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식으로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세나를 흐뭇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여전히 어버버하고 있는 그녀를 상대로 슬쩍 운을 떼봤다.
"누나."
"···무, 뭐."
"혹시 말이야. 오랜만에 방송 켜볼 생각 없어?"
"방송···?"
역시나 슬슬 방송이 마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던 걸까.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할 때는 언제고 방송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이 번쩍 뜨이더니 이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는데ㅡ
'진짜 이야기 안 꺼냈으면 어쩔 뻔 했냐···'
반응이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노골적이라서 쓴웃음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더라.
그런 식으로 주인이 츄르를 꺼내드는 모습을 포착한 고양이같은 반응을 보여주던 것도 잠시, 세나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기야 방송을 할 수만 있다면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긴 하지만 덥썩 물자니 역시 내가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던 걸까.
자꾸만 내쪽을 힐끔힐끔거리는 것도 그렇고 위를 향해 솟구치려던 입꼬리를 시무룩한 모양새로 바꿔보이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잽싸게 말을 덧붙여주었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거면 신경 안 써도 돼."
역시나 이쪽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그 한 마디에 표정이 저렇게까지 풀리는 걸 보면 틀림없이 그랬던 거겠지.
"그, 그러면··· 한 번 해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기로 했다.
문제는 역시 하기로 정한 다음부터긴 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음··· 왕도는 짧게 근황만 전하고 끝내는 거긴 한데···"
"그건 좀 그렇지 않아?"
"역시 그렇겠지···?"
"어, 거의 두 달만에 키는 거잖아."
"히엑··· 벌써 그렇게 됐어?"
"늬예 그렇게 돼쓰요."
거의 두달 만에 방송 켜놓고 근황만 달랑 전하고 다시 방송을 꺼버린다?
"이러면 시청자 입장에서 못 참그든요."
"그러면? 혹시 뭐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어?"
"음··· 그 왜 우리 섬 들어올 때 챙겨온 캠핑 장비들 있잖아."
"캠핑 장비? 아··· 거실 구석에 박혀있는 그거?"
"어, 그거. 그거 잘만 써먹으면 꽤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지 않아?"
"흐으음···"
머릿속으로 그 풍경을 그려보고 있는 걸까.
턱을 살살 쓰다듬으며 그대로 고민에 잠기길래 내가 그렸던 것과 세나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최대한 비슷해지도록 구체적인 묘사를 덧붙였다.
"한 번 상상해봐. 위에는 별이 총총 박혀있고, 옆에서는 파도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철썩 철썩 들려오는 거지."
"음,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 약간 힐링 컨셉으로 가자는 거잖아? 잔잔하게?"
"그렇지."
"뭐···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섬의 풍경은 처음 본 사람이라면 감탄에 빠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니까.
낮의 풍경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밤의 풍경도 그랬다.
"근데 그러면 좀 심심하지 않으려나? 너무 배경 원툴이잖아."
다만 그 부분이 문제긴 했다.
짧게 치고 빠질 거라면 아무 상관없긴 하지만 그렇지가 않으니까.
"뭐, 괜찮은 아이디어 없어?"
"나한테 물어봐도··· 아, 그러고 보니까 장비는? 장비는 다 있고?"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 부분부터 물어봤어야 했는데 말이다.
"음··· 가져온 거 모으면 가능하긴 할거야. 좀 느린게 흠이긴 해도 와이파이도 나름 잘 터지는 편이니까."
다행히 지금 있는 걸로도 가능하긴 하단다.
은근 장비병 기질이 있는 세나다보니까 지금 있는 것만으로는 영 성에 차지 않아하는 눈치긴 했지만.
"일단 촬영은 가져온 캠코더로 하고···"
"뭐야, 캠코더도 가져왔었어?"
"어··· 펴, 편집자! 편집자들이 부탁해가지고···"
"저번에 나한테는 그 사람들한테도 휴가 줬다고 그랬었잖아."
"아니··· 그··· 계속 그런 식으로 때울 수는 없잖아."
하긴, 그것도 그렇긴 했다.
편집자를 새로 구할게 아니라면 쉬는 동안 챙겨주긴 해야될텐데 하는 일도 없이 월급만 받는 것도 편집자들 입장에서 보면 좀 그럴테니까.
아무튼 뭐, 그 부분이야 그렇다 치고···
"아무튼 촬영은 캠코더로 한다 치고 다른 건?"
"다른 거야 뭐··· 노트북도 있고 휴대폰도 있으니까··· 그거 쓰면···"
"잠깐만."
그러네.
노트북이 있었지.
문제는 내가 지금 떠올린 걸 세나가 오케이 하냐는 건데··· 내가 생각할 때 가능성은 반반이긴 했다.
그러니 일단은 숨기는 게 좋겠지.
"누나."
"···엉?"
"일단 텐트부터 피고 생각하자."
"텐트? 누가 필 건데?"
"그거야 당연히···"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짓고 있는 표정을 보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세나를 가리켜주었다.
"누나가 해야지."
"엑···"
"너무 그렇게 질색하지마. 나도 옆에서 좀 도와줄테니까."
"하··· 씨···"
그렇게 된 관계로 일단 텐트부터 깔기로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거실 구석에 쳐박혀있던 캠핑 장비들을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지나는 거뜬하게 들길래 별로 안 무거울 줄 알았는데 더럽게 무겁더라.
"아니···"
대체 뭔 놈의 테이블이 이렇게 많은 걸까.
두 개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테이블 수가 세 개가 되고 네 개가 되니까 한탄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다들 하나같이 원목으로 되어있어가지고 크기에 비해 진짜 쓰잘데기 없이 무거웠으니까.
뭐, 그렇다 보니까 결국 방에서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던 지나에게 SOS 신호를 칠 수밖에는 없었다.
"아흠··· 뭔데? 갑자기 캠핑 장비들은 왜?"
"어··· 그게···"
"오랜만에 방송 좀 해보려고."
머뭇대는 세나를 대신해 지나의 물음에 답을 하니 잠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던 지나의 눈이 대번 크게 뜨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홱 돌려서 세나를 노려보는데ㅡ
"힉···!"
꼭 네가 꼬신 거냐고 으름장이라도 놓는 것 같은 그 눈빛에 안 나설래야 안 나설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키자고 한 거야."
"흐음··· 왜?"
"세나 누나 방송 안 킨지도 꽤 됐잖아. 이대로 영영 접을 게 아니라면 슬슬 키기는 해야지."
그런 내 설명에 지나는 굉장히 마뜩찮아 했지만 일단은 수긍하긴 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동생 밥줄이 끊기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걸까.
"그래서 누나가 뭐 도와주면 되는데?"
"아, 짐 나르는 것만 좀 도와줘."
"그거면 돼?"
"응,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게."
지나는 더 도와주면 안 되겠냐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눈치긴 했지만 차마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찌보면 셋 중에 가장 피곤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지나였으니까.
"그래 뭐···"
덕분에 살짝 아쉬워하는 지나의 도움을 받아 '갬성'을 꾸며내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죄다 해변가 쪽으로 날랐다.
그렇게 하나하나 가져다 놓으니까 처음에는 몇 개 되어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느새 자그마한 산을 이루고 있더라.
개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역시 텐트였고.
'아니···'
저건 대체 몇 인용이길래 저렇게 큰 걸까.
"진짜 안 도와줘도 괜찮겠어? 초짜끼리하면 엄청 헤맬텐데···"
얌전히 접혀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충분히 큰 텐트의 모습에 걱정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던 걸까.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아냐. 누나 피곤하잖아. 얼른 들어가서 마저 쉬어."
지나가 눈썹으로 여덟 팔자를 그리며 은근히 걱정을 내비춰오길래 그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마저 쉬라는 의미로 등을 꾹꾹 떠밀어 별장 쪽으로 돌려보냈다.
여기에 군필만 두 명인데 설마 텐트 하나를 못 치겠는가.
물론, 두 명 중에 한 명이 세나라는 게 조금 신경쓰이긴 했지만··· 아마 괜찮을 거다.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죽이고 싶었다.
"아니, 누나 !! 좀 제대로 잡아봐!!"
"잡고 있거든···?! 잡고 있다고오···!"
정말 잡고 있는 게 맞다면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
"아니, 거기 말고 노란색! 노란색에다가 끼우라고! 유세나 씨는 노란색이 어떤 색인지 모르나?"
"아, 좀! 닥쳐봐악···!"
텐트를 고정시키기 위해 바닥에다가 박아두었던 폴대가 퉁하고 튕겨져나오는 둥 과정이 좀 많이 그렇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텐트 설치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설치를 시작한지 약 100여분만의 쾌거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텐트 설치가 끝났다고 해서 방송 준비가 끝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방송 준비는 이제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배경이 아무리 기깔난다고 한들 텐트만 달랑 놓여져 있어서야 '갬성'이 살리 없지 않겠는가.
고로 '갬성'을 충만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소품을 텐트 주위에 배치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텐트하고 같이 꺼내온 것들을 하나하나 조립해서 텐트 주위에다가 척척 깔고 있었는데ㅡ
"그··· 누나? 테이블을 꼭 다··· 놔야겠어?"
"하··· 진짜 감각 없네."
아니 짐 나를 때만 하더라도 나랑 같이 뭔 놈의 테이블이 이렇게 많냐고 성토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저런 소리라니.
"여기서 밥 먹을 것도 아니잖아."
"이게 바로 감성이라는 거야. 보면 모르시겠어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너스레를 떠는 꼴이 참··· 꿀밤을 마렵게 했다.
꽁 소리가 나도록 시원하게 한 방 먹여주면 고구마를 한 백 개쯤 연달아 집어먹은 것 같은 내 속도 뻥 뚫릴텐데···
"감성은 얼어죽을··· 코딱지만한게 스테이크도 안 올라가겠다."
"그또한 감성이지."
그렇다면 내가 세나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는 것도 어찌보면 '갬성'있는 거 아닐까.
아니, 감성 타령을 할거면 어떻게 좀··· 잘 좀 하고 그렇게 말을 하던가.
테이블 조립도 제대로 못하면서 시도때도 없이 감성타령을 해대니까 사람이 자꾸만 악질해지더라.
이래서 세나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 사이에 숨겨진 악질들이 많았던 걸까.
그새 또 캠핑용 의자를 부여잡고 낑낑대고 있는 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리 툴툴대고 있던 와중이었을 것이다.
휘잉하고 바람이 불어오길래 마침 땀도 많이 나고 더웠는데 잘 됐다 싶어서 기껍게 그것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으려니까 쪼그려앉아있는 세나의 뒷편에 놓여져있던 회색의 비닐이 바람에 흩날려 두둥실 떠올랐다.
"어···?"
그러더니만 그대로 바닷가를 향해 슝 날아가길래 황급히 세나를 불렀다.
"누나! 비닐!"
"비닐? 갑자기 뭔···"
내쪽을 돌아보며 뜬금없이 그건 또 뭔 소리냐는 투로 그리 묻던 것도 잠시, 세나의 시선이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스르륵 움직였다.
"미친!"
세나가 그리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건 다름아닌 그 직후였고.
그렇게 이미 바다에 풍덩 빠져서 저 멀리 떠내려가고 있는 장비 포장용 비닐을 회수하기 위해 세나가 새하얀 모래 위를 파바박 내달렸다.
그러다가ㅡ
"에큭?!"
중간에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했는지 그대로 넘어져버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