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8화 〉1부 (258/315)

"와··· 언니 진짜 작정했구나? 뭔데? 그 수영복은?"

"뭐, 불만있냐?"

"그··· 오, 오래 기다렸니···?"

여름이었다.

여름이 그곳에 서 있었다.

"중대장은 실망했다."

뭐요?

"왜 아직 놀 준비가 안 되어있는 것이지?"

얘는 또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그새 더위라도 먹었나?'

가능성이야 충분했다.

동남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답게 햇볕에 꽤 뜨거웠으니까.

"누나 혹시 막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속이 미식거린다거나 그러지 않아?"

"뭐래."

그거야말로 내가 할 말이건만 대체 뭐라는 걸까.

"아니 갑자기 헛소리 하길래 혹시 더위먹은 건가 싶어서."

"아니이··· 막내 주제에 먼저 나가있었으면 어? 돗자리도 딱! 깔아놓고! 파라솔도 딱! 꽂아놓고! 응? 선배드같은 것도 깔아놓고 해야 되는 거 아냐?"

유난히도 '딱!'이라는 말을 강조해서 말하던 세나를 응징한 건 다름아닌 지나였다.

그녀가 느끼기에도 햇볕이 꽤 따가웠던 모양인지 그새 머리 위에 꽂아놓고 있던 선글라스를 밑으로 내려 그걸로 눈을 가린 지나가 손날로 세나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세나가 좋아하는 '딱!'소리가 나더라.

"유한이 부려먹을 생각하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네가 가져와. 네가."

"씨이···"

"어? 다리가 보인다?"

그야 당연히 정수리를 부여잡고 울상을 하고 있으니까 다리가 보일 수밖에 없지만··· 지나가 경고삼아 내뱉은 으름장의 효과는 더할나위없이 확실했다.

세나의 눈에는 선글라스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지나의 표정이 보이기라도 하는지 히익하고 작게 숨을 들이킨 세나가 허옇게 질린채 다시 별장 쪽으로 오도도 뛰어갔으니까.

'그런데···'

그런 게 있었던가?

솔직히 말하면 기억이 잘 안 났다.

그만큼 짐이랍시고 챙겨온 게 어마어마했으니까.

물론, 그 안에 파라솔같은 건 당연히 없겠지만··· 그건 숙소 어딘가에 하나쯤은 비치되어 있지 않을까.

"누나도 잠깐 좀 갔다올게. 저거 혼자 내버려두면 백퍼 또 난리쳐놓을 거라."

"응."

"아, 맞다. 유한아."

"···응?"

"좀 이따 누나 오일 좀 발라줄래? 오랜만에 태닝 좀 하게."

오일이라.

그런 거라면 또 내가 전문이지.

해서 알겠다는 뜻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끄덕해보이니 씩하고 만족스럽게 웃은 지나가 세나의 뒤를 쫓아 사라졌다.

그렇게 두 자매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잠깐 사이에 해변가에 쪼그려 앉아있는 가영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햇볕이 이렇게 따가운데 덥지도 않은 걸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까지 깊게 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가영은 다리를 모은 채 파도가 철썩철썩 들이치는 해변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저 곱고 보들보들한 새하얀 피부가 망가질 것만 같아서 숙소를 나설 때 가지고 나왔던 선크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양손을 모아 가영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던 가영에 거기에 반응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덥지 않으세요?"

"아··· 왔니? 애들은?"

"잠깐 별장에 돗자리 가지러 갔어요."

"지나도."

"네."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던 것도 잠시 이내 날 향해 생긋 웃어보인 가영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앉아보라는 걸까.

그래서 시키는대로 가영이 손으로 두들겼던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문득 가영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모래로 된 백사장을 꾸욱하고 누르면서 그 위에 손자국을 남기고 있는 그것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그 위로 내 손을 포개봤다.

그러자 졸지에 내 손 밑에 깔리게된 가영의 손이 흠칫하고 떨렸다.

허나 그뿐이었다.

가영은 그 이상 손을 떨지도, 손을 빼려고 하지도 않았다.

"정말···"

오히려 못 말린다는 듯 살짝 눈을 흘길 뿐.

날 핀잔하는 듯한 말 뒤로 따라붙은 건 어색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은 침묵이었다.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쏴아아아하고 파도가 새하얀 모래 위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하게 울려퍼지는 걸 듣는 것도 꽤 재미있었고.

"거기 뭐라도 있어요?"

"응? 아··· 그냥 생각할게 좀 있어서."

생긋 웃는 가영의 모습이 막 입밖으로 밀어내려 했던 것을 다시 되돌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유한아."

"네?"

"부담된다거나 그러지는 않니?"

부담되냐니.

무엇에 대한 부담을 말하는 것일까.

"그··· 셋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 말이야."

"···아."

뭔가 했더니 그걸 말하는 것이었나 보다.

확실히 가영의 말대로긴 했다.

세 명 중에 하나를 골라야한다는 건 나머지 둘과는 관계를 정리해야만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고 그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살짝 쓰리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얼렁뚱땅 넘겨버릴 수도 없었다.

지나가 그걸 용납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글, 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리 답할 수밖에는 없었다.

세 명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내 본심은 셋 모두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허나 그걸··· 곧이곧대로 밝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래··· 당연히 그럴거야."

그리고 가영은 그런 내 대답에 날 이해한다는 듯한 반응을 돌려주었고.

"그러니까··· 딱 하나만 기억하렴. 너무 부담가질 필요 없다는 거."

그러더니 어느새 내 손밑에 깔려있던 것을 빼내서 그걸 다시 내 손 위에다가 포개더라.

그러면서 내 손등을 조심스레 토닥토닥해주는데··· 표정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진심으로 날 걱정하고 있다는 게 눈에 훤히 보여서 입꼬리가 제멋대로 근질거렸다.

그 정도로 기쁘더라.

"아, 맞다. 고모."

"응?"

"이거···"

그런 식으로 가영과 대화를 주고받다가 잠시 깜빡 잊고 있었던 선크림을 건네니까 처음에는 이게 뭔가하는 표정으로 내가 내미는 걸 받아들던 가영이 이내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생긋 웃었다.

"고모 바르라고?"

"···네."

"왜?"

왜라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아니면 뭔가 따로 바라는 대답같은 거라도 있는 걸까.

둘 중에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어서 어물대고 있으려니 내게서 건네받은 선크림을 야릇하게 어루만지던 가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모 피부가 안 탔으면 좋겠어?"

"···네."

"그러면··· 유한이가 직접 발라줄래?"

'···이걸?'

솔직히 다시 내쪽을 향해서 내밀어진 '내 선크림'을 보며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가영이 안 그런 척하면서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걸.

그게 아니고서야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이런 부탁을 할 리가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설마 가영이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치려고 들 줄이야.

아까 방을 정할 때 지나한테 당했던 걸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

"싫니?"

"아, 아뇨."

아무튼 뭐··· 졸지에 가영에게 선크림을 발라주게 되었다.

일단 선크림부터 돌려받은 뒤 그것을 손바닥 위에 쭉 짜내니 새하얀 크림이 내 손바닥 위에 수북하게 쌓였다.

그걸 손가락 끝으로 콕 찍어서 그대로 가영의 얼굴에다가 찍으니 내 손가락이 얼굴에 닿기 무섭게 자연스레 눈을 스르륵 감았던 가영이 쿡쿡대며 웃었다.

"조금 간지럽네."

"그래요?"

"응."

그렇다길래 좀 더 간지러워 보라고 은근한 손짓까지 선보여가며 얼굴 곳곳에 콕콕 찍어놓은 크림들을 손바닥을 이용해 살살 펴바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푸흐흐하고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웃던 가영이 어느 순간 갑자기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더니 그 사이로 혀를 삐죽하고 내미는데ㅡ

꿀꺽···!

그 모습이 절로 침을 삼키게 될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이건··· 키스를 하자는 걸까.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가영이 이런 식으로 유혹을 해올 줄이야.

물론, 가영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부지런히 펴바른 선크림으로 무장해 평소보다 더 새하얀 느낌으로 변한 가영의 얼굴은 어느새 잘 익은 복숭아처럼 변해있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가영이 이런 식으로 부끄러움을 무릅 써가면서 유혹을 해오는데 그걸 거절해버리면 남자라 할 수 없겠지.

"하웁···"

그래서 즉시 고개를 앞으로 기울여 입술 밖으로 삐죽하고 나와 있던 것을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이빨을 이용해 혓바닥을 슬며시 긁어주니까ㅡ

"흐으···"

가영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그녀의 호흡이 단숨에 흐트러졌다.

그렇게 가영과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있던 와중이었을 것이다.

"아앗···! 머, 멈춰···!"

저 멀리서 그런 소리가 들려오더니 파삭하고 뭔가가 모래사장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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