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1화 〉1부 (291/315)

그랬다.

나와 지나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섬을 빠져나온 이유는 특정한 물건들을 조달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어지간한 건 다 업체 측에서 조달해주는만큼 굳이 직접 나설 필요까진 없긴 했다.

굳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전화 한통 때려서 이런이런 물건들이 필요한데 가져다 줄 수 있냐고 요청하면 어지간한 건 전부 가져다 줬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나와 지나가 직접 나선 건··· 그런 식으로는 구하기 애매한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구해가려는 것이 뭐 엄청나게 귀한 물건이라거나 업체 측에서 구해주는 걸 꺼릴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구해달라고 하면 어렵지 않게 구해다 줄 거다.

그만큼 꽤 흔해빠진 것이기도 했고, 돈만 내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직접 구하려고 나선 건··· 이게 업체 측에 구해달라고 부탁하기에는 좀 많이 애매한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좀···'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정확히는 껄끄럽다고 해야할까.

물론, 저쪽은 다 돈받고 하는 일이니만큼 별 생각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 기분이 좀 껄끄럽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냥 아싸리 직접 구하러 나온 것이었다.

'그나저나···'

소설같은데서 보면 꼭 이럴 때 금발에다가 태닝을 곁들인 양아치같은 놈들이 눈치도 없이 껄떡대곤 하던데 말이다.

뭐, 동행인이 다름아닌 지나다보니까 딱히 걱정이 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심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더라.

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목적지 앞에 도착할 때까지 딱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ㅡ

"그럼, 여기 있어. 금방 사올테니까."

"응? 나도···"

"아냐, 남자가 이런 거 하는 거 아니랬어."

굳이 혼자서 다녀오겠다며 사라져버린 지나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uh excuse me?"

듣는 것만으로도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언어로 된 말과 함께 화려한 금발에 살짝 그을린 피부를 가진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이 내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그런 걱정을 받아야하는 쪽은 지나가 아니라 내쪽이었다는 걸.

유한이 자길 향해 다가오는 금발 태닝 양아치녀들을 보며 살짝이지만 당황이라는 걸 집어먹고 있던 그때, 지나는 콧노래마저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아침에 좀 거슬리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유한과 단둘이서 섬을 빠져나오지 않았나.

물론, 꼭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단둘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치 않는 법.

고로 이건ㅡ

'데이트지.'

그래, 그렇게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나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 다음에 뭘하면 좋을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일단 이것부터 사고···'

뭘 하는 게 좋을까.

아침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밥 먹으러 가는 건 좀 그럴 거고, 역시 어제 저녁에 미리 찾아놓은 곳들 위주로 좀 돌아다니다가ㅡ

그런 식으로 머릿속에서 데이트 계획이라는 걸 착착 세워가고 있던 와중에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사야하는게 지금 사고 있는 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간 김에 사다달라고 세나가 부탁했던 것들또한 유한의 휴대폰 속 메모에 같이 적혀있을테니까.

그게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유한이라면 어지간하면 그것도 사다주려고 할텐데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한정적인 데이트 시간이 거기서 더 줄어들어버릴테니까.

그래서야 되겠는가.

모처럼 이렇게 단둘이 나온 건데 말이다.

'하여간에 그년은 진짜···'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업체 측에다가 부탁할 것이지 왜 유한이한테 그런 부탁을 한단 말인가.

쓸데없이 말이다.

차라리 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면 이런 말도 하지 않았겠지만···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물건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는 없었다.

'아, 몰라.'

그렇게 필요하면 설령 이번에 사가지 않는다 한들 자기가 알아서 구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게 말하면 유한은 틀림없이 난색을 표할테니··· 일단 찾아보는 시늉 정도는 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찾으면 사는 거고, 못 찾으면 그걸로 끝인 거고.

그런 식으로 어떻게 하면 유한과 데이트를 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릴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푹 잠겨있던 지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아까 전부터 가게 주인으로부터 의아한 시선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주문한 것이 이상한 물건이라거나 그래서가 아니었다.

물건 자체는 평범했다.

다만··· 지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것들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보니 가게 주인 입장에서 보면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는 없었던 것.

지나가 주문한 건 그런 물건들이었다.

한 번 쓰면 버려야되는 소모품이라고는 하지만 많이 가지고 있어봐야 네 개 정도면 충분한 물건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들을 박스채로 달라고 해버렸으니 주인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

물론, 그와 별개로 돈의 힘만큼은 여전해서 카운터를 손으로 짚고 서 있던 지나의 앞에는 어느새 진열장 구석에서 꺼낸 것을 비닐봉투로 잘 포장한 것이 놓여져있었다.

박스가 무려 두 개나 되었지만 가격 자체는 그리 비싸지 않아서 어렵잖게 값을 치루고, 곧장 비닐봉투를 벌려서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내용물을 확인한 지나의 얼굴 위로 이내 쓴웃음이 맺혔다.

여기가 외국인지 한국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한국에서 파는 것하고 똑같이 생겨먹은 물건의 모양새도 모양새였지만··· 곧 이것들을 직접 써야한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긴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다른 이도 아니고 유한과 이런 관계로 거듭나게 되리라는 걸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후회가 된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살짝이지만 좀 아쉬웠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쓰잘데기 없이 망설이지 않고 바로 유한과 관계를 맺었을텐데.

그랬다면 유한의 첫 순간도 엄마한테 빼앗기지 않고 가질 수 있었을텐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쓰렸지만 심호흡을 해 마음을 다스렸다.

이제와서 후회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러니 여기서는 후회에 젖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하는 편이 차라리 효율적이겠지.

그래야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처음은 뺏겨버렸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 승리하는 사람이 최종 승자 아니겠는가.

그런 식으로 단단히 각오를 다지면서 약국을 빠져나온 지나를 맞이한 건 유한의 환한 미소가 아닌··· 생전 처음보는 년들에게 둘러쌓인채 쩔쩔매고 있는 유한의 모습이었다.

'허···?'

난감하다는 듯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고 있는 유한의 모습을 보니 봉투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하여간에 진짜···'

단 한 순간도 안심할 수가 없다니까.

지금도 봐라.

그래봐야 한 5분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벌써 날파리들이 저렇게 잔뜩 꼬이지 않았나.

물론, 날파리가 암만 매력적이어봐야 날파리일 뿐이니 유한이 거기에 넘어갈리 없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날파리 주제에 유한을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되질 않았다.

저 눈을 좀 봐라.

어떻게든 유한을 한 번이라도 제 밑에다가 깔아보겠다는 욕망이 그득그득하게 담겨있는 저 눈깔들을 말이다.

자신의 연인이 그런 눈으로 쳐다봐졌는데 참을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보면 볼수록 뱃속이 막 뒤틀리는 느낌이라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해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유한을 빙 둘러싸고 있는 년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기 무섭게 옆으로 밀려난 것들이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면서 꼬불꼬불 거리는 발음으로 항의를 해왔지만 싸그리 무시하고 유한의 신병부터 확인했다.

"···어? 누나?"

"가자."

그리고는 그대로 유한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니 날파리 년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년이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리면서 손을 확 뻗어왔다.

역시나 유한의 앞에서 사람 좋은 척을 하고 있었던 건 다 연기였던 걸까.

아무튼···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

유한에게 홀려서 맛탱이가 가버렸던 년들에 비하면 이런 근본도 없는 양아치년들따위 위협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 손 치우라고 슬쩍 쏘아봐주니 그래도 나름 한가닥 하는 년이었는지 손을 움찔거리기만 할뿐 손을 풀지는 않더라.

"···손 좀 놓지? 아니면··· 부하들 앞에서 개쪽당하고 싶은 건가?"

"하···!"

코웃음을 쳐대는 걸 보니 딱봐도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들을 타입인 것 같아서 바로 실력행사에 나섰다.

그렇다고 유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치고박고 할 수는 없어서 아쉬운대로 이쪽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그년의 손목을 다른 손을 이용해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살짝' 힘만 주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처음에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쳐대던 우두머리 년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울긋불긋해졌으니까.

"손, 풀라고."

그 잠깐 사이에 허옇게 질린 손등이 참으로 볼만했다.

"악···! 자, 잠깐···!"

"놔."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 외국이라는 사실이 새삼 아쉽게 느껴졌다.

한국이라고 해도 사람을 막 패고 그래도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외국에 있을 때보다는 뒷수습이 용이했을테니까.

아무튼 그렇게 우두머리 년의 손을 강제로 떨쳐내고 난 후에야 유한을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벗어났는데도··· 어째 가슴의 술렁거림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화가 났다.

"누나···? 혹시 화 났어···?"

방금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저런 소리나 하고 있는 유한의 태도에, 자각없음에 화가 났다.

그런데도···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어찌보면 가장 불안했을 사람이 유한이었을테니까.

아니,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런 상황이었으면···!'

날 부르든가 했었어야지.

왜 쓰잘데기 없이 쩔쩔매고 있단 말인가.

"누나···?"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한을 끌고 마침 눈에 띈 건물 틈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유한을 벽으로 몰아붙인 다음 거칠게 입을 맞췄다.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 속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 그대로 유한을 향해 쏟아질 것만 같았으니까.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것일까.

벽까지 몰아붙여진 유한이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그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유한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레 이쪽의 움직임을 받아주기 시작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지나가 유한을 품에 가두다시피 한채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있을 때, 유한은 그런 지나의 행동을 받아주며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참···'

이렇게 보면 또 귀엽다니까.

아까 나한테 막 치근거리던 금태양녀를 위협할 때는 정말 살벌했었는데 말이다.

그 누가 아까 지나하고 지금 날 끌어안고 있는 지나하고 동일인이라 생각할까.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인 걸까.

슬슬 등이 좀 아픈데 말이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살짝이지만 딱딱하게 경직되어있던 지나의 몸이 평소와 같은 탱탱함을 되찾았다.

한참동안 입을 맞추고 있다보니까 이제 좀 진정이 된 걸까.

"후우···"

한숨소리와 함께 날 벽까지 꾸욱하고 밀어붙이고 있던 지나의 몸이 스르륵 떨어져나갔다.

그러면서 피차 번들번들하게 변해버린 나와 지나의 입술 사이로 투명한 실이 길게 이어지다가 툭 끊어지는데 그 야릇하기 그지없는 광경을 눈에 담고 있다가 지나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이제 좀 진정이 됐어?"

그런 내 물음에 지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일단 막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건 가라앉긴 했는데 막상 진정이 되고 보니까 충동적으로 벌였던 일들 때문에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오기라도 한 것일까.

지나의 얼굴이 그늘 아래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새빨개졌다.

"누나? 아직도 화 안 풀렸어?"

"···몰라."

그 상태로 오늘따라 유독 도톰해보이는 입술을 막 오물거리던 것도 잠시 이어진 내 부름에 지나가 결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렇게 흘러나온게 대답치곤 굉장히 애매한 것이라는 것이었지만.

모르겠다니.

그래서 화가 풀렸다는 걸까 안 풀렸다는 걸까.

모호하기 그지없는 지나의 대답에 그저 쓴웃음만 짓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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