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까지 가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순탄했다.
처음 호텔에 도착했을 때하고 비교하면 몇 배로 불어나버린 짐도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
돈의 힘이라는 걸 보여주듯 업체 측에서 나온 직원들이 따로 차까지 동원해서 짐을 부두까지 날라다 주었으니까.
새로 지은지 몇 년 되지 않았다던 부두는 굉장히 깔끔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건 우리를 섬까지 날라다줄 새하얀 요트였다.
"자자, 빨리빨리 나릅시다잉."
"헥···! 아, 나르고 있다고!"
직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짐인데 마냥 다른 사람 손에 맡겨놓기도 좀 그래서 적당히 옆에서 거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세나는 힘들어 죽겠다며 앓는 소리를 해댔지만.
그런 식으로 찡찡대는 세나를 달래주면서 열심히 짐을 실어다 나르고 난 후에야 요트를 띄울 수 있었고.
"그럼, 출발? 하겠습니다?"
"네."
한국말은 미숙하지만 요트 모는 솜씨만큼은 일품인 업체 측 스탭의 활약에 힘입어 바다 위를 시원하게 내달리던 것도 잠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도착, 했슴미다."
떠나왔던 곳과는 다르게 섬에 있는 부두는 굉장히 간소했다.
딱 배 두 대 대놓으면 꽉 차는 정도?
그런데 그마저도 섬의 풍경하고 지독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 정도로··· 그림같은 섬이었다.
열대의 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그대로 뽑아놓은 것 같은 그런 풍경이라고 해야할까.
압권은 역시 에메랄드 빛 바다를 따라 자그맣게 형성되어있는 백사장이었다.
백사.
말 그대로 새하얗고 고운 모래들이 해변가를 따라 동그란 모양으로 깔려있는데 이건 이런 쪽에 흥미가 별로 없는 사람이 와도 감탄할 것같은 그런 풍경이었다.
"와··· 미쳤는데···?"
그 증거로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세나의 입에서 그런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세나가 그 정도니 가영이나 지나의 반응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어머···"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햇빛을 막기 위해 챙이 넓고 하늘하늘한 모자를 쓰고 있는 가영은 황홀해하는 표정을 한채 경치에 푹 빠져있었으며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지나도 상당히 감탄한 눈치더라.
"야."
"···응?"
"여기 하루 빌리는데 얼마라고 그랬지? 오십?"
"어··· 환율 따지면 그 정도 될걸?"
"···너무 싼데? 혹시 숙소 상태 개판인거 아냐?"
오죽하면 지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정도로 사람의 로망을 정면으로 자극하는 풍경이었으니까.
물론,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업체가 관리하는 곳이라 했으니 아마 어느 정도는 사람 손에 의해 빚어진 풍경이겠지.
이를테면 저 야자수 나무같은 것들이 그렇지 않을까?
자연적으로 자라났다고 보기에는 간격도 위치도 너무 절묘했으니까.
그야말로 사이에다가 해먹 하나 걸어놓고 거기 누워서 탱자탱자하기 딱 좋은 배치랄까.
물론, 해먹만 해두면 햇빛에 그대로 익어버릴테니 지나처럼 피부를 태닝할 생각이 아니라면 파라솔같은 것도 필수겠지.
'나중에 실제로 한 번 해봐야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짐을 나르다보니 요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온갖 종류의 짐들이 순식간에 마당이나 다름없는 백사장 위로 자리를 옮겼고 그렇게 짐을 모두 내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섬에 셋만 남을 수 있었다.
"아까 직원들 돌아갈 때 뭐라고 그랬지?"
"아, 필요한 거 있거나 육지 나갈 일 있으면 아까 알려준 번호로 전화달라고 하던데?"
"아무때나 전화해도 상관없대?"
"뭐,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자기들은 24시간내내 대기하고 있을 거라서 언제 전화해도 상관없다고 하긴 하더라."
"그래?"
서비스 확실하구만.
"아, 그런데 급한 물건이나 상황 아니면 어지간하면 미리 전화해달라고 그러더라."
하긴, 24시간 대기중이라고 해도 무슨 오대기마냥 계속 출동대기를 하고 있기에는 그쪽 직원도 힘들겠지.
대충 그런 식으로 세나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야자수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다보니 앞서 걸어갔던 지나와 가영이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고모? 누나?"
둘다 왜 그러고 있나 싶어서 조심스레 둘의 옆으로 접근해봤더니 이내 그 이유가 눈으로 들어왔다.
"허···"
솔직히 백사장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돈값은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앞으로 생활하게될 숙소는 더 했다.
'설마 저거···'
다 대리석인가?
진짜로?
'에이···'
그랬다면 하루에 오십이 아니라 오백이었겠지.
아마 생긴 것만 그렇고 내용물은 다른 거 아닐까.
그런데 확실히 전체적으로 대리석 느낌이 팍팍 나면서 새하얀 것이 예쁘긴 더럽게 예쁘더라.
감수성이 별로 없는 편이라 자부하는 내 감상은 그랬는데 가영은 아예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으음··· 겨울에 많이 춥겠다···"
그게 앞으로 우리가 생활하게될 숙소를 요리조리 둘러보던 가영이 내놓은 말이었다.
물론, 반박은 바로 들어왔다.
"뭐, 어때? 겨울까지 여기 있을 것도 아닌데."
"아, 으음···"
"그리고 한국이나 겨울에 그렇게 추운 거지 이 동네는 겨울에도 별로 안 추울걸?"
"···그러려나?"
가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날 향해 시선을 던져왔지만 나라고 필리핀 겨울 날씨를 알 리가 없었다.
"어···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 식으로 나와 가영, 지나가 사담을 주고받는 동안 뒤늦게 등장해서 '와···'하고 감탄하고 갔던 세나의 목소리가 집 뒷쪽에서부터 들려왔다.
"꺅···?!"
그게 비명소리에 가까운 소리라는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갑작스러운 세나의 비명에 흠칫하며 덩달아 놀라버린 가영과 이미 그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 지나, 그리고 한 발 늦게 움직이기 시작한 나까지.
'뭔데···?'
뭐, 위험한 짐승같은 거라도 튀어나왔나?
분명 위험이 될만한 요소같은 건 전부 제거된 안전한 섬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평소 밟는 것에 비하면 한참 무른 땅이 불편하지도 않는지 파바바박 잘도 뛰어가는 지나하고는 다르게 나는 가영도 챙겨야해서 움직이는 게 쉽지않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뛰어서 세나의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에 도착했는데··· 눈으로 들어온 건 위험에 빠진 세나, 가 아니라···
'···뭔데?'
"어휴···! 뭔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놀랐잖아!"
"악! 언, 언니! 잠깐ㅡ! 아, 잠깐마안!"
지나한테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는 세나였다.
'이렇게 보면 위험한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차마 주먹으로 때리기는 좀 그랬는지 쫙 펼친 손바닥으로 등을 막 두들기고 있는데 몸을 바짝 움츠린채 두 손으로 최선을 다해 가드하고 있는 게 많이 아파보이더라.
"악···! 엄마! 살려줘!"
특히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손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쫘악쫘악하는 소리가 나는데 때리고 있는 건 분명 티셔츠로 덮여있는 등짝인데 소리만 들어보면 거의 뭐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있는 듯 했다.
그 정도로··· 파워풀한 등짝스매시였다.
아니, 그래서 대체 비명은 왜 지른 걸까.
주변에 위험해보이는 동물이나 물건같은 것도 딱히 없어보이는데 말이다.
"그래서 대체 비명은 왜 지른건데?"
궁금한 마음에 더 참지 못하고 그리 물어봤더니만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다.
"응? 내가 언제?"
내가 언제라니.
비명소리를 낸지 아직 5분도 안 지났는데 그새 기억이 날아가버리기라도 한 걸까.
"방금 꺄악하고 소리 질렀잖아."
"아니, 그게 왜 비명이야 감탄사지."
"···"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는 의미로다가 어처구니 없어하는 느낌을 눈동자 속에 듬뿍 담아서 시선을 돌려주었더니만 찔리는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세나가 안 그래도 바짝 움츠리고 있던 몸을 한층 더 움츠렸다.
어깨를 움찔하고 떠는 건 덤이었다.
"아니 나는··· 수영장이 있길래···"
"수영장? 수영장이 왜?"
"왜라니? 수영장이잖아 수영장!"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가 더 이해가 안 간다는 식의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뒷마당에 자리한 비워진 풀을 척 가리키는데 그렇게 말해도 하나도 이해가 안 됐다.
"하··· 마당에 딸린 수영장의 멋짐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그래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대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꿀밤이 마려워졌다.
그런 식으로 세나가 쓸데없이 호들갑을 떨어대기는 했지만 그 점만 빼면 별 일없이 무사히 숙소에 입주할 수 있었다.
물론, 숙소 안도 마음에 쏙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방을 정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숙소가 무려 2층짜리다보니까 방도 여러개였는데 그걸 나눠서 쓰려니까 다들 의견이 맞지를 않았다.
특히 가영과 지나의 대립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했다.
처음에 방을 어떤 식으로 나눠서 쓰는 게 좋을까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만 하더라도 본인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대세에 따르겠다는 식으로 행동하던 가영이었었는데 말이다.
조심성따윈 개나 주라는 것처럼 지나가 적극적으로 나와 같은 방을 쓰겠다며 주장을 하고 나서니까 방이 이렇게나 많은데 굳이 그래야 하냐는 식으로 지나를 만류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은근히 신경전을 하는데ㅡ
'몬가··· 몬가··· 꼴려···'
미인 모녀가 서로 나와 같은 방을 쓰겠다며 기싸움 중이라니.
세상 어느 남자가 이런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그에 비해서 얘는···'
"그냥 대충 정하고 끝내면 안 돼? 나 수영장 써보고 싶은데···"
그 놈의 수영장이 대체 뭐라고 거기에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
아니면 혹시 뭐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라도 되나?
"넌 조용히 해라아···"
"뉍."
물론, 그런 세나의 사소한 항의는 지나 선에서 가볍게 묵살당했다.
그런 식으로 치열하게 이어지던 방 쟁탈전을 끝내버린 건 다름아닌 세나였다.
"아, 이럴 거면 그냥 제일 큰 방 다같이 쓰든가!"
"세, 세나야? 그게 무슨···"
당연한 말이지만 참다참다 못한 세나가 빼액하고 외친 말에 가영은 굉장히 당혹스러워했다.
그야 그렇겠지.
다같이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은··· 나와 섹스를 하는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게 될 거라는 소리나 다름없으니까.
결국 이런 관계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가영으로서는 그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테지.
그에 비해 지나의 반응은 어땠는가 하면ㅡ
"흐음···"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난 상관없어."
잠시 고민하던 지나가 대답이랍시고 내놓은 게 바로 그것이었다.
본인은 아무 상관없다는 말.
"지, 지나야···?"
그런 지나의 발언은 당혹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던 가영을 더욱 큰 당황 속으로 밀어넣었다.
딱봐도 나에 대한 독점욕이 어마어마해보이는 지나이니만큼 이런 사안에 대해 순순히 동의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지레짐작했던 모양인데··· 가영은 지금의 지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절대 질 수 없다는 다짐으로 단단하게 무장하고 있는 게 바로 지금의 지나였으니까.
그런 지나를 아직 무장이 덜 끝난 가영이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왜? 엄마는 싫어? 세나나 나랑 같은 방 쓰는 게?"
"그으···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게 아니면은?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꼬치꼬치 캐묻는 기세가 자뭇 매서웠다.
당사자도 아니고 옆에서 지켜볼 뿐인 내가 느끼기에도 이 정도인데 당사자인 가영이 느낄 당혹감이 어느 정도일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지나도 계속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인지 끊임없이 가영을 밀어붙이던 지나가 이내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한 발 물러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아무튼··· 나는 상관없어. 다같이 같은 방 쓰는 거."
그러더니 이내 내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더니만ㅡ
"유한이 너는?"
갑자기 내쪽으로 화살을 돌려버리는게 아닌가?
설마 이 타이밍에 내쪽으로 화살이 돌아올 거라고는 제 아무리 나라해도 예상 못했기에 퍽 강렬한 지나의 눈빛까지 덤으로 얹어진 상황에서 내가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대답 뿐이었다.
"나? 나아··· 도 딱히 상관없기는 한데···"
"그럼 세나 너는?"
지나한테 노려봐진 세나야 뭐··· 말할 것도 없었고.
"···나, 나도."
그렇게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 중 두 명한테서 긍정적인 대답을 끌어내는데 성공한 지나가 마지막 남은 한 명을 향해 다시 시선을 던졌다.
"세나나 유한이는 그렇다는데 엄마?"
"···"
"그러면··· 안 괜찮은 사람이 따로 빠지는 게 맞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