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지나는 그런 식으로 밀어붙이면 가영이 결국 포기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날 거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뭐···'
나쁘지 않은 판단이긴 했다.
원래의 가영이었다면 필시 그랬을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가영이라면?
"···그래, 다같이 지내자."
아니나 다를까 속으로 의문을 품기 무섭게 가영이 그녀답지 않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에 가영이 대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지나의 얼굴이 살짝 딱딱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아까보니까 1층 맨끝에 있는 방이 제일 큰 것 같던데 거기로 하는 건 어떠니?"
심지어 가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앞으로 우리가 지낼 방을 손수 고르기까지 했다.
내심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가영의 대응에 지나가 눈썹을 작게 꿈틀대며 동요를 내보였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타버린 상황이라 생각한 걸까.
"그래? 그럼 거기로 하지 뭐."
언제 동요하고 그랬었냐는 듯 지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가영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된 관계로··· 일단은 가영이 말한대로 1층의 맨끝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방들을 그냥 놀리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다른 방들은 짐같은 걸 두는 용도로 쓰기로 했으니까.
가뜩이나 네 명이서 같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짐까지 방 하나에 싹 몰아넣는다?
그래버리면 정말 발 디딜틈조차 안 나올거다.
그런 관계로 일단 방 하나씩 골라서 그곳에다가 각자 챙겨온 짐들을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아까 가영이 말했던 1층 맨끝방으로 다같이 들어가보니ㅡ
"와···"
어지간한 아파트 거실보다 넓은 방의 풍경이 우릴 반겨주었다.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침대는 덤이었다.
"히엑··· 뭔 놈의 침대가···"
"왜? 좁은 것보다야 낫지. 안 그래?"
"으음···"
침대에 대한 세 명의 감상은 그랬고, 침대를 시작으로 방 안을 요리조리 둘러보던 세 명의 시선은 곧 커튼으로 가려진 커다란 창쪽으로 향했다.
"흐음? 테라스인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매트리스를 팡팡 두들기며 침대의 탄력을 확인하고 있던 지나나 방에 딸려있는 욕실의 물이 잘 나오는지를 체크하고 있던 가영을 대신해서 나선 건 다름아닌 세나였다.
커튼으로 가려져있으니까 호기심이 막 끓어오르고 그랬던 걸까.
딱히 위험해보이는 것도 없건만 특유의 쫄보미와 찐따미를 십분 발휘하면서 슬금슬금 그쪽을 향해 접근한 세나가 이내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홱 걷어냈다.
"오···?"
그와 함께 눈앞으로 등장한 건 방만큼이나 넓은 테라스의 모습이었다.
테라스에는 정말 별의 별 게 다 있었다.
편히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도 구비되어 있었으며 반대쪽에는 네모난 모양으로 홈이 움푹 파여있는 것이 꼭ㅡ
"이건··· 욕조인가?"
그래 꼭 그런 모양이더라.
다만 엄청 막 본격적이지는 않았다.
넓직한 테라스와는 다르게 크기도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고.
사람 두 명 정도 들어가면 빈틈없이 꽉 찰 것 같은 정도?
욕조 깊이도 그렇게까지 깊지 않아서 몸을 완전히 담구기도 힘들어보였고.
"족욕같은거 하라고 만들어놓은 거 아냐?"
"그런가? 그런 것 치고는 좀 깊지 않나?"
"아니면 반신욕용일 수도 있지."
"반신욕? 이렇게 탁 트인 야외에서?"
그리 말하면서 미친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막 쳐다보길래 오랜만에 친절함을 발휘해서 세나가 잠시 깜빡 잊고 있는 사실 하나를 일깨워주었다.
"여기 무인도잖아."
"아."
어차피 우리를 제외하면 보는 눈도 없는데 탁 트여있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점을 지적해주니까 세나가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라.
"흐음···"
그런 식으로 사방을 향해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내던지던 것도 잠시 금세 또 흥미가 떨어졌는지 세나의 표정이 심드렁하게 변했다.
그 상태로 테라스 위를 휘적휘적 거닐던 것도 잠시, 에잇하고 살짝 질렸다는 기색을 내비치던 세나가 쪼르르 방을 뛰쳐나갔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라는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나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으니까.
"나나! 수영장 좀 써보려고 하는데 엄마나 언니는 생각없어?"
"됐어."
"엄마도 좀 더 둘러볼 게 있어서···"
"칫···"
둘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걸까.
그 놈의 수영장이 대체 뭐라고 입술을 삐죽하고 내민 채 작게 혀를 차대던 것도 잠시 세나가 이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내가 서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야! 너는?"
"···나?"
솔직히 말하면 별 생각 없었다.
내가 뭐 누구처럼 수영장에 환장하는 것도 아니니까.
"글쎄 딱히···?"
그래서 그리 답변했더니만 안 그래도 튀어나와있던 입술이 거의 오리 주둥이처럼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씨이···"
"아니, 근데 누나 아까 숙소 도착하면 바로 다시 잘 거라고 하지 않았어?"
피곤해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해대면서 겸사겸사 그런 말도 해댔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아잇··· 마당에 수영장이 있는데 지금 그런 게 중요해?"
뭐··· 그러시단다.
"그래서 계속 집 안에 계시겠다고? 여기까지 놀러와서?"
"아니··· 천천히 하면 되지 누가보면 당일치기로 놀러온 줄 알겠네."
앞으로 약 한 달동안은 이곳에서 지낼 거라는 사실을 그새 까먹기라도 한 걸까.
"아, 지금, 당장! 써보고 싶다고!"
"암요 그러시겠죠오."
"쒸이··· 또 꼴받게 할래?"
그리 말하면서 입술을 삐죽거리던 것도 잠시, 자신의 원대한 계획에 아무도 호응을 해주질 않으니까 꽁해졌는지 몸을 팩하고 돌린 세나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혼자서라도 호화 수영장을 만끽하겠다는 걸까.
'그 놈의 수영장이 뭐라고 진짜···'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세나가 다시 방으로 컴백했다.
살짝이지만 시무룩해진 표정은 덤이었다.
"야···"
"응?"
"그··· 좀 도와주면 안 되냐?"
"왜? 뭐가 잘 안 돼?"
그리 묻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혼자서 다 하려니까 뭔가 잘 안 됐던 모양이다.
하긴 저런 것도 써본 적 있는 사람이나 쓸 줄 아는 거지 써본 적도 없는 세나가 뭘 알겠는가.
"뭐가 안 되는데?"
"아, 일단 좀 와봐."
그래서 따라가봤더니만 수영장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수영장에 그토록 환장을 하더니만 아직 물도 안 받고 뭐하고 있는 걸까.
"물은 왜 아직 안 받아놨어?"
"···받을 줄 알아야 받지."
"아하."
어디서부터 막혔나 했더니만 설마 거기서부터 막혔을 줄이야.
"뭐, 수도같은 거 없어?"
"설마 내가 그것도 안 찾아봤겠냐?"
"아니, 그래서 있어? 없어?"
"없으니까 이러지."
"물 나오는 구멍같은 건?"
"어··· 이건가?"
확신을 못하길래 직접 가서 확인을 해보니까 확실히 좀 헷갈리게 생기긴 했더라.
구멍이 하필이면 바닥에 있어서 이게 물 나오는 구멍인지 아님 물 빠지는 구멍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아무튼 뭔가 나올 수 있는 구멍이 존재하긴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저걸 작동시키는 버튼은 따로 있는 것 같아서 한 번 주변을 뒤져보기로 했다.
"아, 뭐야. 버튼 여기 있었네. 누른다?"
"어, 눌러봐."
"물 온도는?"
"너무 차갑지만 않으면 될듯?"
그렇다고 뜨거운 물을 받아달라는 뜻은 아닐테니 적당히 시원하도록 온도를 조절해준 다음 분수 모양처럼 생겨먹은 버튼을 꾹 눌렀더니만ㅡ
"오···! 나온다!"
아까 직접 가서 확인했었던 바닥의 구멍으로부터 투명한 물줄기가 퐁퐁 솟구치기 시작했다.
"물 온도 어때? 많이 차가워?"
"딱 좋은데?"
"그래?"
"어. 아, 맞다. 야."
"응?"
"나 위에 가서 옷 좀 갈아입고 나올테니까 물 넘치지 않게 잘 보고 있어라?"
설마 이런 식으로 대놓고 일을 떠넘길줄은 몰랐기에 황당해하고 있으려니 호다닥 계단을 뛰어올라 수영장 안에서 탈출한 세나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별장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어휴··· 저거 진짜···"
그야말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린 세나의 뒷모습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면서 한탄하던 것도 잠시, 일단은 시킨대로 수영장 끄트머리에 걸터앉아서 물이 차오르는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까 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금방 차올랐다.
별장 안으로 도망치듯 자취를 감추었던 세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아닌 그때였다.
"야, 다 받아놨냐?"
자기 일을 나한테 떠넘기고 도망쳤던 건 생각도 안 나는지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그것부터 묻길래 한 마디 해줄 생각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는데ㅡ
'···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름아닌 세나의 복장 때문이었다.
"왜? 누나 수영복 입은 모습이 너무 예뻐서 몸둘 바를 모르겠어?"
그 말이 정답이었다.
나는 하얀색하고 보라색이 서로 이렇게 잘 어울리는 색인줄 오늘 처음 알았으니까.
물론, 그 사실을 깨우치게된 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세나 덕분이었고.
저걸··· 어떤 스타일이라고 하면 좋을까.
수영복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아니다보니까 세나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쓸 단어를 고르는 게 쉽지 않았다.
다만 딱 하나 확실한 건··· 보랏빛 수영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세나의 모습이 아찔할 정도로 매혹적이라는 점이었다.
"아주 그냥 넋이 나갔네. 넋이 나갔어. 누나가 그렇게 예쁘냐? 응?"
표정만 좀 평범한 걸로 짓고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니지.
저런 표정이야말로 세나의 매력이라 할 수 있으니 어찌보면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세나답다 할 수 있었다.
"흠흠··· 준비 운동이나 좀 해볼까?"
평소대로라면 자기가 이런 식으로 막 놀리면은 내가 지지 않고 받아쳐야 정상이건만 아까 전부터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으니까 뭔가 살짝 좀 부끄러웠던 걸까.
잠깐 사이에 볼이 살짝 빨갛게 변한 세나가 괜히 헛기침을 하더니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정면에서 제대로 보였던 아까하고는 다르게 살짝 옆으로 돌아선 지금은 옆모습이 주로 보였으니까.
물론, 그 모습마저도 매혹적이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수영복 차림을 한 세나의 모습을 감상하는데 푹 빠져있으려니 호기심이라는 것이 막 솟구치기 시작했다.
당연히 지나나 가영의 수영복 차림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세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둘의 모습은 또 어떨까.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던 건 말할 것도 없이 그 모습을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누나."
"으, 응?"
"물에 들어가지 말고 일단 준비운동 좀 하고 있어봐."
"왜? 너도 들어가려고?"
세나가 틀림없이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이면서 그리 묻길래 일단은 적당히 둘러댔다.
"아무튼··· 그 일단 좀 기다리고 있어봐."
"늬예늬예 알게쑵니다아."
하여간에 진짜 사람 열받게 만드는데 뭐 있다니까.
속으로 그리 툴툴대면서도 부지런히 발을 놀려 별장 안에 있는 지나와 가영을 찾았다.
그리고는ㅡ
"고모! 누나! 저희 바다나 한 번 나가봐요!"
그리 외치며 둘을 끌어들였다.
"바다?"
"갑자기 말이니···?"
"네, 수영복 입고요!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꼭 나오셔야 돼요? 누나도?"
물론, 뒷마당에 있는 세나도 챙겨오라는 말도 빼먹지 않고 덧붙였다.
그렇게 해변가행을 결정지은 뒤··· 밑에는 수영복을 위에는 적당히 방수가 되는 티셔츠를 걸쳐입고 그대로 별장을 뛰쳐나갔다.
동남아라서 그런 걸까.
그래봐야 아직 3월인데도 이곳은 이미 여름이었다.
위에서부터 내리쬐는 것도 그랬고, 바다를 따라 불어오는 것들도 그랬다.
"선글라스는 쓰고 나올 걸 그랬나···"
주변에 높은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인도라서 그런 걸까.
육지에 있을 때보다 햇살이 더 따갑고 강렬한 느낌이었다.
유난히도 따갑게 느껴지는 햇살이 얼굴하고 눈을 콕콕 찔러대는 느낌에 손으로 그늘을 만든 채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부스럭ㅡ
하고 바로 조금 전에 내가 통과했던 오솔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고, 자연스레 귓속으로 파고 들어온 그 소리에 그쪽을 향해 몸을 돌린 순간 시야 속으로 파고 들어온 것은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