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1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는 건 일단 우리 셋의 뜻은 이러니까 이제 네가 선택하라는 뭐 그런 뜻인 걸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유한이 네 뜻이겠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뜻이 맞는 것 같았다.
선택이라.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만큼은 제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망설여질 수밖에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영도 그렇고 지나도 그렇고 세나도 그렇고 전부 놓치기 아까운 여자들이었으니까.
그만큼··· 그들에 대한 애정이 상당하기도 했고.
그래서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애꿏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더니만ㅡ
"다만···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리는 건 개인적으로 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지나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옳지 못하다라.
무엇이 옳지 못하다는 것일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지나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일단··· 공평하지도 않을 뿐더러 유한이한테도 굉장히 가혹한 선택이 될테니까."
내가 지나의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건 지나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직후였다.
'아.'
그랬다.
지금 지나는 판을 새롭게 짜려고 하고 있었다.
여태껏 진행해왔던 것들과는 하등 상관없는, 완전히 별개의 판을 제 손으로 빚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본인의 승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함이겠지.
아마 지나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깨달았던 것 아닐까.
이대로가면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걸?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음···'하는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던 지나가 다시금 입을 열어 생각치도 못했던 말을 입밖으로 꺼내들었다.
"그러니까··· 여행을 가는 거야."
여행.
언젠가 지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적 있었던 화제가 이번에도 그녀의 입을 빌어 재등장했다.
다만··· 전과는 그 형태가 좀 달랐다.
그때 지나가 말했던 건 데이트를 빙자한 단둘만의 여행이었고, 지금 말하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같이 떠나는 것일테니까.
"···여행?"
당연한 말이지만 배신감에 젖어서 뒤통수가 뜨끈거리는 걸 만끽하고 있던 세나는 그런 지나의 제안에 뜬금없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영이 보여준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 생각해보면 우리 이렇게 다같이 여행 가본 적이 없더라고."
"아니,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거랑 이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내 생각도 세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나가 대체 무슨 맥락으로 그런 말을 꺼내든 것인지 당장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상관이 있으니까 가자는 거지."
"아니, 그러니까 둘이 대체 무슨···"
"그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누군가랑 결혼할거면 그 전에 먼저 단둘이 여행부터 가보라고."
이번에도 좀 뜬금없는 발언이긴 했는데 전과는 다르게 대충 무슨 맥락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 것 같긴 했다.
그러니까 지나가 말하고 있는 건··· 여행의 특수성이겠지.
여행만큼 사람의 본성을 잘 보여주는 것도 또 없으니까.
허나 꼭 그것 뿐일까?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면 다른 사람의 시선같은 걸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거고."
그래, 역시 그럴 리가 없지.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지나의 말은 우리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가서 외부적인 요건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 공평하게 한 판 붙어보자··· 뭐, 이런 뜻인듯 했다.
그래서일까.
그런 지나의 제안에 가장 큰 반응을 내보인 것은 다름아닌 가영이었다.
그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이 셋 중에서 타인의 시선을 가장 신경쓰던 사람이 바로 가영이었으니까.
그만큼··· 나와 가영 사이에는 장애물도, 방해가 되는 요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러면··· 적을 도와주는 거 아닌가?'
생각이 자연스레 그곳까지 뻗어나가는 동안 지나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가 좀 알아보니까··· 뭐, 한 달 살기? 그런 게 있더라고."
"아, 그 제주도 같은데 가서 펜션같은 거 빌려서 한 달 지내는 거?"
"어."
"그걸 하자고?"
"일단 최소한 그 정도는··· 있어보자는 거지."
"그럼 장소는 어디로 할건데?"
"그건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는 거고."
"흠··· 그렇게 한 달 정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생활한 다음에 그 때 결정하자?"
"일단은."
가영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지나하고 세나의 대화는 쉬지않고 쭉쭉 뻗어나갔다.
"그래도 얘가 못 고르겠다고 하면?"
"그건 그때가서 다시 고민해보면 되는 거고."
"하··· 이게 무슨···"
"그래서 안 가겠다고? 그럼 넌 혼자 집에 있던가."
"누가 안 가겠대? 그냥··· 좀··· 그렇다는 거지."
"뭐가."
"아니, 뭐 스케쥴이나 그런 게 좀···"
"스케쥴은 무슨, 당분간 방송 쉴 거라면서?"
"아니, 나야 그렇긴 한데··· 언니나 엄마는 아니잖아."
"나? 나야 상관없어. 어차피 일주일 정도만 더 일하면 당분간 예약같은 거 없으니까."
그렇게 세나의 발언을 일축한 지나가 여전히 말이 없는 가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엄마··· 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서 왜 그렇게 정신없이 바빠보이나 했더니만 홍보용 영상 촬영은 핑계고 사실 기존에 잡혀있는 PT들을 쳐내느라 그랬었나 보다.
'잠깐만 이렇게 되면···'
가영이 상대적으로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나의 말마따나 가영이 당장 가게를 어쩌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겠지.
그 사실을 가영이라고 해서 모르지 않았던 걸까.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가영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도 일정, 괜찮아."
가영이 운영하는 숍이 평소에도 얼마나 붐비는지를 생각하면 괜찮을리가 없건만 괜찮다고 말하는 건 어떻게 해서든 괜찮게 만들겠다는 뜻이겠지.
괜찮지 않은 걸 괜찮게 만들 방법이야 뭐··· 가영이 알 것이고.
아마 숍 운영을 잠시 직원 중 한 명에게 맡긴다던지 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닐까.
여행 가 있는 동안 숍을 아예 닫을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믿을만한 직원이야 있을테니까···'
그리고 그런 가영의 결단은 지나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나 보다.
아까하고 비교해서 표정이 살짝이지만 굳은 걸 보면 틀림없이 그런 거겠지.
"하··· 이게 뭔···"
그렇게 세나의 한탄과 함께··· 넷이 함께 떠나는 여행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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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이서 여행을 떠나기로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떠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한 달이상 체류하게 될 가능성이 큰 만큼 알아봐야할 것도 많았고, 애초에 어디로 갈지 장소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이래저래 정리해야할 게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내 휴학신청이었고, 그게 내가 방학 중에 학교에 방문하게된 이유기도 했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혼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저번에 침대 위에서 지나가듯 했던 말마따나 지나가 그리 되도록 내버려두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지나의 바이크에 몸을 실게 되었다.
"여기 맞지?"
"응."
"안까지 같이 들어가줘?"
그리 말한 지나가 눈빛으로 얼른 '응'이라고 말하라며 압박아닌 압박을 해왔지만 모르는 척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과보호였으니까.
"아냐."
"그래도···"
"아까 뭐 이 근처에서 처리해야할 거 하나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그럼, 그거나 얼른 처리하고 오셔요."
그냥 한 말은 아니었던 걸까.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겨있던 지나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끝나면 어디 가지 말고 이 앞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돼?"
"어휴, 내가 앤가."
"애보다 더 걱정되니까 그렇지."
"알겠으니까 얼른 다녀오기나 하셔요. 보니까 꽤 급한 일 같던데."
그리 말하며 손을 휘적휘적해보이니 피식하고 웃은 지나가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까불기는···"
그러더니 그대로 바이크를 몰아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지나를 떠나보내고 난 후에 학교 입구를 통과해 그 근처에 자리하고 있던 학과 건물로 들어갔다.
애초에 미리 다 알아보고 온 것이었기에 쓸데없이 길을 헤매는 일도 휴학신청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나는 일도 없었다.
뭐, 본인을 조교라고 소개한 여자가 쓸데없이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조금 들러붙긴 했지만 싸늘하게 대응하니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더라.
아무튼 그렇게 휴학신청을 무사히 끝마치고서 아까 지나가 기다리라 말했던 장소로 향하려고 했는데ㅡ
"···서, 선배?!"
어디서 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가 내 발목에다가 족쇄를 채워버렸다.
해서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몸을 돌려보니··· 나름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어···"
그러니까 쟤 이름이··· 유린이었나?
"유린아?"
"네, 네···! 맞아요!"
내가 자기 이름을 기억해줬다는 사실이 기쁜 걸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유린의 얼굴 위로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그야말로 짝사랑하는 이와 우연찮게 마주친 이나 지어보일 것 같은 그런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게 좀 부담스러웠다.
이미 서로 은밀한 곳까지 다 본 사이인만큼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이 와중에 의문인 점은 얘가 왜 여기 있냐는 것이었고.
"하, 학교에는 어쩐 일이세요?"
유린도 내게서 비슷한 의문을 느꼈던 모양인지 유린이 살짝 빨갛게 물든 얼굴을 한채 그리 물어왔다.
"나? 아··· 그게 휴학신청 좀 하려고 왔는데···"
그래서 나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리 답했건만 아니나 다를까 반가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유린의 얼굴 위로 쩌적하고 금이 갔다.
"휴학··· 신청이요?"
덕분에 나름대로 풋풋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어색하게 변해버렸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가, 갑자기 휴학신청은 왜···"
그랬더니 그리 물어보더라.
그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유린은 시청자들이 흔히 말하는 킹반인이라는 걸.
'그래도 그 건으로 나름 떠들썩했다고 들었었는데···'
뉴스나 이슈같은 거에 관심을 두지 않는 타입인 걸까.
뭐, 그런 인상이기는 했다.
아무튼 그쪽을 잘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을 하기도 좀 그랬기에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 사정이 좀 있어가지고··· 그런데 너는 학교에는 왜···?"
"아, 그게··· 근로장학생이라고 학교에서 알바할 사람 뽑는다길래 지원했었거든요···"
확실히 그런 이유라면 아직 방학 중임에도 학교를 드나들만 하긴 했다.
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편의점같은데서 일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학교에서 알바를 하는 게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을 것 같기도 했고.
"그렇구나··· 그러면 지금 일하는 중인거야?"
"네? 아··· 네."
정말로 솔직히 말을 하면··· 좀 껄끄러웠다.
사고를 치지 않은 상태였다면 이런 감정을 느낄 일도 없었겠지만 이미 난 화려하게 한 번 저지른 상황이지 않던가.
그렇다보니까 눈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유린의 존재가 그런 식으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새터 때 화장실에서 가졌던 밀회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선명한지 자꾸만 침을 꼴깍꼴깍 삼켜대며 은근한 눈빛도 같이 보내와서 더 그랬다.
그래서 그러면 얼른 가서 일 보라는 식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그 자리를 탈출하려고 했는데ㅡ
자박···!
"흐으음···"
타이밍이 뭐 이따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잠깐 사이에 볼일을 끝마치고 온 건지 꽤 선명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뒷쪽에서부터 지나의 것으로 추정되는 콧소리가 들려왔다.
볼일을 끝마치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하니까 마땅히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할 내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몸소 찾으러 왕림하신 것일까.
"누구셔? 유한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옆을 꿰찬 지나가 팔로 내 허리를 감싸더니 그대로 날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그··· 후배인데···"
"그래? 어? 그러고보니까 그때 그 분 아닌가? 그 왜 술집에서···"
"아··· 네네, 맞아요."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지나의 팔이 신경쓰이는 걸까.
지나의 말에 어색하게 긍정할 때를 제외하고는 유린의 시선은 줄곧 내 허리 쪽에 못 박혀있었다.
"그래서 우리 유한이한테는 무슨 일로···? 혹시 뭐 할 말이라도 있어요?"
"그, 그게··· 그러니까··· 오랜만에 뵈서··· 반가워서··· 요···"
"흐음··· 그래요? 그럼 방금 인사했으니까 이제 더 할 말 없는 거네요?"
"···"
"그렇죠?"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여기서 당당하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그거야 실제로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유린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네."
"그럼 가볼게요. 저희가 좀 바빠서."
바쁘다니.
금시초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어리둥절해하고 있으니 지나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거짓을 입에 담았다.
"너 휴학신청 끝내고 나면 데이트 하기로 했었잖아."
"···아."
덕분에 유린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딱딱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호텔도 예약해뒀으니까 오늘··· 알지?"
은밀한 목소리로 그리 말한 지나가 누군가에게 과시라도 하듯 내 아랫배쪽하고 옆구리를 은근히 더듬어댔다.
"아무튼 더 할 말 없으면 우린 이만 가볼게요. 보니까··· 일하는 중이신 것 같은데 고생하시고."
그러더니 그대로 날 데리고 돌아서더라.
정말로 솔직히 말하면 뒤에 있는 유린의 표정이 아주 조금은 신경쓰였지만ㅡ
"누나 혹시 화났어?"
"···어."
"쟤는 진짜 그냥 후배라니까?"
"그럼 지금 찐하게 키스해줘. 그러면 화 풀게."
"지, 지금?"
"어, 왜? 싫어?"
그게 지나에게 입을 맞추지 못할 이유가 되어주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