빼면 대충....
유진>[반반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솔직히, 우리 과가 남녀구분 없이 인기가 많은 과라서]
아내>[흠, 그렇구나. 내가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너 거기 있는 여자들이랑 이야기 절대로 나누지 마. 알겠어?]
유진>[알겠어요. 사적으로 이야기는 절대로 안 나눌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세요]
아내>[사적으로는 안 나눈다고? 그럼 공적으로는 나눈다는 거야? 너 제정신이야?]
유진>[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는걸요? 대학교에 들어온 이상 조별 과제나 여러 가지 행사 때문에 결국 여자들이랑 같은 조가 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럼 그럴 때마다 저 혼자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아내>[어……. 음]
아내도 할 말이 없는가 보다. 솔직히, 아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건 자기가 나한테 아무리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려봤자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을.
즉, 불가항력이라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아내도 이해를 해줄 게 뻔했다. 물론 해맑은 웃음과 기쁨을 보여주며 이해를 해주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아내>[하…….]
짧은 카톡 한 마디에 그녀의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것 같았다.
아내>[그래, 뭐. 그건 어쩔 수가 없으니까 이해할게. 거기까지는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 대신 네가 말한 것처럼 불가항력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 경우에서는 무조건 너희 과에 있는 여자들이랑 엮이려고 하지 마. 알겠어?]
유진>[알았어요. 꼭 명심할게요]
아내>[대답 잘해서 좋네. 그나저나 각자 개인 책상인 거야? 따로따로 앉는 거지?]
개인 책상이냐고? 아, 고등학교에서 시험을 칠 때처럼 각자 간격을 둔 채로 앉는 거냐고?
흠, 다른 강의실이라면 모를까 유감스럽게도 지금 내가 있는 이 강의실은 긴 책상에 의자가 두 개 놓여있었기 때문에 한 책상을 두 명이 같이 쓰는 구조였다.
유진>[아니요. 다른 강의실이라면 모를까 제가 지금 있는 이 강의실은 한 책상을 두 명이 같이 쓰는 구조에요]
아내>[그래? 그럼 네 옆에도 모르는 사람이 앉아 있겠네?]
내 옆에?
고개를 돌리자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로 곤히 꿈나라의 세계의 빠져있는 긴 생머리의 여성분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진짜 엄청나게 잘 자고 있어. 이분. 지금 강의실 안은 숙면을 취하기에는 전혀 적합한 환경이 아닌데 이렇게나 잘 자고 있다니.
이 정도면, 거의 꿀 숙면인데? 뭐, 밤새 영화라도 보면서 혼술이라도 찐하게 즐기신 건가?
귀를 쫑긋 기울이자 미약하지만, 그녀는 코까지 골고 있었다.
'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 '
일단 그나저나 내 옆에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있었으니까 아내한테 말을 해줘야겠지?
유진>[네. 지금 모르는 여자분이 옆에 앉아서 책상에 머리 박은 채로 곤히 주무시고 계시는…….]
잠깐만.
순간적으로 등에서 솟아오르는 아찔한 한기와 마치 썩은 음식이라도 본 것처럼 팔에선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동물적으로 위기감을 감지한 걸까? 온몸에 존재하는 나의 감각이 당장 아내한테 카톡을 보내라는 것을 중지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과연 내가 이렇게 카톡을 보냈을 때 아내가 뭐라고 반응을 할까?
내가 단순히 다른 여자를 언급하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게 바로 우리 아내다.
어느 정도로 심하냐면 내가 그냥 단순히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TV 드라마를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후다닥 달려와 TV 전원을 끈 다음 " 왜 그딴 걸쳐보고 있어!? " 라고 말하며 불같이 화를 내면서 길길이 날뛰는 정도.
그런 아내에게 내 옆에 다른 여자가 자고 있다고 말을 한다면? 심지어 한 책상을 같이 쓰는 구조인데...?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듯 느리게 흘러갔으며 나는 빠르게 대가리를 굴려 내가 이 카톡을 보낼 시 나에게 벌어질 상황을 빠르게 계산하며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나갔다.
순식간에 정리를 끝마친 나의 머릿속에서 나온 결론은 오직 한가지였고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내에게 보낼 카톡을 순식간에 전부 다 지워버렸다.
' 크, 큰일날뻔 했다. '
이건 아내가 약간 나를 떠보는 듯한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하마터면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식간에 넘어갈 뻔했네.
와 진짜로 큰일 날 뻔 했네. 정말 자랑스럽고 대견스럽구나. 나의 동물적인 감각이여. 나의 순간적인 판단 때문에 너는 오늘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단다.
나는 그녀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착한 거짓말을 지어내며 그녀에게 카톡을 보내주었다.
유진>[아니요. 없어요. 다들 자기 아는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앉아서 저 혼자서 쓸쓸히 앉아있는걸요?]
아내>[그래? 마음에 드는 이야기네. 아주 마음에 들어]
와, 다행이다.
' 와, 만약 고치지 않은 상태로 진실한 카톡을 보냈으면 진짜로 오늘 아찔했겠는데? '
생각만 해도 몸에 소름이 우수수 돋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착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하게 " 네. 지금 모르는 여자분이 옆에 앉아서 책상에 머리 박은 채로 곤히 주무시고 있어요. " 라고 보냈더라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오늘 하루는 짜증이 잔뜩 섞인 카톡과 냉기가 풀풀 풍기는 전화에 시달리면서 앞으로 닥칠 지옥에 겁에 잔뜩 질린 채 죄인처럼 집에 터덜터덜 걸어갔겠지.
최악의 상황이라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내가 일 따윈 신경도 안 쓰고 모조리 집어치우고서는 자동차를 타고 대학교까지 달려와서 강의실로 들이닥친 다음 내 머리채를 부여잡고 집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다.
그러고 집에 돌아가면 온갖 설교를 당하겠지. 뭐, 심한 경우 사랑의 매를 맞아가면서 설교를 듣게 될 테고.
행동 조심하자. 유진아. 여태까지 아무리 잘했어도 순간의 방심으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면 나락에 가는 건 한순간이다.
아내>[아, 이만 가봐야겠다. 너. 내가 등록금 대 준거 아깝지 않게 하루하루 집중해서 공부 열심히 해? 알았지? 졸지 말고 딴짓도 하지 말고]
유진>[그건 제가 더 잘 알고 있어요. 꼭 열심히 해서 좋은 학점 받고 졸업해서 얼른 취직해 당신 부담도 덜어줄 테니까 믿고 기다려줘요]
아내>[알았어. 사랑해]
유진>[저도, 사랑해요]
마지막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따듯한 카톡을 보내자 마침 딱 타이밍이 맞게 강의실의 앞문이 벌컥 열리게 되었다.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끄고 품속으로 집어넣었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고 나뿐만 아니라 강의실의 앞문이 열리자 시끄러웠던 강의실도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었죠? "
희끗희끗한 백발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는 중년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만화 속에서 나오는 모범생 캐릭터가 나이가 들면 딱 저렇게 자랄 것 같은데? 깔끔한 정장에다가 얼굴에 동그란 안경까지 끼셨네.
' 인상 좋으시네. '
왜, 뭐랄까. 되게 유해 보이시고 너그러워 보이시는 분이네. 마치 고등학교 때 학교마다 한 명씩 있는 완전 자비로운 스타일의 선생님과 비슷한 기운인걸?
그녀는 헐레벌떡 들어와 손에 들고 있는 두꺼운 책을 책상 위에 두고서는 가만히 서서 강의실 전체를 마치 스캔한다는 듯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저 교수님도 내가 방금 대충 첫인상으로 그녀가 어떤 사람일지 추측을 한 것처럼 그녀도 대충 눈동자를 굴려 가며 책상에 앉아있는 학생들 개인을 살펴보면서 마음속으로 우리가 어떤 놈일 것 같다면서 대략 윤곽을 잡고 계시겠지.
짝ㅡ
대충 스캔을 마친 걸까? 손을 세게 마주치고서는 교수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 흠, 일단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있어서 약간 수업 시작 시간을 오버해서 오게 됐는데 약간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뭐, 괜찮으시죠? 다들? 화난 건 아니죠? "
" 아닙니다. "
" 오, 대답해주시다니! 오, 이건 좀 의외네요. 다들 첫날에는 눈치만 보기 바쁘고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아무런 대답을 안 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렇게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시다니. 조금 감동받았습니다. "
" 하하, 아닙니다! "
이건, 조금 놀랍네. 아까 교수님이 말한 것처럼 보통 첫날에는 교수님이 어떤 말을 하던 다들 조용히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눈치만 보는 게 대부분인데 말이야.
저렇게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할 줄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해서 꽤 어안이 벙벙하다.
' 누가 대답한 거지? '
살짝 눈동자를 굴려보자 맨 앞자리에 앉은 예쁘장한 여성분이 한눈에 들어왔다. 원래 세상이었으면 여성들이 좋아할 스타일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남들의 시선을 한눈에 확 끌어버리는 멋있는 옷차림까지.
' 인싸네. '
백 퍼센트다. 핵 인싸다.
애초에 누군가의 말에 큰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싸는 아닐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저 외모를 보니까 아싸는커녕 인싸를 넘어선 친화력의 끝판왕이 확실했다.
저런 사람들은 친화력이 엄청 좋아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거리낌 없이 다가가 말을 트고 하므로 내가 무조건으로 피해야 할 사람이었다.
아내와의 약속도 지켜야 하고 애초에 아싸 기질이 높은 나는 저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무언가 불편해서 나에게 다가오려는 조짐이 보인다면 무조건 뒤도 안 보고 도망을 쳐버려야겠다.
" 자, 일단 제 소개부터 해야겠죠? 일단 제 이름은 김성정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
잠깐 이어지는 박수. 나도 소심하게 뒷자리에 앉아서 박수를 쳐주었다.
박수가 그치자 그녀는 보드마카의 뚜껑을 열고서는 아까 전부터 커다란 화이트보드 중앙에 적혀있던 정체불명의 숫자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 이거 제 전화번호입니다. 전화번호는 여기 화이트보드에 적힌 대로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시면 저한테 바로 전화를 걸어주시면 되는데 뭐, 어차피 다들 저장 안 하실 거잖아요. 그렇죠? "
" 예! 아니지, 아닙니다! 저장하겠습니다! "
그러자 터지는 웃음소리의 향연.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아까 그 여성분의 대답에 교수님도 옅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 자꾸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하는데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장 안 할 건 저도 다 알고 있으니까요. 뭐, 제 전화번호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요. 본격적으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 예! "
" 시간 많이 안 잡아먹을 겁니다. 설명할 게 그렇게 많지도 않고요. 여러분들도 지루하고 허리 아프게 의자에 앉아서 2시간 동안 듣는 것도 고역이잖아요? 그러니까 간단하게 딱 10분 정도만 소개를 하도록 할 겁니다. "
" 오오오.... "
웅성웅성 들리는 환호 소리에 교수가 웃음을 씩 짓더니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 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렇다고 10분만 하고 수업 끝! 이건 아닙니다. 알아두세요! "
" 에이... "
" 10분하고 수업을 마쳐버리면 여러분들도 딱히 할 게 없을걸요? 그러니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간단하게 같은 과 사람들끼리 얼굴도 익히고 친목을 도모하라는 겸 자기소개를 시행한 후 끝낼 겁니다. "
그러자 아까부터 대답을 열심히 하시는 친화력 끝판왕의 여성분은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지만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절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아, 이런 젠장. '
모든 아싸들이 새학기날 가장 무서워한다는 시간.
자기소개가 돌아와 버렸다.
큰일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