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6화 〉1부 (226/315)



〈 226화 〉1부

유한과 세나가 화장실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둘의 부재로 인해 현장에서는 약간의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허나 그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원래 둘과 함께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둘이 아무 이유 없이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어쩔  없이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는 점을 빠르게 스태프 측에 전파했을 뿐더러 오늘 공식방송의 진행을 맡기기 위해 플랫폼 측에서 섭외해온 이는 대회만 열렸다 하면 얼굴을 내비치곤 하는 프로 중의 프로였으니까.

"자! 그럼 대망의 9번째 참가자 분들을 무대 위로 모셔··· 볼! 차례였습니다만은 아무래도 긴장을 좀 하신 건지 토일렛 이슈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기존에 전달받았던 것과는 상황이 좀 달라졌음을 전해들은 캐스터는 자연스럽게 시간벌기 모드로 들어갔고,  전환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기에 대낮부터 방송을 켜놓고 있던 시청자들은 다들 웃어넘기기 바빴다.

[아 ㅋㅋㅋ 토일렛 이슈는 어쩔 수 없지~]

[뜻밖의 송캐쑈 on]

[중계할 때는 양 옆에 해설들이라도 있었지 오늘은 혼자라서 더 빡세보이누 ㅋㅋ]

[그나저나 아홉 번째팀 ㄴㄱ임?]

[세세듀오 아님?]

[세세 듀오가 뭔데 씹덕아;;]

[세나련 동생이랑 같이 나온다고 긴장했나 보네 ㅋㅋ]

[근데 솔직히 긴장할만함 ㅋㅋ]

[ㄹㅇ 맨날 우승할 거라고 입 턴 게 있는데~]

[다섯글자로 웃겨드리겠습니다 목.표.는.우.승]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승이 아니라 웃음이겠지~]

[우승후보는 모르겠고 웃음후보는 ㅇㅈ]

시청자들이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사이,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둥 눈에 띌만한 부분들을 수습하는데 성공한 세나가 통로 쪽에서 호다닥 달려나왔다.

"아, 드디어 오셨네요! 화장실에서부터 엄청 뛰어오셨나 봅니다! 얼굴이 아주 그냥 새빨가시거든요?"

"죄송합니다아아···!"

문제가 있다면 스태프들이 걸레로 박박 문질러서 닦아놓은 탓에 무대 바닥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미끄러웠다는 것 정도?

그래서 캐스터와 무대 위를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번갈아가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가며 빠르게 본인의 자리를 찾아 움직이던 세나가 어느 순간 균형을 잃고 뒤로 쭉 미끄러졌다.

"어어···!"

자칫 잘못하면 시작부터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

그에 세나가 자리를 잡고 서면 바로 조리돌림을 할 생각을 하고 있던 캐스터도 일찌감치 무대 위에 자리를 잡고 서 있던 다른 스트리머들도 다들 경악으로 눈을 크게 흡  순간 팔을 허우적대며 뒤로 넘어가던 세나의 몸을 뒤에서부터 따라오고 있던 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

"진짜··· 뭐하는 거야 누나."

 누군가란 다름아닌 유한이었다.

그런 유한의 활약 덕분에 오프닝은 무사히 끝이 났고, 시작을 알리는 캐스터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본격적인 방송이 시작되었다.

"흠, 이거 정말 나오는  맞긴 맞아?"

"그렇다던데···?"

"채팅창을  수가 없으니까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네."

스태프 중에 한 명이 이걸로 찍고 다니면 된다고 쥐어주고  액션캠이라 부르는 물건을 손에 쥔채 그 앞에서 고개를 요리조리 슉슉 움직여대고 있으니 옆에  있던 세나가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보였다.

"님들? 잘 보여요?"

"정 그렇게 궁금하면 그냥 휴대폰 꺼내서 채팅창만 띄워놓으면 되잖아."

"아."

역시 방송천재야.

똑똑하구만.

세나가 말한대로 휴대폰을 꺼내서 채팅창을 띄워놓으니 그제서야 좀 답답했던 게 풀리는  같았다.

그래, 역시 인방은 이래야지.

내가 채팅창을 확인하기만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쭈르륵 올라와서 날 반겨주는 채팅들을 눈으로 훑다가 세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작전대로 가는 거지?"

"어··· 뭐··· 일단은 그렇게 해야겠지···?"

갑자기 적극적으로 공방에 임하려는 내 꿍꿍이 속을 알 수가 없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화장실에서 했던 키스와 거기에 곁들여졌던 말의 여운이 아직도 그녀의 안에 남아있기 때문일까.

무슨 일이 있어도  우승해야 된다면서 전의를 불태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영 맥아리가 없어보이는 세나를 뒤로 한채 일단 그녀와 찢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게 우리의 작전이었으니까.

대난투라는 프로그램 명에 걸맞게 참가자가 무려 48명이나 되는 이 공식방송을 위해 플랫폼 측에서는 정말로 별의 별 종목을 다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개중에는 누가 더 빨리 깨냐를 경쟁하는 방식도 있었고, 누가 더 많이 이기냐를 경쟁하는 종목도 있었다.

또 괜히 팀을 짜서 참가하라고 요구한 게 아님을 증명하듯 팀으로 하는 게임도 있었고.

특히 팀으로 하는 게임 중에는 참가자들이 다같이 모여서 하는 것들도  개 있는데 그게 다른 종목보다 점수가 좀 쎘다.

그래서 그게 시작되기 전까지는 같이 뭉쳐다니기 보다는 개인플레이 위주로 하면서 최대한 점수를 쌓아두자는 것이 기존에 세나가 작전이랍시고 주장한 것이었다.

"뭐가 좋으려나아···"

어떤 종목이 시간대비 효율이 괜찮을까.

내가 그런 고민을 하며 체육관 안을 뽈뽈 돌아다니고 있는 와중에도 체육관 곳곳에서는 벌써부터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버린 이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세오님도 빨리 하나 잡고 달리셔야 되는 거 아님?]

[ㄹㅇ 이러다가 꼴찌할듯 ㅋㅋ]

[아 ㅋㅋ 전력 파악 중이라고요 재촉 ㄴ]

"안 그래도 슬슬 하나 잡고 해보긴 해야되는데 뭐가 좋으려나요···"

[정 끌리는 거 없으면 가볍게 손풀기로다가 식칼피구 어떠심?]

[저 새끼 잡아!!]

[저저저 첩자련 저거저거]

[으딜 꽁승 쳐먹으려고!]

"식칼피구요?"

식칼피구라 함은 세나하고 꽤나 자주 연습했던 그걸 말하는 거겠지.

세나를 상대로 이겨본 적은 몇 번 없긴 하지만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니까.

'잘 피하고  맞추기만 하면 무조건 이긴다는 소리잖아?'

그래서 곧장 해당 종목을 플레이할  있는 곳으로 향하니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날아와 꽂히는 시선의 양이 갑자기 폭증했다.

"실물 미쳤다. 진짜로···"

"그러니까. 다 조명빨인줄 알았는데···"

이따금씩 들려오는 수근거림은 덤이었다.

뭐, 본인들 딴에는 작게 중얼거린만큼 시끌벅적하기 그지없는 주변 소음에 묻혀서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애석하게도 다 들리더라.

그래서 살짝이지만 민망하기도 했다.

덕분에 얼굴이 약간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해당 종목의 진행을 담당하고 있는 스태프에게 한 번 해볼  있냐고 물으니 살짝 멍한 얼굴을 한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성이 이내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앞에 먼저 하고 계신 분이 계셔서."

라는 말이 스태프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무섭게 부스 안쪽에서 아악하고 원통해하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 끝났나 보네요. 바로 하실 건가요?"

"네."

그렇게 일찌감치 빠져나간 누군가를 대신해 부스 안에 자리를 잡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시발?'

졸지에 내가 제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어쩐지 다들 도전은  하고 부스 주변에서 눈치만 보고 있더라니.

이래서 그랬던 거였구만.

상대방의 아이디를 확인하고는 흘깃하고 반대쪽 부스를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20대 후반 쯤 되어보이는 여성이 헤드셋을 푹 눌러쓴채 자신만만한 미소를 얼굴 위에 내걸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말해 무엇하랴.

그녀는 세나가 주의하라고 말한 이들  한 명이자 지금부터 우리가 플레이할 예정인 종목의 기반이 되는 게임의 프로게이머였던 이였다.

그것도 평범한 프로게이머가 아니라 세계대회에서 몇 번이나 우승한 전적이 있는 레전드급 전 프로게이머.

비록 지금은 은퇴한지 몇 년이나 되기도 했고, 중간에 군대까지 다녀온 바람에 예전만 못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걸로 알고 있기는 하지만ㅡ

'클래스가 있지.'

그 왜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러니 다들 몸을 사릴 수밖에.

'이거··· 이길 수 있으려나?'

솔직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우승을 원하는 세나를 위해서 특별히 할부의 호흡까지 남발해가며 상점의 힘을 풀로 빌려놓은 상태임에도 그랬다.

그래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쫄아가지고 빌빌대기는 또 싫더라.

날 보자마자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봐버린 탓에 더 그랬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하는 법이건만 사람이 되가지고 제대로 개무시를 당했는데 어떻게 발버둥이라도  쳐봐야하지 않겠는가.

해서 심호흡을 하고 있으니 곧 게임이 시작되었다.

주최 측에서 피구장이랍시고 정해준 곳은 다름아닌 게임 내에서 둥지라고 부르는 장소였다.

원래는 보라색 몸을 가진 거대뱀이 지키고 있어야할 장소에는 센터라인 역할을 대신해줄 시야확보용 토템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머리에 눌러쓰고 있던 헤드셋을 통해 스태프로 추정되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신호 드리면은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이라는 외침이 귓가로 울려퍼졌고, 치트키로 무장한 나와 레전드급 전프로 간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대결은 내가 보기에도 제법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진짜 더럽게 잘 하더라.

나야 눈에다가 동체시력을 높여주는 렌즈를 껴놓은 것도 있고 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저쪽은 대체 어떻게 이렇게 잘 피하고  맞추는 걸까.

그나마 우리 둘의 체력이 비슷한  상대가 남자라고 저쪽이 초반에  방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연히 이쪽의 일방적인 열세로 진행되었겠지.

 열받는  피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이쪽과는 달리 저쪽은 시간이 지날수록 여유 있어보이고 지금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쪽은 초조해서 죽을  같구만 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눈까지 반짝반짝 빛내면서 흥미로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여성을 보고 있으려니까 초조해지지 않을 수가 없더라.

그래서 그만··· 실수를 해버렸다.

"아."

덕분에 정신 차리고 보니 내가 조작하던 캐릭터 머리 위에 커다란 식칼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한 방으로 간당간당하던 체력바가 완전히 까맣게 물들었으니까.

"아! 제니아 참가자! 처음으로 10승을 기록합니다!"

"이야쓰!"

난 어디까지나 손이나 풀겸 겸사겸사 점수 좀 따면 좋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종목에 참가했던 것인데 몸을 너무 빡세게 풀어버린 것 같았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게임이 끝나고 나니까 눈쪽에서 아릿한 통증이 확 올라왔으니까.

잔뜩 힘을 주고 있었던 손쪽도 살짝 시큰거렸고.

'아이 씨···'

아까워 죽겠네.

저쪽이  더 방심해줬어도 어떻게 이길 수도 있었을  같은데.

이긴 것도 아니고 패배해버린 입장에서 언제까지고 부스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아쉬움을 뒤로한채 부스를 빠져나가니 그제서야 좀 깨달을 수 있었다.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뭔가  바뀌었다는 걸.

그 전까지는 그냥 얼굴만 잘생긴 이성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면 이제는 좀 이쪽을 경계하기 시작했다고 해야할까.

'이런···'

이걸 좋아해야할까 아니면 아쉬워해야할까.

둘 중에 어느 쪽이 정답인지  수가 없어서 쓴웃음만 짓고 있으려니 그새 10연승 달성기념 인터뷰를 끝내고 온 제니아란 여자가 날 향해 호다닥 달려왔다.

달려오더니ㅡ

"그, 세오님?"

"네?"

"혹시 렐 좋아하세요?"

뜬금없이 그렇게 묻더라.

그렇게 유한이 뜻밖의 질문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바로 그때 유한과 마찬가지로 몸이나 풀겸 가벼운 종목에 참가하고 있던 세나에게도 유한의 활약과 관련된 소식이 전해졌다.

[속보) 동생 분 제니아랑 막고라 중 ㄷㄷㄷ]

[???]

[갑자기 저게 머선 서리고]

[ㄱㄷ 가서 보고옴]

"···왜? 뭔 일있어?"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가 차례가 상대방에게 넘어간 틈을 타 뒤늦게 채팅을 확인한 세나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순간,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우르르 빠져나갔던 이들이 다시 복귀해 최근 소식을 채팅창 위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아니 ㅅㅂ 뭐임? 진짜로 제니아랑 비비는데?]

[피지컬 뭐야...]

[이 팀 진짜로 우승 가나?]

[팀 ㅅㅅ에 배팅 안한 블랙말랑카우 읍제?]

[혼성팀은 남자 쪽이 피지컬 딸려서 절대 우승  한다고 깝치던 분탕충 련들 컷!]

[팀 ㅅㅅ! 팀 ㅅㅅ! 팀 ㅅㅅ!  ㅅㅅ!]

[나는 무적이고  ㅅㅅ는 신이다...!]

[이것이 '진심'모드라는 것이다]

[누나를 우승시켜주기 위한 남동생의 혈투... 이건 참 귀하네요]

"걔가 뭘··· 어쨌다고? 누구랑 비벼? 내가 아는 그 제니아님?"

[ㅖ]

[ㅇㅇ]

[네 맞워요~]

[아 ㅋㅋㅋ 세나가 미드빵 괜히 진 게 아니었누 ㅋㅋㅋ]

[ㄹㅇ 전프로랑 피지컬로 비비는데 다딱이 주제에 오또케 이김 ㅋㅋㅋ]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제니아라는 사람이 현역시절에 보여준 포스를 기억하고 있는 만큼  그랬다.

[???: 자 이제 누가 에이스지?]

[아 ㅋㅋㅋ 에이스 뒤졌다고~]

[앗...]

[아아...]

[남자지만 전프로랑 비빔 vs 그냥 다딱이]

[그냥 다딱이라뇨;;]

[ㄹㅇ '리듬게임 개못하는'도 앞에 추가해야지]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수밖에는 없었다.

황급히 화장실을 빠져나와서 무대 위로 올라가기 전에 유한이 했던 말과 그 순간 이쪽을 향해서 지어보였던 표정을.

'꼭 우승하고 싶다고 그랬지 누나?'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그것이라면 어떻게든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듯한 그런 표정.

그런  얼굴 위에다가 띄워놓은 채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어보이던 유한의 모습을 떠올린 순간ㅡ

'···읏.'

세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제멋대로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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