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3화 〉1부 (123/315)



〈 123화 〉1부
'도시락 하나에 십 만원···'


솔직히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긴 했다. 고작 도시락 하나 더 싸는 대가로는 말이다.

안 그래도 도시락 재료 산다고 매일같이 돈이 빠져나가는 판국이다.

헌데 그 돈이면 나날이 적자만 기록하던 '유한이네 도시락'이 모처럼 흑자전환을 하고도 남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메뉴도 잔뜩 넣을 수 있을 것이고.


뭐, 하연이 집밥 느낌이 나는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했던 걸 떠올려보면 너무 호화스러운 메뉴는 그녀의 의도와 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솔직히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진짜로 집밥 느낌이 나는 것이 먹고 싶었던 거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큰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것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돈만 써도 얼마든지  욕구를 채우는 게 가능했을테니까.

서울에 음식점만  갠데 그 중에 집밥 느낌이 나는 백반집 하나가 없겠는가.

그러니 그건 그냥 핑계에 불과했다.


하연이 한 번에 십 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까지 걸어가며 내게 그런 제안을 했던  어디까지나 그 핑계로 내게 비빌 수 있을만한 구석을 만들어내기 위함이겠지.


겸사겸사 불쌍한 면모를 부각시켜서 내게 부성애같은 것도 자극하고 말이다.

애초에 이쪽은 하연이 무슨 짓을 하든 넘어가줄 생각이 없는만큼 받아도 아무 상관없다는 입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낼름하고 받아주자니 가영이 마음에 걸렸다.


'틀림없이 질투할텐데···'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긴 했지만, 안 그래도 자꾸만 내게 치근덕대는 하연을 눈에 거슬려하는 가영이다.

헌데 내가 대가성이라고는 하지만 오직 가영에게만 만들어주었던 도시락을 하연에게도 내민다?

그래버리면 단순히 질투하는 수준을 넘어 그 이상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마음이 팍 상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미용실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받을지 말지를 두고 망설였던 건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가영의 질투를 자극하는  좋지만 정도 이상으로 자극해버리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게 뻔하니까.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미용실 안으로 들어섰는데···

"유한 씨? 혹시 원장님 못 봤어요?"

대뜸 그런 질문이 날아들었다.


"···네?"

가영을 못 봤냐니.

가영이야 당연히 원장실에 있지 않겠는가.

대충 그런 느낌으로 질문을 던져온 이에게 보란듯이 원장실 쪽을 향해 힐끔하고 시선을 던지니 가슴팍에 박소영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던 직원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장실에 안 계셔서요."


그건  뭔 소리람.


원장실에 있던 거 아니었나?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선 하연이 나와 소영 사이로 끼어들었다.

"원장쌤이요? 아까 화장실 간다고 나가셨는데요?"

"아까요? 아까 언제요?"


"어··· 나가신지 꽤 됐을걸요?"

그렇다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제가  번 가볼게요."


뭔가 심상찮은 느낌에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것도 잠시, 그리 말하고는 그대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자기가 대신 가보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방금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그러다보니 볼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창백한 얼굴을 한채 벽에 머리를 기대고 서 있는 가영의 모습을 말이다.

"고모···?"


혹시  체라도 한 걸까?

아니면 도시락 안에 있던  쉬었다던지···

기본적으로 피부가 하얀 편인 가영이지만 지금은 걱정이  될래야 안  수가 없을 정도로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봤더니 흐릿하게 물들어있던 가영의 눈동자 속으로 초점이 돌아왔다.

"괜찮으세요? 얼굴이···"

"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탄식인지 뭔지 모를 것을 내뱉던 것도 잠시, 가영이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는 척 고개를 살짝 숙였다.

누가봐도 내게서 얼굴을 숨기기 위한 몸짓이었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 해주기로 했다.

"그··· 혹시 체하거나 그러신 건 아니죠···?"


조심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를 유지한채 가영을 향해 성큼 다가섰다.

헌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평소였다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도 남았을 가영이 어쩐 일인지 반응이 없었다.

혹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탓에 내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내가 그쪽으로 성큼 다가선 순간 가영의 몸이 움찔하고 떨리며 반응을 보였으니까.


그럼 대체 뭘까.

대체  때문에 평소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걸까.

"자, 잠시 손 좀 잡을게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꼬옥하고 쥐어져있던 가영의 왼손을 양손으로 꼬옥하고 잡고는 그대로 내쪽으로 잡아당겼다.

약지에 보란듯이 자리하고 있는 낡은 반지가 시각적으로도 촉각적으로도 거슬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걸 신경  때가 아닌 것 같아 일단은 무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껏 잡은 가영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니까.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요 며칠동안 너무 괴롭혔나?


그래서 이러는 건···


마음 속으로나마 최근 며칠 동안의 했던 행동들을 반성하며 허둥지둥 가영을 향해 걱정을 내비쳤다.


이번만큼은 연기가 아니고 진심이었다.

"진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손이 너무 차가운데···"

그리 말하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어떻게든 따뜻하게 만들어보겠다는 것처럼 움켜쥐고 있던 손을 움직여 가영의 손을 주무르기 시작하니 그제서야 가영에게서 평소같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내게 잡혀있던 손을 움찔하고  가영이 그것을 황급히 뒤로 뺐다.

"그, 그냥··· 생각  할게 있어가지고···"

"정말요? 그럼 손은 왜···"

"이, 이건 그냥··· 찬물로 씻은  얼마  되서 그런  뿐이니까···"

그리 말한 가영이 몸에 걸치고 있던 미용 앞치마를 손가락으로 꼬옥하고 움켜쥐었다.


그와 함께 우리  사이로 내려앉은 건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었다.

'뭐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입술을 슬쩍 깨물고 있는 가영의 모습은 분명 평소 보여주던 것하고 크게 다를 게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평소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속으로나마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려니···


"그, 유한아."

놀랍게도 가영이 먼저 우리 둘 사이로 내려앉아있던 침묵을 깨뜨렸다.

"···네?"


"그··· 도시락 있잖니."


"도시락이요?"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걸까.

설마 진짜 쉬기라도 했나?

아무리 그래도 만든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게 벌써 쉬고 그랬겠냐만은 차마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긴 했다.

집도 그렇고 미용실도 그렇고 온도가 기본적으로 따땃한 편이었으니까.

라는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는 걸 가영이 몸소 내게 알려주었으니까.

"그, 이제··· 그, 그만 만들어오는 게 어떨까···?"


이렇게 갑자기?

"왜요?"


"그··· 유, 유한이 너도 힘들고···"

"전 정말 괜찮다니까요."

"내, 냄새도 신경쓰이고···"


"그럼 앞으로는 최대한 냄새 안 나는 것들로만 채울게요."


"그··· 아, 아무튼 이제 그만··· 그만 만들어 왔으면 좋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가영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이미 우리 둘 사이에서 도시락과 관련해서 무언의 합의가 끝난 상태라 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도시락을 핑계로 가영과 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하는  가영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묵인해주는 식으로 말이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둘이서 같이  먹어놓고서는 이제와서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뭘까.

"···제가 도시락 그만 싸온다고 치면 그럼 앞으로 점심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 그야···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밖에 나가서 사먹으면···"

"바빠서  사먹을 시간도 없으시잖아요."


그리 말하고는 눈을 가늘게 뜬채 가영을 바라보니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고개를 스르륵 옆으로 돌렸다.


평소하던 것하고 똑같은 모습인데도 평소같지 않은 건 그또한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하긴 힘들지만 느낌이 그랬다.

뭔가 약간 떳떳치 못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마치 날 상대로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이유가 있나?'


굳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연신 고개만 갸우뚱하고 있으려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건ㅡ

'설마···'

어떤 가능성이었다.


'···들었나?'


아까 내가 하연과 했던 대화를?

참으로 애석하게도 가능성은 충분했다.


나야 하연이 사람 없는 곳으로 가자길래 그런 그녀를 따라서 움직인 것뿐이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아까 하연하고 대화를 나눴던 장소에서 모퉁이만 돌면 나오는 게 화장실이었으니까.

만약 가영이  모퉁이 너머에서 나와 하연의 대화를 들은 거라면?

'시발···'


그런 식으로 가정하니 가영이 보여주는 평소같음에도 평소같지 않은 행동들도 얼추 설명이 가능했다.


그야 당연히 느낌이 다를 수밖에.

하연을 상대로 질투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무지하게 걸릴테니 말이다.


허나 그딴 것들보다 자신의 몸매하고 가영의 몸매를 동일선상에 놓고 누가 더 괜찮냐고 묻던 하연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신경이 쓰였다.

이래서야 당분간 유지하려 했던 가영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태도에 차질이 생기게 생겼으니까.

여자라고는 가영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놓고서는 다른 여자의 몸매에 한눈을 파는 꼴이라니.


이러다가 기껏 힘들게 쌓아놓은게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건 아닐까 싶어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속으로나마 한숨을 내쉬며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가영의 태도를 보니 그래도 아직은 만회할 기회가 남아있는 듯 했으니까.


문제는 어떤 식으로 그걸 만회하냐는 건데···


일단 그때 내가 답하길 망설였던 건 가영의 몸매가 하연보다 딸려서 그랬던 게 절대 아니었다.

가영의 몸매가 어디가서 딸리고 그럴 몸매인가.


그저 그만큼 하연이 던진 질문이 난제였을 뿐이다.

슬랜더하고 육덕 중에 한쪽을 고르라는데 남자가 되서 어찌 망설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때만큼은 정말 황희 아저씨가 어떤 심정으로 니 말도 옳고  말도 옳다고 했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딴  아니라 당장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두 가지 대응법 중에 어느 쪽을 택하냐는 것이었다.


우선 1안은 가영이 하연과 내가 나누었던 대화를 모퉁이 뒤에서 엿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척하며 허둥지둥 변명하는 거다.

그러면서 바람피다가 걸린 것마냥 가영에게 매달려 쩔쩔 매는 척까지 해주면 그야말로 완벽하겠지.


그에 비해 2안은 일단은 모르는 척 해주고 도시락 건을 포기한 대가로 가영에게 뭔가를 받아내는 건데···

"그러면 이렇게 해요."

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고모가 그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신다면 도시락은··· 이제 그만 싸올게요."


그리 말한 순간 가영이 보여준 반응은 참으로 귀여웠다.

역시나 하연을 질투해서  말을 꺼냈던 게 맞았는지 입꼬리를 순간 움찔하고 떠는데 뒤늦게 본인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걸 자각하고서는 뺨을 빨갛게 물들이더라.

"대신···"


"대신···?"

"···점심시간동안 저 데리고 다니면서 맛있는 거 사주세요. 물론 고모랑 저 둘이서만요."

"으, 응···? 그, 그건···"

"설마 그것도 안 된다고 하시는 건 아니죠? 그러면 저 그냥 고모따라서 점심 굶어버릴 거예요."


그리 말하고는 괜히 민망한 척 하며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가까운 곳에서 꼴깍하고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아, 알겠어."

가영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죠? 약속하신 거예요? 나중에 혹시 딴말을 한다거나 그러시면···"


"고, 고모 안 그래···"

"그럼 이거까지 해주세요."


그리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슬쩍 내밀어보이니 다 커서 그런 식으로 약속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민망하기라도 했는지 가영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슬그머니 손가락을 걸어왔다.

그렇게 손가락까지 꼭꼭 걸고 약속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이 된 것처럼 가영을 향해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손을 앞으로 뻗어 여전히 민망함으로 젖어있는 가영을 꼬옥하고 끌어안으니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듯 가영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 유, 유한아··· 여, 여기서 이러면···"


"뭐, 어때요. 가족끼리 좀 안고 있을 수도 있지."

"그, 그래도···"

혹시나 누가 볼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치고 내 몸을 떠미는 가영의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차갑기만 할뿐.


그 얼음장같은 차가움이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가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하나를 풀어 가영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손을 빼지 못하도록 아예 깍지까지 낀채 손등을 손가락으로 꾸욱꾸욱 눌러주니 그제서야 좀 온기가 돌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가영의 손에 내 온기를 전해주면서ㅡ


"근데 그거 아세요. 고모?"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고모네 가게 점심시간 1시간 30분인거?"

"으, 응?"

"직원분들한테 물어보니까 그렇다던데요?"

그리고 가영은  점심시간'동안' 데리고 다니겠다고 약조한 상태였다.

그 말은 즉···

'1시간 30분동안 데이트하듯 여기저기 돌아다닐  있단 소리지.'


가영하고 단둘이 점심데이트라.

이거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두근대는데 이래가지고 오늘 밤에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뭐, 아무튼 확실한 건···


"내일 기대해도 되죠?"

내일이 나와 가영이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는 날이라는 거다.


그 전에 도시락건부터 확실히 거절하는게 먼저겠지만 말이다.


뭐라 그랬더라?


도시락 하나에 십 만원씩 준다고 했었나?

응,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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