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대학생 유부남
* * *
" 굳이 그렇게 부랴부랴 준비하는 이유가 뭐야? "
" 네? "
그녀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반 정도 먹을 때 나는 이미 아침 식사를 완료하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있었다.
가만히 식탁에 앉아서 그녀는 숟가락을 든 채로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 고등학교도 아니고 대학교는 그 뭐랄까, 고등학교보다 훨씬 자유로운 거 아니야? 웹툰이나 TV 보면 거기서 나오는 주인공들은 항상 늦게 가거나 지각을 밥 먹듯이 하던데. "
그건 TV랑 웹툰이잖아...
" 굳이 일찍 가서 강의실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
" 뭐, 그렇긴 한데, 괜히 어영부영 여유 부리다가 지각하는 것보다는 일찍 가는 게 낫잖아요. "
첫 시간부터 지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일찍 가서 먼저 자리에 앉아있는 게 나으니까 몸이 귀찮더라도 어쩔 수 없지.
" 흐으음, 흠. "
됐다. 이제 모든 준비도 끝났고 시간도 지금 문을 열고 나가면 딱 맞춰 학교에 도착할 것 같았다. 난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집 밖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내 모습을 점검해보았다.
혹여라도 머리가 뜬 건 아닌지, 옷이 제대로 정리가 된 건지, 이상한 거라도 묻어있는 게 아닌지, 난 내 모습을 꼼꼼히 점검했다.
" 저, 여보. 혹시라도 제 모습. 이상해 보이지는 않죠? 괜찮죠? "
" 뭐, 괜찮아. 그렇게 나쁘지도 않고 그렇게 좋지도 않아서 딱 적당해 보여. 너 근데 안에 뭐 입었어? "
" 안에요? "
" 어, 카디건 안에 뭐입었냐고. "
마치 흉악 범죄자를 검문 수색하는 경찰처럼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그녀는 내가 카디건을 들추기를 기다렸다.
" 그냥 얇은 반팔 입었죠. "
카디건 안쪽을 들추자 대단한 문양도 숫자도 박혀있지 않은 단조로운 색깔의 얇은 반팔만이 새하얀 내 나신을 가려주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아내는 반팔을 입은 내 모습을 보고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 반팔은 왜 입었어? "
" 네? 왜 입었다니요. 오늘 햇빛이 쨍쨍해서 더우니까 입었죠. "
누나, 저 뜨거운 밖이 보이지 않는 거야? 고개를 돌리고 창문 밖을 봐.
뜨거운 태양의 햇빛이 나그네의 옷을 벗길 것처럼 미친듯한 열기를 뿜어대고 있잖아. 이런 날씨에 얇은 반팔을 입지 않는다면 더위에 지쳐 길가에 푹 쓰러져 버릴걸?
" 마음에 안 들어. 그냥, 반팔 말고 긴 팔 입고 가. 당장 가서 옷장 열고 갈아입어. "
왜, 뭐가 문젠데.
" 네? 하지만, 오늘 긴 팔 입으면 정말 쪄 죽을 거 같은데. "
그의 투정에 곧바로 이어지는 엄한 목소리.
" 너는 결혼을 한 유부남이 밖에서 조신하게 다닐 생각을 안 하는 거야? 학교 가면 다 남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들도 많은데 거기서 외간 여자에게 함부로 속살 보여주려고? "
숟가락으로 나의 몸을 가리키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자 저절로 내 몸이 움츠러졌다.
" 그, 그냥 더워서 입은 거예요. "
" 뭐, 너는 더워서 입었겠지만 그걸 보는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 긴 팔로 갈아입고 나와. 안 그러면 학교 안 보내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또 왜 그러실까.
" 여보. "
" 안돼. 안 바꿔줘. 바꿔줄 생각 없으니까 당장 다시 옷장 열고 옷 입으러 가. "
" 아이, 여보. 왜 그래요. "
한 번 한다면 하는 아내라서 이럴 때는 철저하게 그녀에게 엉겨 붙어서 애교를 부려야 한다.
아무리 가부장적이고 냉정하며 나에게 짜증과 화를 잘 내는 아내라도 여자기 때문에 남자의 애교에는 약하기 마련이니까.
" 여보. 한 번만 봐줘요. 긴 팔 입고 가면 저 진짜 바깥에 돌아다니다가 풀썩 쓰러져버릴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제가 빙결능력을 사용하는 헌터도 아니고 일반인인데. "
" ...안된다고. "
내가 이런 그녀의 반응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는 매우 익숙한 편이다. 이렇게 된다면 당황할 필요 없이 빠르게 타협점을 찾으면 된다.
" 여보, 제 얼굴 보고 한 번만 봐주면 안 돼요? 그럼 오늘만 이렇게 갈게요. 다음부터는 얇은 긴 팔 입을 테니까 오늘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
이 정도면 괜찮지? 오늘 하루만이잖아. 그 정도는 네가 이해해줄 수 있잖아.
" ... "
아내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키가 작은 남성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면서 올려다보는 걸 그 어떤 여성이 참을 수 있을까?
" 알았어. 알겠으니까 다음부터는 반팔 입고 가지 마. 알았어? "
좋다. 그녀가 한발 뒤로 물러나 주었다.
더욱 욕심을 부려보고는 싶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할 수 있음으로 적당한 선에서 만족을 해야 한다.
" 고마워요. "
" 대신, 더워도 카디건을 벗지는 마. 옷 소매만 위로 걷어 올려. 알았어? "
깐깐하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뭐, 자신의 남편을 지키려는 아내의 마음을 표출하는 거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려주었다.
" 알았어요. 카디건 안 벗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 다른 여자들이 말 걸어도 웬만하면 무시하거나 짧게 대답하고 혹여라도 달라붙으면 약지에 끼워져있는 결혼반지 꼭 보여주고. 알았어? "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금색의 반지. 사랑을 의미하며 내가 결혼을 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징표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걱정이 많네. 그럴 필요는 단 하나도 없는데. 난 NTR 취향이 아니니까.
" 알겠어요. 나, 그렇게 절조 없고 지조 없는 남자 아닌 건 여보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요. "
솔직히 다른 여자에게는 나도 관심이 없다.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녀에게 받은 은혜가 있으니까, 나에게도 책임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 저, 못 믿어요? "
" ....아니야. 믿지. 믿는데 그 늑대 같은 새끼들을 못 믿는 거지. "
" 걱정 붙들어 매세요. 다가오거나 관심 가지는 여자마다 철벽 단단히 칠 테니까. "
아예 관심조차도 안 가져줄 테니까 제발 걱정 붙들어 매세요. 나도 괜히 관심 가졌다가 아내한테 두들겨 맞고 싶지 않단 말이야.
맞으면 아파. 좀 많이 아프단 말이야. 아내도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라서 일반인인 내가 맞으면 좀 많이 아프단 말이야. 그러니, 죽어도 바람 따위는 피지 않을 거라고.
나는 싱긋 웃음을 지어주고서는 의자에 놓여있는 가방을 둘러업었다.
첫날이라서 아직 교재는 가방 안에 없었고 그 덕분에 등에 멘 가방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 새끼손가락으로 들 수 있는 느낌이 샘 솟아올랐다.
" 지하철 타고 가는 거야? "
" 네. 지하철 타고 가야죠. "
" 그냥 내가 태워줘? 지하철 타고 가면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 차 타면 금방 도착하잖아? "
순간 귀가 솔깃해졌다. 확실히 지하철을 타고 가면 뺑뺑 돌아서 가야 하지만 자가용을 타고 가면 뺑글뺑글 돌아서 가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단축되는 편이었다.
굉장히 마음이 가는 제안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아내한테 너무 민폐였다.
" 그렇지만 여보가 다니는 일터랑 대학교는 완전 정반대잖아요. "
" 그렇긴 한데... "
뭘, 그렇긴 해. 완전 정반대라서 나 데려다주면 출근하는데 하루종일 걸릴걸?
" 괜찮아요. 저, 혼자 갈 테니까 여보가 굳이 수고할 필요는 없어요. "
" ... "
" 대신, 그 마음만은 정말 고맙게 받을게요. 이러나저러나 저를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해주신 거잖아요? 감동이에요. 여보. "
나는 긍정의 의미 대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나를 생각해서 아내가 그런 제안을 해준 건데 기특하고 고맙지 않은가?
" 얼굴 낯뜨거워지게 뭐 하는 거야. 됐으니까 얼른 나가. 시간 아슬아슬하다며? "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내 손을 잡고 황급히 나를 떼어낸 그녀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긴, 시간이 진짜 아슬아슬하기는 하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가는 지하철을 놓쳐버리겠지.
" 갔다 올게요. "
" 그래, 갔다 와. 내가 아까 말한 거 무조건 잊지 말고. "
" 명심할게요. "
한 번 품에 안겨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서는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집 밖을 나섰다.
띠리릭ㅡ
집 밖을 나서자 바로 앞에 보이는 좁고 낡으며 냄새가 나며 균열이 일어나 부서져 부스러기가 날리는 벽을 지나쳐 잔뜩 더러워진 계단을 타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현관문 앞은 음식물 쓰레기가 쏟아져 파리가 들끓고 있었는데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눈살을 찌푸릴만한 광경과 냄새였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었기에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현관문을 나서자 보이는 빽빽한 빌라촌.
가로등도 없고 으스스하며 골목 곳곳마다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으며 자동차들이 불법주차가 된 광경은 결코 좋다고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곳의 모습이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늘 봐왔던 것이니까. 이런 모습이 일상이었으니까.
" 아잉, 누나! 성철이 배고파욤! "
여자에게 안겨 눈을 찡그리며 온갖 애교를 부리는 남성은 망사스타킹을 신고 있었으며 배꼽이 잔뜩 드러나는 티를 입고서는 방방 뛰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눈을 돌렸다.
괜히 눈이 마주친다면 온갖 귀찮은 상황에 엮여버릴 게 분명하다.
같은 남성으로서 굉장히 역겨워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놀랍게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에서 저런 모습을 보고 혐오감이 든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사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처음에 저런 광경을 봤을 때 눈을 손으로 붙잡고 절규하면서 길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는데 말이야. 추억이네.
어느새 내가 이 세상에 불쑥 떨어진 지도 2년이 지났다. 2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는데 적응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뭐, 나름대로 잘 지내고는 있다. 불쑥 이상한 세상에 떨어진 이방인치고는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는 편이다.
그렇게 몇 분을 걷자 보이는 큰 대로와 지하철역, 그리고 그 주위를 빛내는 높은 빌딩의 광고판들.
그 광고판들 속에는 남성이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며 화장품을 광고하고 있었고 또 어떤 곳에는 남성이 팬티를 입은 채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속옷을 광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남성도 그것들을 보고 심각하게 반응하거나 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들이 광고판을 보면서 자기들끼리 음란한 말을 늘어놓으며 시시덕댈 뿐.
이제, 슬슬 감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이곳은 일반적인 세상이 아니다.
내가 분명히 방금 말했지 않은가. 나는 이상한 세계에 떨어졌다고.
이상한 세계에 떨어져서 2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지 않은가?
그래, 이곳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뀐 세계.
바로 남녀역전의 세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