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9화 〉1부 (259/315)

그에 바짝 붙이고 있던 몸을 조심스레 떨어뜨리니까 가영이 살짝이지만 몽롱해보이는 얼굴을 한채 '흐우···'하고 귀엽게 숨을 탁 내뱉었다.

전부 다 모래로 되어있어서 그냥 걸어도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 위를 마치 평지처럼 내달리던 지나가 우리 앞에 도달한 건 그 직후였다.

솔직히 말하면 키스하다가 딱 걸린만큼 가영이 부끄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ㅡ

"ㅡ지나 왔니?"

정작 가영이 보여준 것은 예상했던 것과는 백만 광년쯤 동떨어져있는 것이었다.

얼굴이 발그레하니 달아올라있는 게 살짝 흠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과 상대방을 놀리는 것 같은 말투.

그것이 가영이 호다닥 달려온 지나를 맞이하는데 쓴 것이었다.

같이 입을 맞추고 있었던 나조차도 가영이 저런 식으로 태연하게 대응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지나라고 알았겠는가.

덕분에 지나는 우리가 있는 곳까지 뛰어온 기세가 무색하게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엄마나 유한이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니?"

"그···! 유, 유한이 너··· 누나 좀 도와."

당황을 잔뜩 집어먹은 상태에서 지금의 가영을 상대해봐야 이도저도 되지 않으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기라도 했던 걸까.

지나가 나름 자연스럽게 날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면서 전략적 후퇴를 선택했다.

"유한이는 왜?"

"아니, 그게··· 그러니까··· 해변가에다가 이것저것좀 세팅해두려고."

"그러니? 엄마는 안 도와줘도 돼?"

"···네, 피곤하실테니까 쉬고 계셔요."

"그래."

결국 날 확보한 건 지나이니만큼 어찌보면 가영이 졌다고도 볼 수 있는데 적어도 표정만 보면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슬쩍 깨물고 있는 누구랑은 다르게 가영은 모처럼의 휴가를 만끽하고 있는 듯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표정에서 여유가 넘친다고 해야할까.

"···가자. 유한아."

그렇다보니까 한 발 늦게 등장한 세나 쪽으로 향하려고 할때도 지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응? 아, 응."

그런 지나를 따라서 움직이기 전에 손에 들고 있던 선크림을 다시 가영에게 건넸다.

덕분에 가영한테서는 챙겨줘서 고맙다는 의미가 담여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나한테서는 제법 따끔한 눈총을 받게 되었지만··· 그래도 챙겨야할 건 챙겨야하지 않겠는가.

"흐, 헥···! 나 죽는다아아···!"

그렇게 얼굴 옆쪽이 살짝 따끔거리는 걸 느끼면서 그늘 아래에 철푸덕 널브러져있는 세나 쪽으로 향하니까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해대던 세나가 그대로 눈동자만 들어올려 나와 지나를 쳐다보았다.

"다 가져왔어?"

"으, 응···"

"고생했네. 그럼 거기서 좀 쉬고 있어."

평소의 세나였다면?

그런 지나의 배려를 결코 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달랐다.

오랜 세월 지나의 밑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쌓아온 짬을 통해 지나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상태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챈걸까.

"아, 아냐! 다같이 해야 빨리 끝나지!"

세나가 언제 대자로 널브러져있고 그랬냐는 듯 허리 반동까지 이용해가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나의 심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뺀질대는 모습을 보여봐야 좋을 게 없을 거라 판단한 모양.

아무튼 그렇게 세나까지 자발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면서··· 백사장을 더욱 완벽한 휴양지로 바꿔놓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어쩐지 세나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앓는 소리를 해대더니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별장 옆에 따로 지어져있던 창고를 싹다 털어오기라도 했는지 짐 뒤에 또 수많은 짐들이 숨겨져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목도한 순간 내 딴에는 굳이 저걸 다 쓸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일단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이또한 '로망'이니까. 

"그래서 이제 뭐하면 되는데?"

"음··· 우선 유한이 너는···"

나름대로 진지해보이는 얼굴로 고민에 잠겨있던 것도 잠시, 지나가 짐들 사이에서 해먹 세트를 끄집어내 내쪽으로 슥 떠밀었다.

"저기 저 나무 두 개 보이지? 거기다가 이거 걸고 있어."

"그것만 하면 돼?"

"응, 나머지는 누나들이 알아서 할테니까."

"엑···"

졸지에 해먹을 제외한 나머지 담당으로 전락해버린 세나가 요상한 소리와 함께 질색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지나가 그쪽을 흘깃하고 쳐다보기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싹 고치며 싹싹해보이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으니까.

수영복 차림인 탓에 달려있지도 않은 소매를 걷어붙이는 시늉을 해보인 건 덤이었다.

"그래서 뭐부터 하면 된다고?"

이번만큼은 지나도 솔직히 좀 웃겼던 걸까.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한 번 낸 지나가 이내 짐 사이에 파묻혀있는 것 중에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일단 저거나 좀 가져와봐."

뭐, 그리된 관계로 일단은 해먹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는 않더라.

영화나 만화같은데서 보면 주인공들이 뚝딱뚝딱 해가지고 순식간에 완성시키길래 솔직히 나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일단 해먹을 걸 높이를 정하는 것부터가 꽤 난관이었다.

높게 하자니 올라갈 때 불편한 건 물론 자칫 잘못하다가 해먹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낮은 위치에다가 걸자니 뭔가 맛이 없었으니까.

'바닥에 닿으면 그냥 편하게 바닥에 눕지 뭐하러 해먹에 눕냐고.'

그렇게 된 관계로 머릿속에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토론을 펼친 끝에 허벅지 중간 정도 되는 위치에다가 걸기로 했다.

이 정도 높이면 해먹이 축 처지는 걸 감안해도 바닥에는 안 닿지 않을까.

'···안 닿겠지?'

아무튼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 해먹이 떨어지거나 나무 표면을 따라 주르륵 미끄러지는 걸 막아줄 수 있을만한 녀석들을 야자수에다가 때려박으려고 했는데ㅡ

"뭐야, 아직 시작도 안 했네?"

등뒤에서 지금쯤 지나한테 잡혀서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고 있어야할 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심히 부려먹힌 끝에 잠깐 쉬는 시간이라도 받은 걸까.

"으휴, 진짜··· 빠져가지고는···"

"응? 지나 누나 도와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언니가 너 도와주라고 이쪽으로 보내더라."

그런 것 치고는 은근히 내 시선을 피하는 꼴이 꼭··· 그래 일을 못해서 쫓겨나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쫓겨난 건 아니고?"

"뭐, 뭔 소리야?!"

"쫓겨났구만."

"아, 아니거든···?"

"어이, 유씨! 헛소리 그만하고 그 여기와서 이거나 좀 잡아봐."

"유, 유씨? 미쳤냐?"

"어허, 자꾸 그러면은 오늘 일당 못 줘."

세나가 귀여운 점은 꿍얼꿍얼대면서도 할 건 다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봐라.

쫓겨난 거 아니라고 소심하게 항변하면서도 손은 이미 아까 내가 잡으라고 했던 곳을 잡고 있지 않나.

"제대로 잘 잡았어?"

"···어, 그러니까 빨리 박아. 팔 아프니까."

"거 몇 분이나 잡았다고···"

"됐고, 빨리 박기나 하라고."

빨리 박기나 하라니.

저 말을 듣고 엄한 생각부터 드는 건 나한테 마구니가 쓰여서 그런 걸까.

"진짜? 진짜로 박아도 돼?"

"뜬금없이 뭔 헛소리야. 빨리 박아야 반대쪽도 박지."

"그러면··· 박는다?"

그 와중에 또 망치는 겁이 나는지 엉덩이를 뒤로 쭉 뺀채 팔만 야자수 쪽으로 쭉 뻗고 있는 세나의 자세는 누가봐도 후배를 위하는 자세였다.

그래서 세나의 뒷쪽에 자리를 잡고 수영복 하의 위로 고스란히 드러나있는 새하얗고 잘록한 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덤으로 은밀한 목소리까지 얹어주었더니만 그제서야 내 말속에 담겨있는 진짜 뜻을 알아차린 세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야, 야··· 자, 잠깐만··· 하, 하지마아···"

"누나가 빨리 박으라며."

"그, 그건 못··· 못 말하는 거잖아 멍청아!"

그 와중에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건 역시··· 지나와 가영을 의식해서겠지.

특히나 지나를 크게 의식하고 있는 듯 했다.

그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일 솜씨가 똥이라서 이쪽이나 도우라고 보내놨는데 나하고 이런 짓을 하다가 걸린다?

그 순간 바로 지나의 철권통치가 시작될 것이다.

지나의 무서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세나로서는 그것만큼은 바라지 않을 터.

"빠, 빨리 손 떼···"

"왜?"

"나중에 하게 해줄테니까 일단 손 떼라고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저항히 퍽 극심해서 일단은 세나가 요구하는대로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물론, 손을 떼어내기 전에 세나의 배를 살살 더듬고 있던 손을 등뒤로 돌려서 수영복으로 감싸인 엉덩이를 한 번 꽈악하고 움켜쥐어주는 걸 잊지 않았다.

세나가 스릴을 즐기는 타입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던만큼 내 마지막 일격은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읏···♡"

지나 몰래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오싹오싹했던 것일까.

그저 엉덩이만 살짝 움켜쥐었다가 풀었을 뿐인데 세나가 퍽 격렬하게 몸을 떨어댔다.

아까하고 비교하면 살짝 거칠어진 숨소리는 덤이었다.

"···빠, 빨리 해."

방금 그걸로 살짝이지만 흥분했다는 사실을 내게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잠깐 숨을 참는 식으로 들뜬 호흡을 숨긴 세나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날 재촉했다.

"알겠어. 손 조심해."

"네가 잘 하면 조심할 일도 없거든?"

확실히 그 말대로였기에 혹시라도 망치가 빗나가서 못 대신 세나의 손가락을 때리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겨냥한 뒤 탕탕 소리가 나도록 못을 박았다.

일단 한쪽을 박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반대쪽에 위치한 나무에도 대충 비슷한 높이에다가 못을 박으면 됐으니까.

그리고 나무 줄기를 따라서 남는 끈을 칭칭 동여매주니까ㅡ

"올···"

꽤 그럴 듯한 그물 침대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걸 앞에 두고 입을 동그랗게 모은 채 감탄하던 세나는 거기에 눕고 싶다는 욕망을 참지 못했다.

"퍼블은 내꺼지롱!"

언제 당혹스러워하고 그랬냐는 듯 꽤나 얄미운 목소리로 그리 외친 세나가 그대로 그물 침대를 차지하고 누웠다.

그러더니 집순이 주제에 또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다리를 척 꼬기까지 하는데 그림이 꽤 그럴 듯해서 더 킹받더라.

"어때? 누나? 편해?"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용감이나 들어볼 생각으로 그물 침대 위에 드러누운 세나를 향해 그리 물으니까 몸을 편안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세나가 말없이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수영장 쓰면 되지 뭐하러 바다까지 나가냐면서 찡찡대더니만 그물 침대가 마음에 쏙 드셨나 보다.

"근데 영화에서 본 것처럼 막 흔들리지는 않네? 누나가 무거워서 그런가?"

"뭐래, 뒤진다 진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날 향해 으르렁대던 세나가 이내 방해하지 말고 저리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어댔다.

그래서 잠시 세나 곁을 떠나 지나가 있을만한 쪽으로 향하니 마침 파라솔은 물론, 선배드 조립까지 끝마친 지나가 후우하고 한숨 돌리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 했어 누나?"

"응, 한 번 누워볼래?"

"아냐."

한 번 누워보라는 듯 선배드를 탕탕 두들겨대는 지나를 향해 고개를 저어보이니까 피식하고 웃은 지나가 이내 세나의 행방에 대해 물어왔다.

"그런데 세나는?"

"그물 침대 차지하고 누워서 쉬는 중."

"이 년이 진짜···"

"냅둬. 피곤하다던데. 그나저나 고모는?"

해변가에도 없고 이곳에도 없어서 그리 물었더니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한 번 꿈틀대던 지나가 이내 표정을 풀며 내 물음에 답했다.

"엄마? 마실 거 가지러 가셨을걸?"

"그래?"

선배드 끄트머리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은 채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것도 잠시 지나가 스르륵 몸을 움직여 선배드 위에 몸을 뉘였다.

왠지 야릇해보이는 표정은 덤이었다.

"그나저나··· 유한아."

"엉?"

"아까 누나가 도와달라고 했던 거 기억해?"

"어··· 오일 발라달라고 했던 거?"

"응."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 지나가 이내 반대로 돌아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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