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9화 〉1부 (229/315)



〈 229화 〉1부

정말로 솔직하게 말을 하면 세나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내가 한 행동은 명백히 선을 넘은 행위였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방송에 있어서만큼은 진심인 사람이 바로 세나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방송'에서만큼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방송 중에 따로 불러낸 적은 있지만···'

하지만 오늘은 어땠는가.

방송 중일 때도, 카메라가 그녀를 찍고 있을 때도 건드렸었다.


물론, 지금은 방송 중이 아니라 휴식시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어디 가는 건 아니겠지.


그렇기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한껏 뜨겁게 달아오른 몸 앞에서는 제 아무리 방송에 진심인 세나라해도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아무튼 약속한대로  세  두들기기라는 신호를 받았으니 문을 열어주긴 해야겠지.


그래서 슬쩍 몸을 일으켜 잠궈놓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찰카닥ㅡ!

 있으면 세나하고도 그런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까.

내 손으로 직접 돌려놓았던 잠금쇠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서 난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경쾌하게 들렸다.

"왔어? 누나?"

아무튼 그렇게 잠궈놓았던 문을 열었는데ㅡ


'···응?'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새까만 마스크였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목에 걸려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는 'STAFF'라고 하얀색 글자로 떡하니 적혀있는 보랏빛 명찰이었고.


'어···'


그래서 대체 뭘까 이건.

남자 화장실이 아니었나?

그렇다고 치기에는 누군지 모를 여성의 뒤로 어렴풋이 보이는 소변기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또렷했다.


아니면 혹시 엄청나게 급한데 여자화장실이 꽉 차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대피라도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니 옆에 빈 칸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개나 존재한다는 사실이 발목을 턱 붙잡았다.

그래서 이 여자는 남자화장실에 대체 무슨 일로 찾아온 걸까.


문을 세  두들기는게 신호인 건 또 어떻게 알았고?

그야말로 생각치도 못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어떻게든 사고를 이어나가 보려고 해도 그것이 자꾸만 중간에 끊어졌다.

그러면서 머릿속이 제멋대로 '멍~'해지는데 그런 날 일깨운 건 새까만 마스크 너머에서부터 들려온 탁한 목소리였다.


"우리 유한이 오랜만이네? 선생님 안 보고 싶었어?"


선생님?

"선생님은 유한이가 정말 많이 보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들은 순간 직감했다.

세나가  말이었는지 아니면 지나가  말이었는지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선생인 주제에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인 유한을 상대로 스토커짓이나 한 쓰레기가 바로 눈앞에 있는 여자라는 걸.


"아참, 나 마스크 쓰고 있었지?"


내가 스태프의 탈을 쓰고 있는 여성의 진짜 정체에 다다르는 동안 그녀는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손으로 잡아내려 그 밑에 숨겨놓았던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마스크가 밑으로 끌려내려가며 드러난 것은 악의라는 감정이 덕지덕지 눌러붙어있는 그런 미소였다.

그리고 그 뒤로 따라붙은 건ㅡ


드르르륵···

상당히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화장실 불빛 아래에서 번뜩이는 어떤 것의 존재를 포착한 순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가만히 있으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유한이  때문에 선생님이 괴로웠던만큼만 괴롭게 해줄테니까아···"

뭐, 박스라도 뜯는데 쓰라고 지급받은 물건인 걸까.


일반적인 커터칼 말고 상당히 굵은 날을 가진 것을 손에 쥔채 스토커녀가 내가 들어와있는 화장실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지랄하네."


"뭣··· 커헉?!"


딱봐도 방심하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여서 바로 몸을 움직였다.


겁에 질려서 얼어붙은 척 하고 있던 모습을 내던지고서 화장실 벽을 손으로 짚은  스토커녀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휘두르는대신 쭈욱하고 뻗어져나간 것에 배를 얻어맞은 스토커녀가 쿠당탕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화장실 칸에서 빠져나와 빤스런을 치려고 했는데··· 화장실 칸에서 몸을 빼기 무섭게 뭔가가 옷깃을 턱하고 붙잡아오는 게 느껴졌다.


"흐··· 유한이 지금 선생님한테 앙탈부리는 거야···?"


앙탈은 지랄.

제대로 걷어찼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나?

아무튼 이대로 도망치긴 그른  같아 잽싸게 스토커년 쪽으로 몸을 돌리니 발차기 맛이 많이 매콤하기는 했는지  눈이 시뻘겋게 변한채  깨문 입술 사이로 침을 질질 흘려대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상태로 손에 든 커터칼을 내 얼굴을 향해  내리찍어 오길래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커터칼을 쥐고 있는 쪽의 손목을 붙잡았다.


'씨발  놈의 힘이···'

딱봐도 방구석 폐인으로 살다가 날 어떻게 해보겠다고 모처럼 기어나온  같은데 이 힘은 대체 어떻게 되먹은 걸까.

이게 바로 회광반조인지 뭔지하는 그거인 걸까.

한손만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려 양손을 전부 동원해서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건만 시퍼런 빛을 흩뿌리는 칼날이 자꾸만 얼굴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맘 같아서는 아까처럼 발차기라도 먹여주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정신차리고 보니 어느새 벽까지 밀어붙여져서는 하체를 완전히 봉쇄당한 상태였으니까.


'씨바알···'

찔리나?

자꾸만 머릿속으로 고개를 치켜드는 선홍빛을 띈 상상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타다닥하고 이쪽을 향해 황급히 달려오고 있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화장실 안으로 울려퍼지더니ㅡ


쿠당탕ㅡ!


"···게헥?!"


뭔가가 요란하게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헛숨을 크게 들이키는 소리가 같이 울려퍼지더니만··· 두 팔을 부들부들 떨리게 만들던 압박감이 어느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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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조금 뒤로 되돌려 유한이  밀회장소로 택한 화장실을 향해 떠났을 때, 졸지에 대기실 안에 홀로 남겨지게된 세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 혼란에 휩싸여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나가 혼란에 빠지게  것은 유한의 탓이 컸다.

정확히는 유한이 대기실을 떠나기 전에 남기고 간 말 때문이라고 해야할까.

'ㅡ할래? 섹스?'

분명 유한의 것임에도 평소에 듣던 것하고는 느낌 자체가 다른 목소리로 이루어진 말이 자꾸만 머릿속으로 메아리쳤다.


그래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게 머릿속으로 울려퍼지면 울려퍼질수록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오르다 못해 익어가는 느낌이었으니까.


'해···?'

누구랑?


유한이랑?


정말로 솔직하게 말을 하면··· 언젠가는 이런 상황과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자신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상 남매나 다름없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할짓 못 할짓까지 다 해버린 판국에 이제 남은 것이라고 해봐야 그것 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아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과 현실로 마주하는 건 아예 차원이 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웠다.

유한의 손길이 몸에 닿기만 해도 몸 어딘가가 저절로 젖어버릴 정도로 그 손길에 길들여졌음에도 그랬다.


다른 이도 아니고 유한과··· 섹스라니.

 한 번도 상상해본  없는 것이기에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것또한 없었다.


그렇기에 거절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지만 그럼에도 그런 짓까지 해버리면  때는 정말로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릴테니까.


몸까지 섞은 남자를 전처럼 동생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스스로가 뻔뻔하다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능청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분만큼은 능청스럽게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절대로.

그리고 그건 아마··· 그 누구라도 그렇겠지.

'그래···'


이건 거절해야만 했다.

본능은 지금 몸 전체를 점령하고 있는 열기와 욱씬거림을 진정시킬  있는 유일한 방법이 유한과 섹스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본능보다는 이성을 따를 때였다.

'일단 거절하고···'

유한과 다시금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


오늘 유한이 이쪽을 상대로 한 행동들은 하나같이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으니까.


시청자나 촬영현장을 돌아다니는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아서 망정이지 만약에 오늘 한 짓들 중에 하나라도 들켰다면?

그대로 둘다 파멸하게 되었겠지.

애초에 자신이 유한이 말하는대로 따를 수밖에 없게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면 그런 일만큼은 있어선 안 됐다.


설령 유한이··· 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같더라도 그 부분만큼은 절대 용납할  없었다.


문제는 남자면서 먼저 그런 말까지 꺼낼 정도로 완전히 결심을 굳혀버린 듯한 유한을 무사히 설득할 수 있을까인데···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하는 것보다는 만나서 대화라도 나눠보는 것이 좋겠지.

어찌어찌 생각을 정리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일까.

뜨끈뜨끈하던 머릿속으로 이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줄기 빛이 드리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시 신세를 지고 있던 대기실을 몰래 빠져나와 유한이 말한 장소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장소가 하필이면 남자 화장실이기 때문일까.


그곳을 목적지로 삼아서 걸음을 옮기고 있으려니 뭔가  기분이 요상했다.

허나 꾹 참고서 계속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는데ㅡ

'응···?'

정작 마주하게  풍경은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만나기로 한 장소로 통하는 입구에 뭔가가 덕지덕지 붙어있었으니까.


-수리중.


노란색 글자로 그렇게 적혀있는 종이는 덤이었다.

수리중이라니.

원래 이랬었나?

유한 때문에 여자 화장실은 몇 번 들려본 적 있긴 하지만 이쪽까지 오는  처음이다보니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 부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수리중이면 유한은 어디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설마 아까처럼 비상 계단에 숨어있기라도 한 걸까.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비상 계단 쪽으로 끌려가 유한과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금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정답이 아닌 듯 했다.

그랬다면 그때 그랬던 것처럼 이쪽이 그 앞을 지나치길 기다리고 있다가 그쪽으로 끌어들였을테니까.


그럼 대체 어딜 간 걸까.

혹시 수리중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뭔가 좀 아니다 싶어서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을텐데··· 정말로 그런 거라면 솔직히 조금은 아쉽긴 하겠지만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할 자신이 있었다.

'연락이라도 해봐야 되나···?'


그리 고민하며 화장실 쪽에서 몸을 돌려 일단  앞을 떠나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끄으으···


아무래도 여자가 남자 화장실 앞에서 얼쩡거리는 건 오해받기 딱 좋은 모습이다보니까 최대한 빨리 그 앞을 뜨려고 했는데 다름아닌 그 순간 이질적인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니까··· 누군가 용을 쓰는 듯한 그런 소리라고 해야할까.


그리고  소리는 다름아닌 남자 화장실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걸까.


정말로 수리중이라면 안에 아무도 없어야 정상일텐데 방금 그 소리는 대체 뭐고.

끄윽···

소리의 출처가 다름아닌 유한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건 속으로 그런 의문을 곱씹고 있던 와중이었다.

'설마···'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낼 리 없는 소리인만큼 다른 것들보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상상이 앞섰고,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어간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러길 잘했다는 것이었다.

화장실 칸 안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던 유한은 누군지 모를 년에 의해서 벽까지 몰려 있었다.

벽까지 몰린 채··· 누가봐도 얼굴을 노리고 있다는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그쪽을 향하고 있는 칼을 안간힘을 다해 막아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겁이 났다.


그야말로 생각치도 못했던 상황이기도 했고, 커터칼이라고는 하지만 날이 상당히 굵었으니까.


그럼에도 어느새 누군지 모를 년을 향해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그렇게 유한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던 년과 화장실 바닥을 구르게 된 순간ㅡ

'윽···!'

세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끔찍한 고통과 함께 의식이 그대로 툭 끊어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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