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1부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긴 했다.
전과 달라진 점이라고 해봐야 유한을 바라보는 관점 하나뿐인데 그럼에도 아예 새로운 세상에 떨어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그만큼 많은 것들이 새로웠다.
지금도 그랬다.
만약 유한을 마냥 동생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때 방금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틀림없이 어색해했을 것이다.
동시에 직원의 눈썰미없음을 탓하며 유한을 데리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겠지.
헌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살짝 부끄럽긴 한데 그것 이상으로 기뻤다.
신혼부부라니.
그만큼 잘 어울린단 소리겠지.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질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분이 두둥실 떠오르는 듯 했다.
표정을 살짝 찡그린 것과는 별개로 직원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던 건 그래서였다.
그러면서 은근히 유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만큼 궁금했으니까.
난 방금 그 말을 듣고 이렇게 기쁜데 유한은 어떨까.
그렇게 유한을 향해 시선을 던진 순간 눈으로 들어온 건 부끄럽기라도 한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유한의 모습이었다.
부끄러워하는 유한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 속에 맺혀있던 응어리같은 게 사르륵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입꼬리가 근질근질했다.
안절부절 못하던 유한이 슬그머니 옷깃을 잡아당기기 시작한 건 그 와중이었다.
어떻게 좀 해달라는 걸까.
"크흠, 아닌데요."
"네?"
"그, 부부 아니라고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분명 그렇게 될테니 까짓거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아, 앗, 그러시구나."
어째 하고 있는 표정부터 묘하게 어색하더라니 아무래도 이런 일이 익숙치 않은 사람인 듯 했다.
예상이 빗나간 게 그리도 민망한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채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데 그 탓에 분위기만 어색해져버렸다.
유한과 그런 관계로 봐준 건 고맙긴 하지만 굳이 그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계속 서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유한을 데리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 그래도 한 번 들어오셔서 둘러보고 가시는 건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파는 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번 특별기획 상품이 정말 괜찮거든요."
"관심없다니까요."
"저, 정말 괜찮은데··· 특히 남녀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주는데 탁월한 효능이···"
이쯤되면 다른 손님한테나 가볼 것이지 자꾸만 끈질기게 따라붙길래 한 마디 쏘아붙이려고 했더니 쉬이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직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남녀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물건이라니.
그게 뭘까.
갑자기 미친듯이 궁금해졌지만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을 꾹 내리누르며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됐다니까요."
그리고는 유한을 데리고 카트들이 쭈르륵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마트 안으로 들어왔건만 한 번 불이 붙은 호기심은 쉬이 가라앉질 않았다.
뭘까.
대체 뭐길래 남녀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준다는 걸까.
높은 확률로 선전용 문구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긴 했지만, 그럼에도 호기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ㅡ
"그, 유한아."
"응?"
"누나 잠깐 화장실 좀."
"응?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까?"
"아냐, 살 거 마저 사고 있어."
화장실 핑계를 대며 잠시 마트를 빠져나왔다.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그냥··· 뭘 팔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다시 들어갈 생각이었으니까.
헌데 이게 왠걸?
몇 분이나 지났다고 천막 앞이 사람들로 북적북적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같이 전부 여자였다.
남자들도 관심이 있기는 한 건지 열심히 힐끔대고 있긴 했지만 여자들이 득실거려서 그런지 몰라도 쉬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쯤되니 더 궁금해졌다.
대체 뭐길래 그 잠깐 사이에 이리도 사람이 몰렸나 싶었으니까.
'유한이가 기다릴텐데···'
그래서 다가가는게 망설여졌지만 그렇다고 돌아가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왠지 모르게 저걸 놓치면 안 될 것만 같았으니까.
마치 티비채널을 돌리다가 우연찮게 홈쇼핑 채널이 얻어걸렸는데 때마침 쇼호스트의 입에서 마감 임박이라는 멘트가 흘러나온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일단 줄부터 섰다.
딱 10분만에 간신히 천막 안으로 입성하는데 성공한 순간 마주치게된 건 아까 매몰차게 떨쳐냈던 그 직원이었다.
"어···!"
"그, 흠, 뭐 파는지 궁금해서요."
그리 말하기 무섭게 직원의 얼굴 위로 알만하다는 미소가 떠올랐지만, 애써 외면하며 들려오는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천막 안에서 팔고 있는 것은 흔하디 흔한 건강보조식품이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사람이 몰린 건···
"남자친구 분이, 남편 분이 너무 빨라서 고민들 많으시죠? 이거 사다가 꾸준하게 먹게 해보세요. 그럼 아주 그냥···"
"그냥?"
"어우, 낯부끄러워서 말을 못하겠네."
"그, 뭐로 만든 건데요?"
"복분자 아시죠? 복분자? 복분자가 남자한테 그렇게 좋다는데 이건 무려 복분자 원액을 농축시켜서 만든 거거든요."
옆에 누군가 있는 여자라면 쉬이 지나칠 수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아연도 들어가서 이것만 먹으면 아주 그냥··· 한 번에 안이 가득 차!"
"에이, 말이 되나."
"아니, 하나 사가서 꾸준하게 드시게 해보시라니까요? 저 거짓말같은 거 안합니다. 그리고 이건 심지어 맛도 좋아요. "
"흠흠, 그래요?"
"내가 먹어봤는데 완전 주스같더라고. 에이, 아니다! 이럴 게 아니고 지금 하나씩 나눠드릴테니까 한 번 드셔보셔요!"
"남자한테 좋은 거라면서요? 여자가 먹는다고 뭔 일 있겠어?"
"에이, 남자한테 특히 좋다는 거지 여자한테도 당연히 좋죠. 언니."
즉흥적으로 결정한 척 하더니만 미리 준비해뒀던 걸까.
아까 천막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아는 척을 해왔던 직원이 빠알간 액체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컵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커다란 쟁반 하나를 들고 등장했다.
어찌어찌 하나 건네받아서 먹어봤다.
다른 건 어떨지 모르겠지만 주스같다는 말은 일단 거짓이 아닌 듯 했다.
살짝 새콤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났으니까. 향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어때요? 괜찮죠? 집에 사다놓고 쥬스 대용으로 하루에 하나씩 꾸준하게 드시게 해봐. 그럼 밤에 아주 그냥···"
"밤에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기는 행복해지죠."
···하나만, 아니 딱 두 박스만 사기로 했다.
절대 직원의 말에 혹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듯한 달큰한 맛이 마음에 들어선 그런 것 뿐이었다.
'겸사겸사 유한이도 좀 나눠주고···'
개인지도실에 나뒀다가 운동하다가 목마르다고 하면 하나씩 찔러주면 좋아라하고 마시지 않을까.
맛도 딱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맛이니까.
"그, 두 박스만 사려고 하는데요."
"아, 네네."
"···혹시 배달도 가능한가요?"
솔직히 직접 들고가긴 좀 그랬다.
화장실 좀 갔다오겠다고 하고 빠져나온 건데 그래놓고서 건강식품을 두 박스나 들고 등장하자니 좀 그랬으니까.
"물론입니다. 고객님. 여기에다가 받으실 주소좀 적어주시겠어요?"
"아, 네. 그리고 계산은 이걸로 해주세요."
주소는 체육관으로 적었다.
그리고는 깔끔하게 계산까지 끝마친 뒤 다시 마트 안으로 들어가 유한을 찾기 시작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한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유한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온 순간 살짝이지만 기대감으로 들떴던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착 가라앉았다.
'저건···'
또 뭐하는 년일까.
대체 뭐하는 년이길래 유한이 옆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걸까.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력이 엄청 안 좋은 건 확실해보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유한이 난처해하고 있다는게 한눈에 확 보이는데 계속 곁을 얼쩡거릴 이유가 없으니까.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눈이 좋은데도 저러고 있는 거라면 진짜로 안 좋게 만들어주면 그만이니까.
이가 욱씬거릴 정도로 힘이 바짝 들어간 턱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뺄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서 유한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다보니 둘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고 있는지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정말 안 될까요? 정말 제 취향이셔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더 이가 갈렸다.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물론,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이상한 걸 사겠다고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어도 유한이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건지 알 수 없는 년한테 사과를 할 일도 없었을테니까.
그러니 지금이라도 만회해야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둘 사이로 끼어들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한을 확 잡아당겨 품에 안았던 건 그래서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걸까.
맞닿은 부분을 통해 움찔하는 떨림이 전해져왔다.
그게 유한의 것인지 아니면 내 것인지 솔직히 구분이 되질 않았다.
쿵···! 쿵···!
그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만큼 당혹스러웠고.
유한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던 건 이것만큼 특효약도 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늘 하던대로 했던 것 뿐인데··· 느낌이 전하고 많이 달랐다.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달랐다.
분명 옷을 입고 있는데도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유한으로부터 비롯된 감촉들이 선명하게 전해져왔다.
"ㅡ이 여자는 또 뭐고."
덕분에 뒤에 올 말을 내뱉는 게 살짝 늦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허용범위 내였다.
당황한 건 유한을 곤란하게 하고 있던 년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으니까.
한창 치근거리고 있던 와중에 여자친구로 보이는 이가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것일까.
당황이라는 걸 한웅큼 집어먹은채 어색하게 굳어있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보란듯이 내뱉었다.
"자기야? 말 좀 해봐."
분명··· 유한에게 치근덕대는 년이 있을 때마다 했던 행동인데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서 얼굴이 자꾸만 뜨거워지려고 했다.
그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그럼에도 눈에 힘을 풀지 않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여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렇게 지나가 감히 제 것을 탐한 어중이떠중이를 죽일 듯 위협하고 있을 때 유한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다짜고짜 홱 끌어안길래 갑자기 얘가 왜 이러나 싶어서 당황하고 있었더니만 이걸 이런 식으로 푼다고?
'이야···'
솔직히 말하면 고민이 컸다.
눈앞에 차려진 상이 너무나도 호화스러워서 뭐부터 집어먹으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뭐부터 먹는 게 좋을까.
여기서 내가 뭘 골라야 지나로부터 가장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색하게 허공을 더듬어대고 있던 손을 움직여 지나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지나는 내가 자길 마주 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모양이다.
지나의 허리를 팔 안에다가 가두기 무섭게 탄탄하면서도 잘록한 허리가 흠칫하고 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연스레 지나의 가슴에다가 얼굴을 파묻었다.
뭉클한 감촉이 볼을 꾸욱하고 눌러왔다.
그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감각을 만끽하면서 그대로 고개만 살짝 들어올려서ㅡ
"뭐야 여보였어? 갑자기 누가 홱 잡아당기길래 깜짝 놀랐잖아."
지나의 얼굴을 똑바로 울려다보며 그녀를 향해 배시시 웃어보였다.
물론,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입꼬리가 말려올라가는 느낌과 함께 날 내려다보고 있던 지나의 눈동자가 덜컥하고 흔들렸으니까.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뇌정지라도 왔는지 지나는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으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가자. 아직 살 거 엄청 많아."
그래도 반응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허리를 꼬옥하고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며 몸을 떨어뜨리기 무섭게 굳어있던 지나의 입술 사이에서 '아···'하고 아쉬움이 듬뿍 담긴 탄식이 작게나마 새어나왔으니까.
가만히 두면 언제까지고 이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것 같아서 그런 지나를 데리고 비교적 사람이 적은 마트 구석으로 향했다.
시도하기 전까지 솔직히 가능할까 싶긴 했는데 진짜 부부라도 된 것처럼 손을 잡아주니까 잡아당기는대로 잘 따라와주긴 하더라.
그렇게 마트 구석에 도착한 순간, 꼭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으며 지나 쪽으로 돌아섰다.
떨어져나간 손이 그리도 아쉬웠던 것일까.
지나는 바로 조금 전까지 내 손과 곱게 포개져있던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때? 누나?"
"어···?"
"방금 내 연기 어땠냐고."
"···아."
"괜찮지 않았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좀 정신이 들었던 것일까.
"ㅡ응, 그러네."
대답하는 게 좀 늦긴 했지만 그래도 대답을 하긴 하더라.
"그치? 이 정도면 아까 그 여자도 분명 깜빡 속았을 거야."
히죽 웃으며 그리 말하고는 그대로 지나로부터 돌아섰다.
"그럼 남은 것들만 후딱 사고 얼른 집에 가자."
그리고는 그대로 마트 탐방을 재개했지만··· 툭툭 한 마디씩 내뱉곤 했던 전과는 다르게 지나는 유독 말이 없었다.
그저 내가 움켜쥐었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할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