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모자라 입꼬리를 살짝 올려서 나름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기까지 하는데··· 가영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지나의 얼굴이 대신 굳어져버렸다.
"그나저나 세나 얘는 대체 언제 들어갔길래 아직까지···"
남들은 진작에 다 씻고 나와있는데 여전히 혼자 화장실을 지키고 있는 둘째 딸의 존재가 신경쓰였던 것일까.
가영이 물소리가 들려오는 화장실 쪽을 힐끔하고 쳐다보며 그리 말했다.
그런데 참 공교롭게도 가영이 그리 말하기 무섭게 물소리가 뚝하고 멎어버리더라.
"마침 다 씻었나 보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세나가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등장했다.
설마 자기가 씻는 동안 자기 빼고 다 모여 앉아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걸까.
테이블 옆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우릴 발견한 세나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말고 그대로 멈칫했다.
그런 세나의 시선이 가장 오랫동안 머문 건··· 다름아닌 가영 쪽이었다.
역시나 세나도 파격적이기 그지없는 가영의 복장 때문에 놀란 것일까.
아예 눈까지 동그랗게 뜬채로 가영을 바라보는데 덕분에 가영의 얼굴 위로 다시금 홍조가 맺혔다.
"어··· 나, 나만 빼고 다 모여있었네···?"
"그래, 그러니까 얼른 이리와 누나."
"아, 아니 난··· 그··· 머리좀 말리고···"
이럴 때 보면 세나는 참 쓸데없는 곳에서 눈치가 좋았다.
보자마자 자기가 끼어들어도 될만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발을 빼려고 하지 않나.
"내가 말려줄테니까 얼른."
물론, 도망치도록 내버려둘 생각같은 건 없었기에 화장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살짝 강압적인 목소리를 내며 유일하게 비어있는 빈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더니 세나가 순간적으로 몸을 크게 움찔했다.
화장실에서 들었던 것하고 똑같은 목소리를 들으니 거기서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잔뜩 괴롭혀졌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기라도 했던 것일까.
"으, 응···"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함께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인 세나가 이내 가영과 눈치를 살피며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진짜··· 물기는 제대로 말려야지. 사방에 물 다 떨어지고 이게 뭐야."
다른 이도 아니고 엄마와 언니 앞에서 동생인 나한테 이런 식으로 핀잔을 듣는 것이 좀 민망했던 것일까.
아니면 바로 옆에서 날아와 꽂히는 지나의 시선 때문이었을까.
내 수발을 받고 있던 세나가 대뜸 고개를 팍 수그렸다.
그렇게 세나를 옆에 붙잡아놓고 있다가 머리카락에서 더는 물이 떨어지지 않을 때쯤 놓아주었다.
그랬더니만 거의 뭐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쪼르르 가영의 옆자리로 도망쳐버리더라.
"흐으음···"
뭔가 좀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그런 세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도 잠시, 지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씩 웃으며 아까 미리 세팅해둔 와인을 집어들었다.
"아무튼 그럼 뭐··· 다 모인 것 같으니까 일단 한 잔 하고 시작할까?"
그 말 뒤로 이어진 건 뽕하고 경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코르크 마개 따는 솜씨가 일품인걸 보면 딱히 와인이라고 가린다거나 그런 건 또 아닌 모양.
그렇게 능숙한 솜씨를 선보여가며 와인을 딴 지나가 이내 가영 쪽으로 슬쩍 상체를 기울였다.
"일단은··· 그래도 순서가 있으니까 우리 유 여사님부터 먼저 한 잔 받으시고."
많고 많은 단어 중에서 '유 여사'라는 부분이 유난히 강조돼서 들렸던 건 나한테만 그렇게 들렸던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영의 반응을 보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나한테만 그렇게 들렸다면 저런 식으로 가영이 볼을 씰룩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못마땅해하는 심정을 얼굴 위로 은근히 내비치면서도 가영은 반격을 시도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나가 따라주는 와인을 받는데··· 그게 꼭 승자의 여유처럼 비춰졌다.
"자, 그리고 세나 너도 한 잔 받고."
"으, 응?"
"와인 말이야. 안 마실거야?"
"아, 응!"
여유롭기 그지없는 가영에 비해 세나는 어딘가 좀 불안해보였다.
역시나 지나가 신경쓰이는 걸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와인잔을 움켜쥔 손이 살짝 떨리더라.
"뭐해, 제대로 안 잡고? 그러다가 흘린다?"
그 모습이 꼭 호랑이 앞에 놓여진 토끼를 보는 것 같아서··· 뭔가 좀 웃기면서도 짠했다.
아무튼 그렇게 세나의 잔까지 채워준 지나가 이내 내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리고··· 이제 우리 유한이도 한 잔 줘야지."
그 말에 비어있던 잔을 집어들어 지나를 향해 내미니 날 향해 싱긋 웃어보인 지나가 이내 내 잔에다가 와인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양이··· 앞 차례였던 세나하고 비교하면 확연히 많았다.
세나한테는 거의 뭐 간에 기별이나 갈까 싶을 정도로 찔끔 따라주더니만 나한테는 왜 이리 콸콸 부어주는 걸까.
"유한이 너 맛보게 해주려고 특별히 비싼 걸로 사온 거니까 많이 마셔?"
그렇게 내 잔마저도 채워준 지나가 이내 병 주둥이 대신 몸통 부분을 내쪽을 향해 내밀었다.
누가봐도 자기도 좀 따라달라고 하는 모습이라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쪽으로 내밀어진 걸 받아들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 지나한테는 엄마가 따라줄게."
대체 언제 움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옆쪽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더니 이내 가영의 손이 병을 낚아채갔다.
"일하기도 바빴을텐데 이런 것도 준비하고··· 우리 장녀가 늘 고생이 많아."
그러더니 지나가 잔을 집어들기도 전에 그 안에다가 와인을 쪼르륵 따라버리더라.
그때 지나의 표정이 어땠는가하면··· 웃고 있었다.
'이것봐라?'
라는 느낌으로 입꼬리를 말아올린채 씩 웃고 있었다.
그리고 당하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일까.
짠 소리가 나도록 잔을 부딪힌 다음에 잔 안에서 찰랑찰랑대는 검붉은 액체를 꼴깍꼴깍 들이키고 있으니 나보다 먼저 잔을 내려둔 지나가 살짝 인상을 쓰며 내쪽을 쳐다보았다.
"유한아, 누나 멜론 하나만 줄래? 좀 떫네."
"응? 떫다고?"
"어, 아무래도 입 안에 양치 기운이 남아있어가지고 그런가 봐."
뭐, 그러시단다.
그러더니만 아예 먹여달라고 스르륵 눈을 감고 입술을 살짝 벌리길래 요청받은대로 그 안에다가 멜론 한 조각을 쏙 집어넣어주니 지나가 입술을 오므려 포크를 야릇하게 훑어댔다.
"으음···! 달다···"
지나의 반격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멜론 맛을 음미하듯 몸을 가볍게 떨어대던 그녀가 이내 내쪽으로 몸을 스르륵 기울여 그대로 내게 몸을 기대왔으니까.
"어때? 와인? 괜찮지?"
그 상태로 고개만 살짝 들어올려 날 향해 그렇게 묻는데··· 멜론 과즙 때문인지는 몰라도 평소보다 더 요염한 빛을 띄고 있는 입술의 모습이 유난히도 눈에 밟혔다.
방금 와인을 들이켰기 때문일까.
지나가 뭔가 말을 할 때마다 달달한 포도향이 코 밑을 맴돌았다.
살짝 알콜향이 뒤섞여있는 그 냄새 때문일까.
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렸다.
"으, 응··· 그러네···"
"그러면··· 한 잔 더 마실래···?"
향기로 날 취하게 만들 생각인 걸까.
언제 움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허벅지 쪽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슬쩍 시선을 밑으로 내려보니 어느새 지나의 손이 그 위를 노닐고 있었다.
"오늘은 좀··· 취해도 상관없잖아···?"
은근한 목소리로 된 유혹과 함께 무릎 바로 윗부분을 살살 쓰다듬고 있던 지나의 손이 목소리에 딱 맞는 움직임을 선보여가며 서서히 물건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그렇긴 한데···"
그런 식으로 시작부터 거침없이 나오는 지나의 유혹에 넘어갈랑 말랑 하고 있을 때였다.
"앗···!"
갑자기 가영 쪽에서 당황으로 가득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소리(?)에 곧장 그것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빨간 액체가 오늘따라 더 윤기가 도는 것 같은 피부를 타고 또르륵 흘러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찌보면 단순하게 와인 마시다가 한 방울 실수로 흘린 것에 불과한데 새하얀 피부와 새빨간 액체의 조합이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그나저나···'
애초에 정말 실수로 흘린 게 맞는 걸까.
'아닌 것 같은데···'
가영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으니까.
하필이면 내가 지나의 유혹에 넘어갈랑 말랑한 타이밍에 와인을 흘려버리다니.
실수치고는 타이밍이 너무 적절하지 않은가.
뿐만아니라 뒤에 보여준 대응들 같은 것도 그랬다.
당황한 척 손으로 가슴을 짚으면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골을 슬며시 벌려보이는데 그게 꼭 거기로 흘러들어가길 유도하는 듯 했으니까.
뭐, 확실한 건 의도했든 아니든 기가 막힐 정도로 유혹적이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시시각각 지나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던 정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섰고, 그걸 지나도 눈치챘던 모양이다.
살짝 흐릿하게 물든 채 날 향해 은근한 눈빛을 보내오던 지나의 눈동자가 일순간 또렷해지더니 이내 그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으휴··· 정말··· 조심 좀 하시지···"
그 말과 함께 내밀어진 건 다름아닌 두어장 정도 되는 티슈였다.
얼른 이걸로 닦으라는 것처럼 지나가 티슈를 쥔 손을 살짝 흔들어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지나에게 선수를 빼앗길 것만 같아서 급한 마음에 일단 저지르기는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니까 좀 민망했던 것일까.
이제 고작 한 잔 정도 마셨을 뿐인데 어느새 가영의 얼굴은 만취라도 한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런 식으로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하려고 했던 행동만큼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지나가 내민 티슈를 건네받은 가영이 내쪽을 향해 힐끔하고 시선을 한 번 던지더니 이내 가슴골 사이까지 흘러들어간 와인 한 방울을 추적하기 위해 그것을 손으로 살짝 벌려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티슈를 쥔 손을 조심스레 그 사이로 밀어넣어 그곳에 남은 흔적을 천천히 닦아내는데ㅡ
'허···'
그럴 때마다 볼륨감 넘치는 가슴이 같이 흔들리는게 참 장관이더라.
"···다 닦았어?"
"응? 아, 응···"
"그러면··· 자, 엄마. 이거 입어."
지나가 몸에 걸치고 있던 얇은 가운을 벗어서 가영을 향해 내민 건 내가 가영의 자태를 감상하는데 푹 빠져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한 잔도 아니고 와인잔의 3분의 1정도 밖에 안 되는 양을 마셨을 뿐인데 누가보면 와인 한 병을 통째로 원샷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헤롱헤롱하고 있는 세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뜩이나 강력한 상대인 가영을 지금처럼 완전무장 상태로 내버려둬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곱게 접힌 채로 내밀어진 실크가운의 모습에 가영이 당황으로 몸을 흠칫하고 떨었다.
"···응?"
"아니 혹시 추우실까봐."
"괘, 괜찮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뭣보다 그렇게 얇게··· 입고 있다가 괜히 감기라도 걸리면은···"
지나는 굳이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효과적이었고.
그래서일까.
가영은 '이게 아닌데···'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일단은 지나가 내민 가운을 챙겼다.
그리고는 내쪽을 한 번, 지나 쪽을 한 번 흘깃하고 쳐다보더니··· 이내 그것을 조심스레 몸 위에 걸쳤다.
지나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가 떠오른 건 다름아닌 그때였다.
"어때? 꽤 따뜻하지?"
"그, 그러네···"
나름대로 큰 맘을 먹은 상태긴 했지만 나랑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딸들도 다 있는 자리에서 계속 그런 복장으로 있는 건 확실히 좀 부담스럽긴 했던 걸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건지 가영이 안도감과 떨떠름함이 딱 반씩 섞인 표정을 한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역시 우리 엄마라니까? 잘 어울리는 것좀 봐. 신기하지 않냐 유한아?"
확실히 지나의 말대로긴 했다.
가운 색이 기존에 걸치고 있었던 슬립하고 비슷한 계열이라서 꼭 서로 한 세트라도 되는 것처럼 잘 어울렸으니까.
물론, 잘 어울리는 것과는 별개로 많이 아쉽기는 했다.
가운을 걸침으로써 파격적이기 그지없었던 노출도가 확 줄어들어버렸으니까.
그런 식으로 나름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던 와중이었을 것이다.
와인을 마시니 목이 마르기라도 했는지 와인 대신 물을 잔에 따라놓고 그것을 홀짝홀짝거리고 있던 세나가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좌우로 까딱까딱거리면서 자리에서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는 걸까.
"어디가 누나?"
궁금한 마음에 그리 물었더니만 세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무어라고 웅얼거렸다.
"응? 뭐라고?"
"씨··· 졸려··· 잘 거야···"
도착하자마자 바로 섬에 들어온다고 쉬지도 못했는데 거기에 술까지 들어가버리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일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작게 웅얼대듯 내뱉어진 목소리 안에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피로감이 담겨있었다.
'하긴···'
피곤할만도 하지.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새벽부터 움직였다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아까 낮에 좀 자지 않았나?
그에 비해 단 한숨도 자지 않은 지나는 지극히 멀쩡해보였지만··· 세나하고 지나를 비교해선 안 되겠지.
방송 중이 아닐 때면 오래 쓴 스마트폰마냥 빨리 방전되어버리는 누구랑은 다르게 지나는 늘 갓 뽑은 것 같은 짱짱한 체력을 자랑하는 편이니까.
아무튼 뭐 본인이 피곤해 죽겠다고 하니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