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1부
솔직히 말하면 좀, 아니 많이 의외였다.
그러니까··· 사실상 개판 오분 전이나 다름없는 이 상황을 주도적으로 수습하고 있는 사람이 다름아닌 지나라는 사실이 그랬다.
'···무슨 생각이지?'
이건 내 예상에도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난 가영만큼이나 지나를 경계했었으니까.
처음 내가 가영과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지나는 특유의 독점욕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그렇기에 비슷한 일이 다시 한 번 터지게 되면 그때 보여주었던 것 이상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었고 그렇기에 최대한 경계했던 것이었는데ㅡ
"후···"
의외로 지금 내 눈에 비춰지는 지나의 모습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름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한숨을 푹푹 내쉬긴 해도 그랬다.
그에 비해 가영이나 세나의 상태는 어떤가 하면··· 둘다 서로 다른 이유로 패닉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개중에서도 특히 세나의 상태가 제일 심각했다.
아무래도 현장을 대놓고 들켜버렸기 때문일까.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한채 손을 달달달달 떨고 있는데 지나가 한숨을 푸욱하고 내쉴 때마다 자꾸 그쪽을 힐끔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대로 지나의 손에 최후를 맞게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라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거라면···'
확실히 저럴만 하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나가 들려준 '썰'에 따르면 학창시절 유한에게 과할 정도로 치근거렸던 이들이 지나에게 '처리'되는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게 바로 자신이라 했었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불길한 생각이 들 수밖에는 없겠지.
그때 지나에게 '처리'당했던 이들의 모습 위로 자신의 모습이 막 오버랩되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창백한 얼굴을 한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대는 모습이 퍽 보기 안쓰러워서 맘 같아서는 손등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가영의 상태도 만만치 않았을 뿐더러 지나의 눈치도 봐야만 했으니까.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지금이야 침착해보이지만 내가 세나를 신경쓰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다 집어치우고 폭주해버릴지도 모르지.
속으로 대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들 다 맨정신으로 이야기를 할만한 상태는 아닌 것 같네."
지나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고, 그 부분만큼은 나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혹스럽고 당황스러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늘 정해진 시간에만 방문하던 둘이 설마 이 시간에 갑자기 들이닥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무덤까지 안고 갈 수는 없다 생각했기에 언젠가는 진실을 밝혀야만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들켜버리는 경우는 별로 생각 안 해보기도 했고.
아무튼 눈치가 보여서 차마 지나의 말에 대놓고 동의를 표하지는 못하고 대충 눈짓으로만 그러고 있으려니 지나가 자리에서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유한이랑 나가서 마실 것좀 사올게.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대화가 제대로 진행될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러더니 자연스레 날 제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병실 안에 세나하고 가영만 남겨두려고 하더라.
지금 이 순간 가장 당혹스러울 둘이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라도 주려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런 듯해서 얼른 갔다오자는 지나의 말에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편의점이 병원 입구 쪽에 있었던가?"
"응, 그런데 거기 술은 안 팔텐데···"
"그러면 다른 곳으로 가면 되는 거고."
그렇게 지나를 따라 병실을 탈출했는데··· 병실을 벗어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지나가 대뜸 폭탄을 내던졌다.
"아, 맞다. 유한아."
"···응?"
"이왕 이렇게 된 거 엄마한테 말해버렸어."
말해버렸다니?
속으로 그런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설마···'하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울림이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런 내 추측에 방점을 찍듯ㅡ
"우리 둘 관계 말이야. 엄마한테 말해버렸다고."
지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엄청난 말을 툭 내뱉었다.
내가 할 말을 잃어버린 건 그 직후였다.
나와 세나가 꼭 끌어안은 채 섹스를 하고 있는 걸 봐버렸으니 가영은 틀림없이 패닉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던 것일테고.
그런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뭐?
뭘 했다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당황스러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멍하니 지나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하필 그 때 엘리베이터가 띵하고 맑고 고운 소리를 내며 1층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왜? 엄마가 걱정 돼서 그래?"
그걸 지금 말이라도 하는 걸까.
아무튼 그리 말하면서 그대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길래 황급히 지나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러니까··· 욕심도 적당히 부렸어야지."
그리고 그게 지나가 자기 뒤로 따라붙은 내쪽을 힐끔하고 돌아보면서 내놓은 말이었다.
역시 티는 안 냈지만 가영에 이어 세나하고도 붙어먹어버린 이 상황에 화가 난 건 지나또한 마찬가지였던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지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건 나로서는 생각치도 못했던 발언이었다.
"그래도 뭐··· 너무 걱정하지마. 누나가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알아서 해주겠다니.
대체 뭘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
"그러니까 유한이 너는··· 누나가 하는 말에 적당히 맞장구만 쳐."
하나부터 열까지 의문 투성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따로 뾰족한 방법같은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ㅡ
"알겠지?"
"···응."
일단은 지나의 의도에 편승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지나와 유한이 모종의 합의를 끝마쳤을 때, 졸지에 병실 안에 단둘이 남겨지게 된 가영과 세나는 평소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 속에 놓여져있었다.
사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세나는 세나대로 가영의 눈치를 보느라고 입을 열지 못하는 중이었고, 가영은 세나에 이어 지나까지 유한과 그런 관계라는 걸 알게 되어버린 탓에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양쪽 모두 공평하게 침묵에 어깨를 짓눌리고 있을 때, 먼저 나서서 그것을 떨쳐낸 건 다름아닌 세나였다.
어쨌든 들켜버리고 말았으니 해명은 해야겠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그··· 어, 엄마···"
바로 조금 전까지 유한과 그렇고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황급히 걸친 티가 팍팍 나는 환자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던 세나가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그리고는 그대로 어쩌다가 유한과 그런 관계가 된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참으로 애석하게도 가영은 그런 세나의 말을 들어줄 수 있을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말같은 건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온갖 생각들이 꽉꽉 들어차있는 상태였으니까.
세나와 유한의 관계같은 게 그랬고, 지나와 유한의 관계에 대한 것이 그랬으며, 스스로가 그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같은 게 그렇게 만들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가영이 머릿속이 바늘 하나조차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가득 차버린 데에는 셋 중에서 세 번째 것의 영향이 가장 크긴 했다.
그렇다보니 지금 이 순간 가영의 머릿속에는 '왜?'라는 물음만이 반복해서 맴돌고 있었다.
왜 그랬던 걸까.
왜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걸까.
자신은 유한과의 관계를 부담스럽게 여겼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나 좋은 기회가 눈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는데도 왜 무시했지?
왜?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보니 가영은 세나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결국 어렵사리 입술을 뗐던 세나도 제 말이 가영에게 닿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다시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렇게 다시 침묵 속으로 잠기게 된 둘을 그 안에서 건져낸 것은ㅡ
드르륵ㅡ
편의점에 갔다가 돌아온 지나와 유한이었다.
둘이 간호사들 몰래 공수해온 술이 가득 들어있는 비닐 봉투를 들고 재등장함과 동시에 본격적인 대화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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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테이블 위로 올라오기 무섭게 사라졌다.
그리고 주로 그걸 해치우고 있는 건 지나와 가영이었다.
나도 세나도 마시긴 했지만, 어느 정도 마시고 나니까 지나가 그만 마시는게 좋겠다고 제지하더라.
대화할 수 있는 정신은 남겨두라나.
그래놓고서 자기는 무슨 물 들이키듯 쭉쭉 들이켜대긴 했지만.
아무튼 대화같은 건 일절 나누지 않고 그저 술만 들이켜대고 있던 와중이었을 것이다.
"후우···!"
술냄새를 물씬 풍기는 한숨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거칠게 테이블 위에다가 내려놓은 지나가 처음으로 포문을 열어젖혔다.
"다른 건 다 필요없고 딱 이것만 말할게."
어느새 발그레하니 달아오른 뺨과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은 덤이었다.
"난··· 유한이 포기할 생각같은 거 없어."
그런 지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일종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런 지나의 선언에 대한 반응은 딱 둘로 나뉘었다.
가영처럼 흠칫하고 몸을 떠는 이가 있었으며, 세나처럼 슬슬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딸국거리고 있다가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이가 있었다.
그 반응 덕분에 새삼 확신할 수 있었다.
'진짜로 말했나 보네···'
엘리베이터에서 지나가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아무튼 그렇게 먼저 포문을 연 지나가 이내 그것의 방향을 가영 쪽으로 돌렸다.
"엄마는?"
참으로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질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가영은 그 짤막하기 그지없는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꼬옥하고 깨물기만 할 뿐.
그렇지만 지금은 그 마저도 훌륭한 대답이었다.
적어도 부정하지는 않았으니까.
부정하지 않았다는 건?
지나처럼 날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 걸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고.
일단 난 가영의 침묵을 그렇게 해석했는데 지나도 나와 비슷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알겠어. 일단 엄마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 거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그런 거겠지.
그리고 가영은 그런 지나의 판단을 굳이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지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말한 순간 몸을 크게 한 번 떨긴 했는데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가영의 의견을 확인한 지나가 마지막으로 세나 쪽을 향했다.
"유세나 너는?"
"···아까부터 대체 뭔 소리야? 말을 해줘야 알지 뜬금없이 그렇게 물으면 내가 어떻게ㅡ"
"아직도 모르겠어?"
"아니 그러니까 뭔가 좀 설명이라도 해주고ㅡ"
"엄마도, 나도 유한이랑 그런 관계라고. 너처럼."
그 순간 세나가 보여준 반응은 정말로··· 가영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며 보여주었던 것 이상이었다.
살짝이지만 삐죽하고 튀어나와 있던 입술이 이내 크게 벌어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뭐?"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는 덤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그런 얼굴을 한채 황당하다는 투로 중얼대던 세나의 시선이 이내 가영을 향해 휙 돌아갔다.
그렇게 날아든 딸의 시선에 가영은 차마 그걸 직시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푹 숙여버렸고.
"허··· 하··· 어···"
뒤통수가 많이 뜨끈한 걸까.
세나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봐줄 지나가 아니었기에 다시 한 번 지나의 물음이 세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뭘."
"유한이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지나가 가영을 향해 질문을 던졌을 때보다 지금이 좀 더 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나는 늘 나와의 관계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눈치였으니까.
야한 일 하는 건 좋지만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는 건 고려하지 않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런만큼 어쩌면 처음으로 '포기'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ㅡ
"포기할거면 포기하든가."
"내가? 내가 왜?"
"그럼 안 하겠다고?"
"누구 좋으라고 포기를 해?"
지금 이 순간 세나의 뒤통수를 뜨끈하게 달구고 있을 배신감이 의외의 성과를 냈다.
예상과는 다르게 울컥한 세나가 참전 의사를 밝혀버린 것.
그렇게 세나에게마저 포기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받아낸 지나가 이내 내쪽을 향해 시선을 내던졌다.
"그러면 답은 하나 뿐이네."
이제는 네 차례라고 말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