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09화 〉1부 (309/315)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몸짓을 선보여가며 화장실에서 빠져나오는 가영의 모습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가영에게도 신호가 왔다는 걸 말이다.

그만큼··· 가영은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닐 리 없겠지.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가영의 임신 사실로부터 비롯된 기쁨이 마음 속으로 싹을 틔우기도 전에 다른 감정이 먼저 그 자리로 밀고 들어왔다.

'잠깐만··· 이렇게 되면 족보가···'

다름아닌 그러한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감정이었다.

'어랏···? 족보의 상태가···?'

정말로 솔직히 말하면 꼬였다는 말로도 부족한 상황이긴 했다.

그래서일까.

날 따라 우르르 몰려와있던 지나하고 세나의 표정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은 둘에게 있어 열 달 뒤에 태어날 가영의 아이는 막둥이 동생임과 동시에 딸이기도 할테니까.

'그렇게 따지면 가영의 상황도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애초에 주제부터가 수렁과도 같은 것이라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늪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고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고···'

그러니 지금은 그걸 가지고 머리를 싸매는 것보다는 당장 해야할 일을 할 때였다.

"고모···"

세나하고 지나가 얼을 타고 있는 틈을 타 살짝 불안해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가영을 향해 다가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꼬옥하고 마주 잡았던 것도 다 그래서였다.

가영의 편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할 수밖에 없는 둘과는 다르게 적어도 나만큼은 가영의 편일 필요가 있다 생각했으니까.

'그나저나···'

긴장한 걸까.

아니면 뱃속에 아이가 자리를 잡은 상태기 때문일까.

붙잡기 무섭게 움찔하고 떨리는 손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살짝 뜨거웠다.

'그래···'

일이 생기면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면 될 일 아니겠는가.

지금은 순수하게 기뻐해야할 때였다.

"이 안에··· 있는 거죠?"

그래서 슬그머니 손을 뻗어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는 가영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더니만 그제서야 다들 정신이 든 것일까.

세나하고 지나가 복잡함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을 한채 가영을 향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순수하게 기뻐해주자니 그럴 수가 없었던 모양.

그 와중에 세나는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쓴웃음을 짓고 있더라.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된 관계로··· 참으로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 가족 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물론, 그것을 제안한 것은 다름아닌 세나였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리고 가족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지나로부터 맹공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만큼 대책또한 필요하다 판단한 것일까.

문제는 그렇게 물어봐도 나도 딱히 대책이라 할만한 게 없다는 것이었지만.

"일단은··· 결혼식부터 서둘러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보니 그런 말밖에는 내놓을 수가 없더라.

이런 상황에서 적절치 못한 말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만에 하나 결혼 준비를 한답시고 허송세월을 하게 된다면?

세나 뿐만이 아니라 지나하고 가영의 배도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하겠지.

초기야 옷같은 걸로 숨길 수 있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숨기는 데에도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럴 수만 있다면 서두르는 게 맞긴 했다.

자칫 잘못하면··· 결혼식장에 임신배를 한 사람이 세 명이 될 수가 있으니까.

그리 된다면?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여한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야 안봐도 뻔한 이야기겠지.

물론, 우리들의 관계가 워낙 상식밖인지라 진실에 도달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될 수 있으면 억측을 받는 것조차 피해야하는 상황이 작금의 현실이었으니까.

'아니면···'

하객 없이 우리들끼리만 결혼식을 올려도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 하는 결혼인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내 욕심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남들이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줬으면 하는 것이 내 솔직한 바람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그리 말했던 것이었는데 참으로 다행히도 내 뜻이 셋한테 무사히 전달되었는지 내 설명을 들은 이들이 이해했다는 듯 조심스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뭐··· 그 부분이야 그렇게 한다고 쳐. 한다고 치는데···"

진짜는 역시 그 다음이었지만.

"그럼 아이들은?"

역시 지나도 그 점이 신경쓰였던 걸까.

아니, 그 부분이 신경쓰였던 건 지나 뿐만이 아닌 듯 했다.

지나는 어디까지나 대표로 나선 것일뿐 다른 둘도 그 점이 신경쓰이는 건 마찬가지인 듯 했으니까.

그래서일까.

지나의 입에서 그 질문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셋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날아와 꽂혔다.

그럼에도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기는 했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딱 하나 방법이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게 내 독단으로 진행시켜도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고.

지금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그걸 실제로 이행하려면?

다름아닌 세나와, 지나, 그리고 가영의 동의가 필요했다.

문제는 세나가 그런 걸 과연 허락하냐는 것인데··· 하필이면 이럴 때 양심이라는 놈이 콕콕 찔리더라.

양심같은 건 그동안 다 내다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놀랍게도 그랬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꿏은 입술만 괴롭혀대고 있었더니만ㅡ

"···뭐, 일이 이렇게 됐는데 어쩌겠어. 정 안되면 셋 다··· 내 아이인 걸로 해야지."

아까부터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유일하다시피한 해결책이라는 놈이 세나의 입을 빌려 그 모습을 드러냈다.

"···뭐?"

당연한 말이지만 지나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법이, 나라가 인정해주는 정실 자리를 빼앗긴 것도 짜증나는데 그렇게 되면 머지 않아 태어날 아이의 엄마 역할마저 세나한테 빼앗기게 되는 셈이니까.

은근히 독점욕이 강한 것이 지나인데 반응이 좋을 리가 있나.

그런 지나만큼은 아니지만 가영의 반응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새겼던 가정적인 성격이라는 설정의 영향인 걸까.

물론, 세나도 만만치는 않았다.

원래의 세나였다면 둘이 저렇게 나오는 순간 바로 깨갱하고 뜻을 접었을텐데 이번만큼은 물러나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뭐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그건···"

상황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이곳이 원래 세계였다면 우스갯소리로 일부다처가 합법인 중동으로의 이민이라도 고려해봤겠지만 남녀의 정조관념이 서로 뒤바뀐 이 세계에서는 그런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덕분에 세나의 반박을 들은 지나는 반박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지나의 반응과 일전에 솟구치는 공포심을 무릅쓰고 지나한테 역습을 가했던 기억 덕분에 새삼 자신감이 생긴 것일까.

세나의 입에서 둘을 설득하기 위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말은··· 밖에서만 그렇게 둘러대자는 거지."

"밖에서만··· 이라는 건···"

"솔직히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원래대로 해도 딱히 상관없잖아?"

확실히 그 말대로기는 했다.

남들의 눈이 없다면 아이들이 누굴 어떻게 부르든 간에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만 세나의 말대로 하자니 딱 하나 걸리는 점이 있긴 했다.

그건 바로ㅡ

"그러다가 애들이 밖에서 실수라도 하면 그때는 어쩔 건데?"

"그거야 뭐··· 애초에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잘 가르쳐야지."

"가르친다고 되겠어? 어릴 때는 정말 뭣도 모를텐데?"

"어, 음··· 그러면 적당히 잘 둘러대면 되지 않을까?"

어쩐지 세나답지 않게 기세가 좋더라니만.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더니만 지금 세나의 모습이 딱 그랬다.

기세 좋게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어물어물대고 있었으니까.

"아, 아무튼! 난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그러더니만 결국 '아! 몰랑!'을 시전해버리더라.

"어휴···"

그런 세나의 행동에 지나는 물론 가영까지 슬쩍 한숨을 내쉬었지만··· 결국에는 세나의 제안대로 하기로 했다.

세나의 말마따나 그 방법 외에는 당장 쓸만한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간신히 합의를 보고 나서부터는 전보다 더 결혼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결혼식 후에도 한국에 들어가지 말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흘러나온 건 다름아닌 그 와중이었다.

"여행을? 계속?"

"응."

"불편하지 않겠어? 시간 지날수록 다들 몸이 무거워질텐데···"

"그렇다고 한국에 들어가는 것도 솔직히 좀 그래. 한국이 좋기는 한데··· 솔직히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엄마나 언니는 한국 들어가면 진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될 걸?"

"아···"

그런 세나의 우려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단 세나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여있는 시점에서 가영이나 지나는 일반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스타 트레이너로 방송에도 몇 번 출연했었던 지나니 지나야 말할 것도 없었고, 가영도 특유의 솜씨 때문에 업계에서 꽤나 유명한 편이니 함부로 돌아나디기 힘들겠지.

그랬다가 누군가 알아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렇게 되서 임신 소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형태로든 공론화된다면?

둘러댈 말이 마땅치 않을테니 말이다.

'어차피 아이를 가진 이상 일하는 것도 힘들 거고···'

그렇다면 차라리 세나의 말대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랬다.

다만 딱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체류하는 동안 들어갈 비용인데ㅡ

"괜찮을까? 열 달이면 거의 1년인데···"

그래서 그리 물었더니만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건 어이없어하는 반응이었다.

"야, 너 언니하고 엄마 앞에서 그런 말 하지마라."

"응? 왜?"

"하··· 귀좀 가까이 대봐."

그리 말하길래 요구한대로 귀를 대줬더니만 이내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건··· 지나와 가영의 재산에 관한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걱정할 필요 없겠더라.

"내 추측이 맞다면··· 아마 열 달동안 호화 크루즈 여행을 다녀도 될 걸?"

"그 정도야?"

"어, 언니야 뭐··· 말할 것도 없지만 엄마도 은근 장난 아니거든."

하긴 생각해보면 가영이 운영하는 미용실은 애초에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의 숫자부터가 일반적인 미용실과는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었으니까.

하물며 그 위치또한 서울에서도 나름 중심지역이니··· 그 말은 즉, 임대료에 직원들 월급을 다 치루고도 남을 정도로 돈벌이가 잘 된다는 뜻이겠지.

아무튼 그렇게 된 관계로··· 세나의 제안을 둘에게도 전했다.

전했더니만··· 반응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았다.

"흠, 나쁘지 않을 것 같네."

"괜찮으시겠어요?"

"응··· 안 그래도 은근히 신경쓰이던 참이었거든."

"누나는?"

"나? 나야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쉬는 김에 푹 쉬지 뭐. 안 그래도 그동안 좀··· 빡세게 달렸으니까."

"체육관에서 뭐라고 하는 거 아냐?"

"뭐라고 하면 어쩔 건데. 거기 반이 내껀데."

아, 맞다. 그랬지.

"그래서? 어디부터 갈 건데?"

"글쎄··· 그 부분은 일단 결혼식부터 끝내고 천천히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바로 떠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까."

"하긴···"

그런 식으로 앞으로의 계획부터 시작해서 결혼식장을 빛내줄 하객 초대에 최종 점검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준비들이 하나씩 착착 갖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그 날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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