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0화 〉1부 (270/315)

그럼 그렇지.

그냥 열어줬을리가 없지.

또··· 그런 무지막지한 걸 당해버리는 걸까.

그래 그럴 게 틀림없었다.

유한에게 당하던 때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모래라도 한웅큼 씹어삼킨 것마냥 목 안쪽이 버석거리는 느낌과 함께 초조함과 뭔지 모를 감정이 뒤섞인 것이 배 안쪽에서부터 막 끓어올랐다.

동시에 몸 안과 밖의 온도 차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이 제멋대로 막 흠칫흠칫거렸다.

화장실 벽을 타고서 찰팍찰팍하는 느낌으로 울려퍼지던 유한의 발자국 소리가 뚝하고 멎은 건 그렇게 몸을 부르르 떨어대고 있던 와중이었다.

어느새 화장실 안으로 내려앉은 침묵이 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차마··· 유한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때와 같은 눈빛으로 쳐다봐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저항같은 건 꿈조차 꾸지 못하게 될테니까.

그래서 안 그래도 꼬옥 감고 있던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암만 기다려봐도 예상했던 감촉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건 달그락하고 뭔가를 집어드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하고는 많이 다른 그 소리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대는 걸 느끼면서 슬그머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렇게 눈을 뜬 순간 시야 속으로 파고 들어온 것은ㅡ

"응? 급하다고 하지 않았어? 누나?"

세면대 앞에 서서 칫솔을 입을 향해 가져가고 있는 유한의 모습이었다.

하필이면 유한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거울을 통해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뭐라 이루말할 수 없는 민망함이 얼굴 위로 확 끓어넘쳤다.

얼굴이··· 타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그래서일까.

거울 위로 비춰지고 있는 자신의 얼굴은 무슨 열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유한이 놓칠 리 없었다.

"뭐야··· 오줌 마렵다는 건 혹시 핑계였어?"

아니나 다를까 유한이 입을 향해 칫솔을 가져가다 말고 이쪽을 향해 음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게 말문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절대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꼭 그런 목적을 가지고 이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되어버렸으니까.

"···아, 아니거든?!"

"그래? 아니면 말고."

믿어준 걸까.

의외로 순순히 넘어가려는 것 같은 유한의 반응에 그런 생각부터 들었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그런 거라면 아까와 같은 표정을 계속 얼굴 위로 띄워놓고 있을 리 없으니까.

일단 이쪽의 말을 믿어주는 척 하고 있는 걸까.

이 와중에 더 환장하겠는건 이제 정말··· 참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화장실 문을 두들길 때부터 이미 충분히 한계였으니까.

그렇기에 결국에는··· 입고 있던 잠옷 바지와 팬티를 밑으로 내리고 변기 위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팬티까지 벗었으니 이제는 정말로 볼 일을 보기만 하면 되는 상황.

그 전에 우선 유한의 동태부터 살폈다.

헌데···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유한은 이쪽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하등 관심이 없어보였다.

머릿속에 곧 있을 잠자리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한 건지 웅웅 소리를 내는 칫솔을 입에 문채 뭔가를 생각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다행이라고 느껴져야할 그 광경이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씨···'

왜 그런 감정이 느껴졌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랬다.

잡은 물고기에는 먹이를 안 준다고 하더니만 이게 그런 걸까.

기분이 이상해서 그런 걸까.

순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럴 리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 될 수밖에는 없었다.

정말로 그런 거였다면?

언니나 엄마하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겠지.

혹시··· 언니나 엄마하고 경쟁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분위기가 되는 걸 은근히 피했던 게 티가 나기라도 했던 걸까.

그것 때문에 저러는 걸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동안 이미 충분히 한계에 직면해있었던 몸은 착실하게 쌓인 걸 비워내고 있었다.

'으읏···'

가득 차서 넘실넘실대던 것이 쪼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순간 몸은 더없이 솔직하게 반응했다.

소변을 볼 때 흔히 느끼곤 하는 배설감과는 사뭇 다른 감각이 몸을 부르르 떨리게 만들었다.

그 앞에서 할 수 있었던 건 혹시라도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순간 새어나올 뻔한 그것을 다시 속으로 삼키는 게 전부였다.

그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는, 이런 몸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고작 그것 좀 피했다고···

속으로 그리 되뇌이면서 애꿏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어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볼을 살짝 부풀리고 있던 유한이 입 안에 있던 것을 세면대에 대고 뱉어내더니ㅡ

"아, 맞다. 누나."

갑자기 이쪽을 부르는 게 아닌가.

"···으, 응?"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부름이었고, 하필이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던지라 그만 이상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정도로 꼴사납고 한심한 목소리였다.

맘 같아서는 그런 걸 입밖으로 내버린 입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두들겨서 혼내주고 싶을 정도였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 정도라면 그게 유한에게 어떤 식으로 들렸을지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했으니까.

"누나는 안 씻어?"

"아, 아까 씻었거든?"

"아까? 아까 언제?"

"···밥 먹기 전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유한이 하필이면 그런 방식으로 깨워버리는 바람에 몸에서 수영장 특유의 냄새가 풀풀 풍겼고, 그걸 지우기 위해 간단하게 씻긴 했으니까.

"흐음, 그래?"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걸까.

그런 생각과 함께 아까 느꼈던 감정에서부터 비롯된 이쪽이 씻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울컥하고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그걸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상관이 있고 없고를 따진다면 있는 쪽일 수밖에 없을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곧··· 한 침대를 쓸 예정이지 않나.

침대가 어마어마하게 넓다고는 하나 그래도 같이 자는 사람이 땀냄새같은 걸 풀풀 풍겨대고 그러면 당연히 신경이 쓰이겠지.

어디까지나 그런 이유 때문에 저리 묻는 걸거다.

다른 이유는··· 없을 거다.

···아마도.

"그래서 안 씻는다고?"

"너무 자주 씻는 것도 피부에 안 좋거든?"

"나참···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쓰셨다고···"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입을 헹구다말고 피식 웃어대는 유한을 보니 슬슬 가라앉기 시작했던 짜증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울컥하고 올라왔다.

그래, 저런 게 제일··· 그랬다.

다 알고 있으면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게 참 사람을 미치게 만드니까.

시청자들은 자신을 보고 얄미워 죽겠다느니 꿀밤이 마렵다느니 하지만 그거야말로 몰라서 할 수 있는 소리였다.

얄미운 정도로 따지면 유한이 자신보다 더 했으니까.

지금도 봐라.

"그래도 양치질 정도는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왜?"

"글쎄? 왜일까?"

모르는 척 피식 웃어놓고서는 또 저런 소리나 하고 있지 않나.

의뭉을 떠는 모습이 말 그대로 얄밉기 그지없었다.

어찌보면 맞는 말이라서 더 그랬다.

샤워야 밥 먹기 전에 했다고 쳐도 밥 먹은 다음에 아직 양치질은 하지 않았으니까.

이후에 있을 일을 생각하면 미리미리 해두는 게 좋겠지.

그때가서 민망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걸··· 유한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기분이 여러모로 복잡하긴 했지만.

"···그럼 줘보든가."

"뭘?"

"뭐겠냐."

방금 자기가 말해놓고서는 또 모르는 척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어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참고 또 참았던 탓에 계속해서 쪼르르륵 쏟아지는 것 쪽으로 쏠리려는 신경을 분산시켜줄만한 것이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그래서 건네달라고 했던 것인데 그 와중에 또 유한은 이쪽의 인내심을 테스트해댔다.

"자."

치약은 어디다가 팔아먹은 건지 새 칫솔만 달랑 꺼내서 내미는 꼴이 실로 그랬다.

"···뭐하는데."

"응? 칫솔 달라면서?"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해대는 저 꼴을 좀 봐라.

빙글빙글 웃는 낯짝이 그야말로 꿀밤을 마렵게 했다.

"넌 치약도 없이 양치질 하냐?"

"아, 뭐야. 그 말이었어? 그러면 치약까지 묻혀달라고 말을 했어야지."

"하···"

"치약 짜줄테니까 칫솔 이쪽으로 내밀어봐."

"됐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치약이나 내놔."

그리 말했건만 어느새 치약을 인질로 삼아버린 손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질 않았다.

"얼른."

꼭 자기가 짜줘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던 걸까.

웃고 있는 것치고는 목소리는 또 제법 단호한 걸 보니 계속 말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슬쩍 한숨을 내쉬면서 칫솔을 쥔 손을 유한을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빵긋 웃은 유한이 내민 것에 대고 치약을 쭉 짜냈고, 그렇게 완전체가 되어버린 것을 입 안에다가 밀어넣고 양치질을 시작했다.

유한에게 등 떠밀려 시작하게 된 것이었지만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입에 문 칫솔은 유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거리가 되어줄테니까.

그렇게 칫솔을 입에 문채 쓸데없이 길게 이어지던 볼일을 마저 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입 헹구는데 쓰던 컵을 다시 세면대 위에다가 내려놓길래 드디어 나가는 건가 했더니만··· 유한이 거울 앞에서 미적거리기 시작했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 그 행동이 어이가 없어서 그쪽을 향해 어처구니 없어하는 시선을 내던지니 대답이라고 돌아온 것이 또 가관이었다.

"응? 왜?"

"···안 나가냐?"

"아, 알아서 나갈거야. 신경쓰지말고 할거 하셔."

그렇게 말할거면 팬티라도 입고 말을 하던가.

홀딱 벗고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몸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는 척 하면서 커다란 것을 자꾸만 눈앞에서 흔들어대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을까.

그래도 일단 급했던 건 전부 처리한만큼 이제 더 꿀릴 것도 없었기에 그대로 변기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젖어버린 곳을 깨끗하게 닦기 위해 휴지를 뜯어 곧장 그쪽으로 가져가려고 했는데ㅡ

"흐으음··· 휴지로 되겠어 누나?"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유한의 손이 이쪽을 향해 스윽하고 뻗어오더니 그대로 그것에게 휴지를 쥔 손을 잡혀버리고 말았다.

"무, 뭐?"

저도 모르게 입에 물고 있던 칫솔까지 떨어뜨릴 정도로 눈을 크게 뜬채 당황에 빠져있는 세나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몸과 얼굴의 반응이 서로 달랐으니까.

당황이라는 감정이 진득하게 눌어붙어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세나의 두 다리는 내게 손이 잡힌 시점에서 뭔가를 기대하기라도 하듯 귀엽게 움찔움찔대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휴지가지고 되겠냐고."

"그, 그럼 뭐··· 어쩌라고···"

휴지 말고 또 뭐가 있냐고 내게 따지려던 것일까.

그런 것치고는 항변하기 위해 내뱉은 목소리에 힘이 별로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한테 손이 잡히니까 한창 내게 길들여지던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호흡이 흐트러질 이유가 없으니까.

뭐,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말이다.

"깨끗하게 닦아야할 거 아냐. 누나."

그런 세나를 상대로 성큼 다가가면서 귀에 대고 최대한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속삭이니 순식간에 벽까지 몰리게 된 세나가 자연스레 벽에 기대놓고 있던 몸을 파르르 떨어댔다.

"응? 안 그래 누나?"

동의를 구하듯 던져진 내 말에 세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