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영과 단둘이서 보내는 꿈과 같은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도착 3일차 아침이 도래하자마자 지나가 세나를 질질 잡아끌면서 등장했다.
"어으으··· 미친 개피곤해···"
"뭐야, 되게 일찍 왔네?"
"어··· 누구누구 씨 때문에··· 새벽 비행기 타고 날아왔드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지나 쪽을 차마 직시하지 못하는 건 함부로 까불면 공포의 쓴맛을 보게 되리라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새벽부터 비행기에 자동차까지 타느라고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세나가 침대에다가 얼굴을 파묻은채 발을 동동 굴러댔다.
"어우··· 나 살어어어···"
피휴피휴하고 한숨소리인지 아니면 숨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는 덤이었다.
"피곤하면 한숨 자든가."
"으응···"
침대에다가 얼굴을 비비는 건지 아니면 고개를 끄덕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을 선보여가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쳐대는 세나의 모습을 쓴웃음과 함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대로 침대 끄트머리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무인도에서 꼭 필요할 것 같은 물건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지나 쪽으로 다가갔다.
"누나는 안 피곤해? 누나도 좀 쉬어야되는 거 아냐?"
방송용 체력과 일상생활용 체력이 따로 있는지라 일상생활에서는 그야말로 저질체력 그 자체인 세나라해도 저렇게 맥을 못 출 정도면 진짜 피곤하다는 소리일 거다.
그렇다면 정말 새벽부터 움직였다는 소리일텐데 어디 아픈 고양이마냥 골골대기 바쁜 누구랑은 다르게 지나는 지극히 멀쩡해보였다.
그래서 걱정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체력을 지니고 있는 지나라해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건 아닐테니까.
혹시라도 피곤하면서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그리 물어봤더니만 펜으로 뭔가를 끄적이며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던 지나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막 쓰다듬어댔다.
"괜찮아. 출발하기 전에 미리 자뒀거든."
"그랬어? 그럼 세나 누나는 왜···"
상태가 저렇냐는 뜻으로 세나가 들어가있는 침실 쪽을 힐끔 한 번 쳐다보니 지나가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쟤? 보니까 기대되가지고 제대로 못 잔 것 같더라."
"아···"
어쩐지.
조금 과할 정도로 피곤해보이더라니.
한숨도 안 자고 비행기에 차까지 탔으니 당연히 피곤하실만도 하겠지.
"애도 아니고 진짜···"
"그러니까 내 말이."
그런 식으로 지나와 함께 세나를 꼭꼭 씹고 있던 와중이었을 것이다.
"···아니거든?!"
침실 쪽에서 세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놀랐다.
그리 큰 목소리로 떠든 것도 아니건만 침실까지 들릴 줄은 생각 못했으니까.
"하여간에 귀만 쓸데없이 밝아서는···"
지나의 생각도 비슷했던 모양인지 쓰게 웃은 지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댔다.
그러더니 다시 내쪽으로 화살을 돌려버리더라.
"그나저나 유한아."
"응?"
"누나 말 안 들었더라?"
다른 건 몰라도 그 말에는 흠칫할 수밖에는 없었다.
찔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응?"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시치미를 떼봤는데··· 지나의 표정을 보니 통한 것 같지는 않았다.
통했다면 저런 식으로 입꼬리를 한쪽만 삐뚜름하게 올리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모르는 척 해보려고?"
"으음···"
"누나가 굳이 짐 같은 거 사러다닐 필요 없으니까 방에만 얌전히 있으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슬쩍 말꼬리를 늘어뜨린 지나가 어제 내가 가영과 함께 사온 것들 중 하나를 집어들더니 그것을 날 향해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이건 뭘까? 응?"
"아, 음···"
그러고 보니까 그런 말도 했었지.
뒤늦게 지나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속으로 아차하고 있으려니까 지나가 손에 든 것을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날 향해 손을 까딱까딱 흔들어댔다.
누가봐도 가까이 와보라는 뜻인 것 같아 속으로 쓰게 웃으며 지나를 향해 조심스레 접근하니 그런 내 움직임이 못내 답답했던 모양인지 지나가 내 옷을 잡고 자기 쪽으로 쭉 잡아당겼다.
그러더니ㅡ
"···엄마랑 이틀동안 뭐했어?"
은밀한 목소리로 그리 속삭이더라.
"···응?"
"했지?"
"무, 뭘···?"
"엄마랑 말이야··· 했지?"
자연스레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그 속삭임을 들은 순간 깨달았다.
여기서 잡아떼는 건 무리라는 걸.
그도 그럴 것이 지나의 목소리에 깃들어있는 건 의심이 아닌 확신이었으니까.
그 정도로 그녀는 강하게 확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틀동안 내가 가영과 방에서 얌전히 있지 않았으리라는 걸 말이다.
"···응."
결국 부정하기를 포기하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니까 지나가 얼굴 위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슥 띄워올렸다.
"진짜아··· 누나가 몇 번이나 당부했었는데···"
"···미안."
"미안하지?"
"응···"
다름아닌 이 대답을 듣고 싶었나 보다.
"미안하면은··· 여기."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입술을 톡톡 두들겨댈 이유가 없으니까.
"처음이니까 특별히 이걸로 봐줄게."
"키스?"
"응."
고작 그걸로 봐주겠다면 나야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었기에 즉시 지나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입을 맞추려고 하니까ㅡ
달칵ㅡ!
"후우··· 정리 끝났니?"
씻기 위해 욕실 안으로 들어가있던 가영이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모습을 드러내버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멈칫하니까··· 바로 그 순간 지나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지나 쪽으로 기울이다 말고 그대로 멈칫했던 몸이 갑자기 앞쪽으로 홱 쏠린 건 다름아닌 그 직후였다.
"읍···?!"
이걸 과연 키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과격한 입맞춤이었다.
당해버린 내 입장에서는 그랬는데··· 막 욕실에서 빠져나온 가영이 볼 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툭ㅡ!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름아닌 가영의 손에 들려있던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너, 너희···"
설마 자기가 보는 앞에서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스킨십을 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걸까.
가영은 말 그대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어느새 꾸욱하고 깨물고 있는 입술은 덤이었다.
저 표정은 뭘까.
혹시 분해하고 있는 걸까.
속으로 그런 의문을 곱씹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전부터 내 옷을 붙잡고 있던 지나가 붙잡은 손을 풀어주질 않았으니까.
아니, 오히려 가영의 반응에 더 흥이오른 것 같은 것이ㅡ
"흐움···♡"
어느새 입 안으로 쑤욱하고 밀고 들어온 지나의 혀가 영역표시라도 하듯 내 입 안을 느릿하면서도 집요하게 훑어댔다.
그렇게 잠시동안 가영이 지켜보는 앞에서 날 붙잡고 키스를 해대던 지나가 자연스레 입술을 떨어뜨렸다.
"후우···"
그리고는 그동안 참아왔던 숨을 훅 내뱉더니 싱긋 웃으며 내 볼을 살살 쓰다듬어 대더라.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나머지는··· 섬에 들어가서 하자?"
그 순간 작게 들려온 뿌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에 그걸 듣고 직감했다.
섬에서의 공동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마냥 꿈같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생각치도 못하게 약간의 신경전이 있기는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섬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어제에 이어 또다시 마트에 방문해 어제는 사지 못했던 생필품도 몇 가지 더 추가로 구매하고 섬을 관리하는 업체 측에서 소개해준 곳에 방문해 비상상황이 닥치게 되면 꼭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도 몇 개 구매했다.
겸사겸사 업체 측으로부터 캠핑용품도 좀 빌렸고.
멀쩡한 별장 내버려두고 굳이 밖에서 캠핑을 할 이유는 없긴 하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물론, 아직은 3월이니만큼 기상이변이라도 오지 않는 한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업체 측에서 나온 직원이 우릴 안심시키기 위한 멘트를 몇 번이고 던져댔지만 그래도 끝까지 챙겼다.
거기에 비교적으로 유통기한이 긴 식료품들도 몇 가지 대량으로 구매했다.
섬을 대여하면서 맺은 계약 중에는 매일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품이나 식료품을 보트를 통해 공급해주겠다는 식의 계약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업체 측에 무언가 사정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갑자기 기상 사정같은게 확 나빠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업체 측에서는 보트를 띄우기 힘들 정도로 바다 사정이 심각하면 헬기를 통해 공급해줄 수도 있다고 하긴 했지만 보트는 물론 헬기까지 못 뜨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까.
'상점이 있긴 하지만···'
상점을 통해 먹을 걸 구매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주로 비용적인 측면에서 그랬다.
상점에서 파는 것들 중에 평범한 것들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다보니 생긴 건 평범한 음식처럼 보여도 가격은 평범하지 않은 것들 뿐이었다.
물론, 정말 극한의 상황이라면 효율이고 뭐고 따질 겨를 없이 일단 살고부터 봐야겠지만 설마 그런 상황까지 오겠는가.
들어보니까 말이 무인도지 육지하고 그렇게 멀지도 않은 것 같던데 말이다.
그러니 비상식량만 좀 챙겨가도 상점 신세를 질 일은 없을 거다.
'솔직히 지나면 그냥 헤엄쳐서 건너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긴 하지만 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지나는 수영도 굉장히 잘 하는 편이었으니까.
체력이야 뭐 말할 것도 없었고.
아무튼 그렇게 살 거 사고 챙길 거 챙기고 하다보니까 어느새 섬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나와 지나, 그리고 가영이 바깥을 열심히 돌아다니는 동안 침대 위에 엎어져서 사경을, 아니 수마 속을 헤매던 세나가 부스스한 머리를 자랑하며 잠에서 깨어난 건 다름아닌 그때였다.
"어흐으··· 죽겠드아···"
아까는 살 것 같다고 난리더니만 이제는 또 죽겠다고 난리더라.
"그렇게 피곤해?"
"으어··· 몸살 난 것 같아··· 우리 그냥 내일 들어가면 안 되냐?"
아무래도 무인도에 비하면 호텔이 몇 배는 더 지내기 편할 것 같았던 걸까.
뜬금없이 내일 들어가면 안 되냐고 떼를 써대길래 단호하게 받아쳐주었다.
"응, 안 돼."
"씨이이···"
다행히 세나도 그냥 해본 말인지 한 번 씨근덕대고 말더라.
"그나저나 슬슬 좀 일어나시죠? 머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옷은 입으셔야될 거 아니에요."
"으으··· 귀찮아아···"
"그러면 내가 입혀줄까?"
이러면 틀림없이 당황해서 펄쩍 뛸 거라고 생각해서 그리 말했던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효과가 아주 확실했다.
"무, 뭔···!"
진심으로 한 말이라 생각한 건지 이불로 몸을 슉 가리면서 그 안에서 꿈틀꿈틀대길래 이불 속으로 손을 쑥 밀어넣어서 세나의 양 다리를 잡고 내쪽으로 쭉 잡아당겼다.
"브에엑···"
"자자, 얼른 나갈 준비 합시다아."
"아··· 허리 아프다고오···"
"그러면 스트레칭이라도 좀 하던가."
그리 말하면서 아예 내 손으로 직접 스트레칭을 시켜주니까 졸지에 몸이 반쯤 접혀버린 세나가 죽겠다며 침대를 팡팡 두들겨댔다.
"둘이 뭐하냐?"
지나가 침실 안으로 들어온 건 그 와중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한 거라고는 세나를 못살게 군 것 뿐이었으니까.
"응? 아, 세나 누나가 허리 아프다고 그래서 스트레칭 좀 시켜주는 중이었지."
"장난은 거기까지 하고 얼른 준비해. 짐도 날라야 하니까."
그래서 나름 당당하게 대꾸했더니만 피식하고 웃은 지나가 퍽 단호한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응."
"유세나 너도."
"어, 어."
그리고 역시 세나를 빠릿빠릿하게 만드는데에는 지나만한 특효약이 없었다.
내가 일어나라고 할 때는 누운 채로 꿈쩍도 안 하더니만 지나가 일어나라고 한 마디 딱 하니까 언제 침대 위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그랬냐는듯 몸을 벌떡 일으키더라.
그렇게 호다닥 옷을 갈아입고 나온 세나까지 합류하고 나서야··· 앞으로 우리가 한 달동안 생활하게 될 섬으로 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