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1부
웅웅웅웅ㅡ
손바닥 안에서 진동해대는 휴대폰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또렷했다.
어찌나 또렷한지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오며 심장이 아까하고는 다른 의미로 빠르게 뛰어댈 정도였다.
그리고 이 느낌을, 이 감각을 자신은 알고 있었다.
진동 자체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 특별한 느낌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 옛날 아직 자신이 꼬꼬마에 불과했던 시절에 성적표가 나오는 날마다 자신을 공포로 몰아넣곤 했던 것이 조금 다른 형태를 한채 몇 년만에 되살아나고 있었다.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엄청난 죄라도 저질러버린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어쩜 타이밍이 이리도 딱 맞아떨어지는지 누가보면 감시카메라라도 몰래 설치해놓고 감시라도 하고 있는 거라도 착각하기에 충분한 타이밍이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이건 그냥··· 타이밍이 재수없게 맞아떨어진 걸 거다.
틀림없이 한창 바쁘게 일하시다가 이제서야 아까 보내놓은 문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주신 거겠지.
"어··· 엄마? 왜?"
분명 그럴테지만 쓸데없이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어색한 목소리가 입밖으로 튀어나가는 것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역시나 유한의 상태가 걱정되서 전화를 하셨던 게 맞았던 모양이다.
바로 유한의 상태부터 물어보시는 걸 보면 틀림없이 그런 거겠지.
해서 나름대로 차분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물론, 죽하고 약을 사다줬다는 점도 빼놓지 않고 전했다.
엄마한테 잘했다고 칭찬을 받고 싶다거나 그래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그저 엄마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ㅡ그래? 휴우··· 우리 딸 다 컸네. 아픈 동생도 챙겨주고.
다행히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휴대폰 스피커에서 안도라는 감정이 듬뿍 담긴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약간의 칭찬은 덤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칭찬을 받고 있으려니 기분이 약간 묘했다.
유한을 상대로 이상한··· 생각을 해버린 전적이 있기에 더 그랬다.
"아니, 내가 뭐 앤가. 죽하고 약 좀 사다주는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래서 그만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느새 얼굴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 민망함과 멋쩍음을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ㅡ엄마 눈에는 지나도 그렇고 너나 유한이도 그렇고 아직도 애야. 엄마는 세나 네가 유한이 놀리고 괴롭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 걸.
"아니,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엄마를 상대할 때는 이게 문제였다.
이쪽의 흑역사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꿰뚫고 있다보니 가끔씩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불쑥 꺼내드시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낯부끄러워지곤 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저 말을 마냥 부정하기도 힘든 게ㅡ
'사실이긴 하니까···'
그랬다.
자신은 한때 유한을 놀리고 괴롭혔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10년도 더 된 일이긴 하지만 분명 그때는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유한을 질투했었으니까.
정확히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유한에게 엄마의 관심을, 내 자리를 빼앗기는 것 같아서 그걸 두려워 했었다.
열두 살이었던 자신이 보기에도 꼬꼬마 시절의 유한은 누군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사랑스러운 외모를 하고 있었으니까.
허구헌날 사고만 쳐대는 누구누구 씨하고는 다르게 얌전하고 조용조용하기도 했고.
물론, 그 얌전함과 조용조용함이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린 여파라는 걸 후에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지만··· 아무튼 뭐 당시에는 그랬다.
'하아···'
생각치도 못하게 과거의 흑역사와 마주하게 되니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뭣보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미칠 것 같았다.
동시에 유한에게 살짝이지만 미안함을 느꼈다.
워낙 옛날 일이다보니 어쩌면 유한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당시 자신이 유한에게 했던 행동들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ㅡ지나는?
"언니? 글쎄? 보니까 어디 나간 것 같던데?"
방 안에 있는 거라면 여태껏 이토록 조용할 리가 없으니까.
틀림없이 잠깐 어디 나간 거겠지.
최근들어 헬스 유투버들하고 이래저래 영상을 많이 찍고 다니는 것 같던데 오늘 소리소문없이 자리를 비운 것도 그 일환인 걸까.
ㅡ그래···? 으음···
"유한이 때문에 그런 거면 내가 가끔씩 올라가서 들여다 볼테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고."
난감함이 듬뿍 담긴 엄마의 목소리에 굳이 먼저 나서서 번거로운 일을 자처한 것도 다 유한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하루 정도는 뭐···'
-그래줄래? 엄마도 최대한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테니까···
"네네, 그렇다고 무리하지는 마시고."
그렇게 종료된 통화에서 한 말을 엄마는 착실하게 지켰다.
평소에는 열 시나 되어야 이제 슬슬 오시겠구나 할 정도로 밤 늦게 퇴근하시던 분이 무려 8시가 되기도 전에 돌아오셨으니까.
"왔어? 일찍 퇴근하셨네."
"응, 유한이는?"
"아까 올라가서 확인해보니까 자던데?"
"그래? 저녁 약은? 먹었대니?"
"아마 아직 안 먹었을 걸?"
"그래? 세나 너는?"
"엉? 나? 나야 멀쩡한데 약을 왜 먹어."
대체 그 말의 어디가 그렇게 웃긴 걸까.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채 쿡쿡 소리를 내며 엄마의 모습을 뚱하게 쳐다보고 있으려니 곧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약 말고 저녁 말이야. 먹었니?"
"아."
"아직 안 먹었지? 자."
틀림없이 유한의 것일 거라 생각했던 쇼핑백 중 하나가 스윽하고 내밀어졌다.
"이건 오늘 하루동안 아픈 동생 돌보느라고 고생한 우리 딸한테 엄마가 주는 상."
"아니 이런 거 필요없는데···"
라고 말하기 무섭게 뒤늦게 허기를 자각한 배가 눈치도 없이 꼬르륵하는 소리를 냈다.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이란 말인가.
"정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능청스레 웃는 엄마에게서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그, 일단 사온 정성이 있으니까···"
"그래, 특별히 세나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사왔으니까 식기 전에 먹고."
"네엡."
"엄마는 일단 유한이한테 가볼게."
"그러십셔."
그렇게 엄마가 자그마한 발소리를 사방으로 퍼뜨리며 유한의 방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고 난 후에야 건네받은 쇼핑백을 풀어헤쳤다.
쇼핑백 안에는 방송할 때 가끔씩 시켜먹곤 했던 수제버거 집의 간판메뉴와 튀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뜨거운 김을 흩뿌리는 감자튀김, 그리고 밀크쉐이크가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식사 후에 먹을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구비가 되어있었다.
그야말로 군침이 싸악하고 도는 조합에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며 그것들을 조심스레 챙겨서 방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방으로 기어들어간 세나가 방송 전에 빠르게 식사를 끝마치기 위해 쇼핑백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조심스레 풀어헤치기 시작했을 때, 막 유한의 방 안에 들어서는데 성공한 가영은 살짝이지만 기분이 묘한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침대 위에 누워있는 유한을 향해 나아갔다.
유한의 방이 이렇게 따로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한이 걱정돼서 평소 일을 끝마치는 시간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퇴근했기 때문일까.
단순히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연인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병문안이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 연인이라니···'
순간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당혹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어 머릿속에 눌러앉으려고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고는 조심스레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렇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에 의지해 곤히 잠들어있는 유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후훗···"
이마에 저건 세나가 사다가 붙여준 걸까.
빵긋 웃고 있는 곰돌이 무늬가 은근히 유한과 잘 어울렸다.
그래서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을 그토록 곤혹스럽게 만들던 '남자'와 지금 눈앞에서 세상 모르고 골아떨어져있는 유한이 동일인이라는 걸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잠들어있을 때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해올 때면 그 모습이 그렇게 요망할 수가 없었으니까.
특히나 남자답지 않게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적극적으로 허리를 흔들어가며 안쪽을 퍽퍽 찔러댈 때는 정말로ㅡ
"···읏!"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걱정은 못할 망정 아픈 아이를 두고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설마 자신이 이럴 줄은 몰랐기에 틀림없이 스스로 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걸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당혹스러웠다.
당혹스러워서 얼굴이 제멋대로 화악하고 달아오를 정도였다.
세나가 말하기를 약도 안 먹고 쭉 잤다고 했으니 퇴근하는 길에 사온 죽하고 약을 먹이려면 잠들어있는 유한을 깨워야만 하는데 선뜻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유한과 시선을 마주하게 되면 실시간으로 얼굴을 뜨겁게 만들고 있는 이 당혹감이 더 커질 것만 같았으니까.
"후우···"
몇 번이고 심호흡을 반복했던 것도 다 그래서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얼굴에 눌러앉은 열기가, 어느새 콩닥콩닥하고 야릇한 박자로 뛰어대기 시작한 심장이 진정이 되질 않을 것 같았으니까.
'진짜···'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진정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새삼 유한이 얄밉게 느껴졌다.
누군 자기 때문에 이렇게 당혹스러운데 그것도 모르고 저렇게 태연하게 잠이나 자고 있다니.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리고 다시는 느끼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것들을 되살려내버린 유한이 원망스러웠다.
원망스러운데··· 원망할 수가 없었다.
최근들어 유한을 볼 때마다 콩닥콩닥하고 야릇하게 뛰어대는 심장의 반응이 꼭 유한의 탓만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 결국··· 가장 큰 죄를 저지른 건 자신이다.
자신이 유한의 공세에도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마음을 지켰다면, 그랬다면 일이 이렇게 되는 일도, 유한을 볼 때마다 심장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빠르고 야릇하게 뛰는 일도 없었을테니까.
그러니 이건 자신이 잘못한 게 맞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가, 진심으로 아들처럼 여기고 아꼈던 아이가 그토록 간절하게 자신의 마음을 부딪혀오는데, 몇 번이나 거절해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한다 속삭여오는데 그런 걸 앞에 두고 대체 누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곰돌이 무늬가 새겨진 시트로 덮여있는 유한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들기는 것뿐이었다.
"으음···"
손가락이 이마를 톡톡 두들기는 느낌이 거슬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뭔가 먹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열심히 우물우물거리면서 미간에 힘을 팍 줘서 눈썹을 부르르 떨어대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자신은 이미 중증인듯 했다.
이런 주제에 그렇게 아니라며 부정이나 해대다니.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말 그대로 어린아이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그런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유한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욱씬거렸다.
'정말···'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그리 되뇌인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건 언젠가 관계 중에 유한이 속삭이듯 내뱉었던 말이었다.
-앞으로는··· 제가 고모를 책임지고 싶어요.
책임이라는 건 보통 여자의 몫인데도 유한은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고모가, 믿어도 될까?"
확신할 수가 없었다.
확신할 수가 없어서 곤히 잠든 유한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 것또한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고모를 책임져 줄거야?"
그렇게 깨어있는 유한을 상대로는 절대 던질 수 없는 물음을 입에 담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잠든 아이를 상대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비겁하고 어이가 없는 행동이라서 내심 피식 웃고 있으려니ㅡ
"네."
들릴 리 없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책임질게요."
어느새 뻗어온 유한의 손이 오똑한 코 위에다가 슬며시 얹어놓았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평생."
유한의 손에 이끌려 입이 있는 곳까지 내려간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고 말캉한 것이 '쪽···♡'하는 소리를 내며 사랑스럽게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