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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의 평범한 유부남-5화 (5/77)

〈 5화 〉 대학생 유부남

* * *

" 하나도 바뀐 게 없네. "

넓은 캠퍼스, 다양한 개성을 가진 채로 캠퍼스 내를 활보하는 학생들.

원래 세계에서 내가 항상 보던 광경이랑 비교해보아도 학교의 풍경은 아예 다른 게 없었다.

뭐,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남녀역전의 세상이니까 시원시원한 복장을 갖춘 여성분들이 확실하게 많았다.

가령, 속옷을 안 입어서 속살이 다 비추어지는 흰 티를 입는다던가, 치마를 입은 채로 벤치에 앉아 다리를 쩍벌린다던가. 뭐, 이런 거 있잖아.

근데, 별 감흥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뭐, 이곳에서 하루 이틀 산 사람도 아니고 2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내면서 결혼도 하고 할 것도 관계도 가지면서 할 것은 전부 다 해봤는데 겨우 저런 거 보고 흥분에 젖은 콧바람을 내뿜을 리가 있겠는가?

그나저나 더워 죽겠네.

' 오늘 햇빛 미쳤네. '

지하철을 나선 다음 학교 캠퍼스 안까지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마치 프라이팬에 굽는 계란후라이처럼 익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더위를 이겨보려고 옷소매를 걷어보았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문제 자체는 해결이 안 되었기 때문에 안쪽이 후끈후끈해져 훈제 치킨이 돼버릴 것 같았다.

' 으아아아. 더워. '

진짜 미치도록 벗고 싶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에어컨 때문에 몸이 춥기 때문에 카디건을 벗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겠지만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잖아?

지금의 나는 당장이라도 이 거추장스러운 카디건을 벗어던지고 반팔차림으로 캠퍼스 내를 훨훨 뛰어다니며 활보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 뭣이여. 저게. "

짧은 반바지를 입고서 팔에 새겨진 문신을 뽐내기라도 하는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내 앞을 지나가는 남성이 나의 시선을 순식간에 끌어내렸다.

" 부럽네. "

젠장.

부럽다. 엄청 시원하겠네. 바람도 잘 통하고 땀도 잘 마르겠지? 밖에 다닐 맛 나겠네.

방금 내 앞을 지나간 저 남성분은 우리 집에서는 꿈도 못 꾸는, 그야말로 망상과 포르노 속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만약, 내가 방금 내 앞을 지나간 저 남성분처럼 입고 밖을 나선다고 하면 아내가 과연 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깐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보자 대충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비디오처럼 서서히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너, 그 옷차림 뭐야? 누가 그런 거 입으래? '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

' 네? 그냥 덥잖아요. 이 날씨에 긴 팔 긴바지 입는 것도 좀 그렇고 아무래도 여보가 보기도 괜히 둘둘 둘러매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지 않아요? '

그리고 나는 나의 모습에 대해 열심히 변호를 펼치겠지.

' 개소리 하지 말고 당장 방으로 돌아가서 옷 갈아입고 와. '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힐 테지.

' 아이참, 여보. 왜 그래요? 이거는 다른 남자들도 다 입는 건데. '

그럼 나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교를 부려 볼 테지만.

' 네가 다른 남자들이랑 같아? 넌 유부남이야. 모시는 사람이 있는 유부남이라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저런 망측한 옷을 입고 밖을 돌아다닌다고!? 네가 제정신이야!? '

' 어, 그게 아니라. '

'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옷 안 갈아 입어? '

' 아니, 그렇지만... '

' 이게 팍 씨!? 너 진짜 한 대 맞을래!? '

결국, 아내는 손을 들어 올리겠지. 그리고 그녀의 화를 이기지 못한 나는 다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옷장에 가서 옷을 갈아입을 테고.

흠, 보인다 보여. 아주 잘 보인다! 결혼 생활 1년 만에 모든 것을 통달한 나는 이미지 트레이닝의 신인 건가!?

아마, 방금 내 앞을 지나간 남자분처럼 맨살을 다 드러내는 옷을 입은 내가 관뚜껑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입는 건 불가능하겠지.

절실한 애교로도 넘어갈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 법이니까 말이야.

나의 이런 모습을 원래 세상의 남자들이 본다면 분명 이렇게 말하겠지.

" 아니, 씨발! 남자 새끼가 완전 수컷 노예 타락했네! 자존심도 없냐!? 자지 떼고 다녀라. 병신 새끼야! "

응 맞아.

난 이미 완전 수컷 노예 타락해버렸어. 자존심도 이미 버린 지 오래야.

근데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더라고. 그리고, 우리 아내가 휘두른 주먹을 맞잖아? 그럼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정신머리가 번쩍 들면서 없던 복종심도 샘솟아 오를걸?

진짜 뒤지게 아파. 욕 나올 정도로 아프다고. 아내는 우리처럼 일반인은 아니라서 몸 안에 잠들어있는 힘 자체도 우리랑 규격이 다르단 말이야.

" 기억나네. 처음 맞았을 때가. "

그때가 언제였더라? 무슨 일로 다투게 됐더라? 좀 많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서로 의견 차이로 다툰 걸로 아는데.

음, 모르겠다. 별로 떠올려봤자 좋은 기억도 아니고 서로가 상처 입은 기억인데 굳이 머릿속을 뒤져서 끄집어낼 필요는 없지.

넘어가자. 넘어가.

" 그나저나, 진짜 이대로 있다가는 찐만두가 될 것 같으니까 그냥 빨리 들어가야겠네. "

밖에서 사람 구경을 더 하고 싶었지만, 밖에서 시간을 더 보냈다가는 내 목숨줄이 왔다 갔다 할 것 같으므로 한시라도 빨리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실내로 들어가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사실 아내가 안 보고 있기도 하고 큰 사건을 벌이지 않는 이상 아내는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아내와 내가 한 약속을 내 손으로 이렇게 금방 깨뜨려버리고 싶진 않았다.

뭐랄까. 양심에 찔린다고 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피의 새겨진 복종심이라고 해야 할까? 이 현상에 대해 뭐라 딱히 설명할 게 없네.

아무튼, 일단 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 어디 보자. 어디였더라? 분명히 이 근처였는데. "

핸드폰을 켜 미리 사진을 찍어 둔 개인 시간표를 뒤져 제일 먼저 들어 있는 수업의 강의실을 찾아보았다.

" 아, 그래. 맞아. 미래관이었지. "

1층이네? 완전 럭키다. 괜히 귀찮게 계단으로 왔다 갔다 하거나 엘리베이터 기다린다고 시간 안 잡아먹어도 되니까 개꿀!

원래 세계에서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관이라서 대충 강의실 번호만 훑어보아도 위치가 어디인지 짐작이 간다.

딱히, 안내표지판을 보면서 일일이 시간을 잡아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가방을 들쳐메고 빠르게 미래관 앞으로 달려갔다.

" 오랜만이네. 여기도. "

여기 진짜 오랜만에 와보네. 어디 보자, 내부도 똑같겠지?

" 역시나. 전부 똑같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그럼, 내 강의실이 125 강의실이니까. "

이대로 쭉 직진하면 곧바로 보이겠네. 아, 그나저나 진짜 실내는 천국이네. 천국이야.

단지 건물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도 내 몸을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없으니까 진짜 사람이 살 것 같네. 살 것 같아.

' 정수리부터 사람이 익을 뻔했네. 와, 머리가 진짜 뜨거워. 여기다가 날계란 올리면 얼마 안 가 삶은 계란으로 푹 익혀질 것 같은 수준인데? '

혼자서 정수리 부분을 만지면서 다가간 125 강의실.

시계를 보니 아직 수업이 시작하기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며 강의실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온몸에 느껴지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 행복하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정말 에어컨이라는 것은 인류가 발명한 세계 최고의 발명품이 틀림없어.

이게 없었으면 도대체 여름을 어떻게 버텨야 할까? 잔뜩 땀이 흘러나와서 찐득찐득해진 몸을 가누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겠지? 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 그나저나. 사람 엄청 많네. '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두 눈동자에 넓은 강의실의 모습과 그 속에 빼곡하게 앉아있는 학생들이 들어왔다.

다들 나랑 똑같이 첫날이니까 일찍 등교를 해서 강의실에 앉아있는 게 확실했다. 사람 진짜 엄청나게 많네.

하긴, 내가 다니는 학과가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고 취업도 잘되는 과니까 인원이 많은 건 당연한 사실이겠지.

' 일단 조용히 들어가자. '

괜히 주목받고 싶지 않다.

난 정말 조용히 학교생활을 이어나가고 싶기 때문에 괜히 이상한 짓을 하면서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눈초리를 받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러니까 괜히 쿵쿵거리면서 가지 말고 살살 걸어서 조용히 뒷자리에 자리 잡고 핸드폰이나 만지고 있...

쿵ㅡ

" 아. "

땀이 나서 잔뜩 미끄러워진 손 덕분일까? 나는 살살 닫으려던 문을 그대로 툭 놓아버렸고 그러자 문이 그대로 닫히면서 큰 소리를 내버렸다.

나의 짧고 작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의 눈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시선.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면서 빠르게 남아있는 뒷자리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다.

아이고, 이 멍청한 놈아. 어떻게 씨발, 눈에 띄는 행동하지 말자 라고 마음먹자마자 그런 짓을 저지르냐!

" .... 그래서, 내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 "

" 아하하? 그래? 그래서 그 새끼는 어떻게 된 건데? "

" 야, 이거 봐. 내가 어제 혼자 경쟁 전 돌리면서 발견한 건데 이 템트리로 가면 진짜로 무조건 필승이라니까? 내 말 한 번만 믿어봐. "

" 어, 자기야. 아니야. 아직, 교수님 기다리는 중. 나? 그냥 앉아있지. "

다행히 곧바로 그들은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었고 각자 자기들 일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했다.

' 십년감수했네. '

그나저나 다들 친구들끼리 같은 과를 온 건가? 벌써부터 무리 지어있는 사람들이 있네?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랑 전화하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뻘쭘하게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도 있고 말이야.

뭐, 사실 대학교 첫날 강의실의 모습은 어느 세상을 가나 이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긴 하단 말이지. 그리고 등교 첫날, 강의실에서 내가 할 것이 없어서 쭈뼛쭈뼛하는 것도 어느 세상을 가나 별반 다를 게 없구나.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는 좀 부끄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것도 조금 불편하기 때문에 나는 재빠르게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을 보고 있다는 것은 " 나한테 말 걸지 마세요! " 라는 의사 표현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높은 인싸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나머지는 철저하게 방어할 수 있으니까 이 좋은 행동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곧바로 잠금화면을 열고 카톡으로 들어가 제일 위 상단에 있는 아내와의 대화창을 연 다음 곧바로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유진­>[나 도착했어요. 지금 강의실]

혹시 아내가 의심병이 도져 꼬치꼬치 캐묻는 카톡을 보낼 수도 있으니 강의실 천장이 보이며 내 얼굴이 반 정도 보이는 셀카를 찍어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곧바로 1이 사라지고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

아내­>[ㅇㅇ]

거참, 대답 한 번 심플하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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