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2화 〉1부 (122/315)



〈 122화 〉1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짜증이 날 이유가 없는데도 자꾸만 짜증이 났다.


이상한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냥 최근 들어 마음이 좀··· 싱숭생숭했다.

갑자기 울적해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들뜨기도 하고 지금처럼 이상할 정도로 짜증이 나기도 했다.


 원인이 유한이라는 걸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식으로 기분이 확확 바뀔 때마다  현장에는 늘 유한이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랬다.

누군가 유한에게 번호를 묻거나 꽃을 내밀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걸 보고 있으면 그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기분이 갑자기 착 가라앉았고, 갑작스러운 접근에 유한이 난색을 표하며 거절의 의사를 밝히는 걸 보고 있으면 언제 또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유한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성들을 질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이 딱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 가영은 저도 모르게 퍼뜩 몸을 떨었다.


그런 가영의 모습은 누가봐도 정곡을 찔린 사람의 그것이라서 그녀의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던 하연이 의아하다는 듯 가영을 바라봤지만, 하연의 눈빛은 지금의 가영에게는 닿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순간 가영은 다른 데까지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크게 당황한 상태였으니까.

질투라니.


그럴 리 없었다.


왜  여자들을 질투한단 말인가?

어찌보면  된 일이기도 한데 말이다.


눈에 차는 이가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짜고짜 고백부터 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유한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던 이들은 전부 거절이라는 걸 맛보게 되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이들 중에 유한의 마음에 차는 이가 나온다면 그런 식으로 맺어질 수도 있는 거니까.

진짜 사랑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유한도 더는 자신을 향한 동경을 사랑이라 착각하지 않겠지.


그리 되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관계도 거기서 끝나게 될테니 더는 불안에 떨 일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더불어 예전 그대로까지는 힘들더라도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테고.


그러니 잘 된 일이 맞다.

틀림없이 잘  일이 맞는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기쁘지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뭐라도 얹힌 것처럼 살짝 답답해지며 그 안에 속에서 뭔가가 자꾸 술렁거렸다.

'질투···'


 순간 그 단어가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스쳤지만, 속으로나마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했다.


질투일 리가 없었으니까.

그보다는 그냥··· 유한이 걱정되서 그런 걸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여자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고난을 자주 겪었던 유한 아닌가.

그렇기에 걱정이 됐다.


유한의 외모만 끌려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한 이들이 또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건 걱정이 맞았다.

틀림없이 걱정이 맞는데··· 쓸데없이 이상한 생각을 해서 그런 지 몰라도 얼굴이 자꾸만 화끈거리며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낯선 박자로 뛰어댔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던 건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얼굴이 자꾸만 화끈거려서 세수로라도 진정시키기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쌤?"

"그, 잠시 화장실 좀···"


잠깐 화장실좀 다녀올테니 마저 먹고 있으라고 그대로 자리를 뜨려다가 왠지 모르게 안에 들어있는 걸 집어먹기 딱 좋도록 훤히 열려있는 도시락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슬그머니 그것의 뚜껑을 닫고는 그대로 원장실을 빠져나왔다.

휴게실에 들어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원장실을 빠져나오고 보니 원래라면 카운터를 지키고 있어야할 유한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렇게 가게를 빠져나와 같은 층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물을 세게 틀어놓고 그것을 손으로 받아 연거푸 얼굴을 씻었다.


얼굴이 하도 화끈거려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아니면 진정이 안 될 것만 같아서 최대한 차가운 물로 틀어놨는데 아플 정도로 시린 손가락과는 달리 얼굴에 깃든 화끈거림은 쉬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이고 세수를 반복했다.

몇 번이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조금씩 화끈거림이 가라앉으며 덩달아 복잡하기 그지없었던 머릿속까지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대신 얼굴이 축축하게 변해버렸지만 손 닦는데 쓰라고 가져다놓은 티슈 몇 장을 뽑아 대충 문질러 닦으니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화끈거림을 가라앉히고는 다시 가게로 향하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퉁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할 말이 뭔데요?"


유한의 목소리였다.

평소 내는 것보다 살짝 차가운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심장이 쿠웅하고 크게 뛰면서 간신히 가라앉혔다 생각했던 화끈거림이 다시 얼굴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가영은 황급히 벽에 몸을 붙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벽에 달라붙고 보니 쿵쿵하고 빠르고 크게 뛰는 심장의 소리가 갑자기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해서 가슴께를 손으로 꼬옥하고 누르면서 벽과 밀착시켜놓았던 몸을 살짝 움츠리니ㅡ


"혹시 여자친구 있어요?"


그러자마자 들려온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과 얼굴을 맞대고 같이 식사를 하고 있던 이의 목소리였다.

하연의 것이 분명한 그 목소리에 가영은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사정이 하도 딱해서 기껏 허락해줬더니만 밥은  먹고 여기서 대체  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시려고요."


"없죠? 여자친구?"

"···없으면 뭐 어쩌실건데요."

잠깐의 침묵 후에 내뱉어진 유한의 말에 꾸욱하고 짓눌려있던 가영의 아랫입술이 부르르 경련했다.

"없는데 왜 그래요?"

"네? 제가  어쨌다고···"


"사귀는 사람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철벽을 치냐 이거죠. 사람 무안하게."

"사귀는 사람은 없어도ㅡ"

"좋아하는 사람은 있으시다?"

그 말에 유한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영은 왠지 모르게 유한이 떨떠름한 표정을 한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흐으음··· 뭐하는 여자에요?"


"···그건 알아서 뭐하시려고요."

"고백은요? 그 여자한테 좋아한다고 고백은 해봤어요?"


"····"

"해봤다가 차이셨구나? 신기하네··· 왜 거절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 아, 혹시 뭐 유부녀에요?"


넌지시 던져진 하연의 질문에 가영은 괜히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그녀를 겨냥한 것이 아님에도 그랬다.


타겟이 아닌 자신조차도 이리도 당혹스러울 정돈데 유한은 어떨까.

혹시 놀라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아니면 나이 차가 많이 나나? 그래서 부담스러워서 거절한 건가?"

"···쓸데없는 소리 하실 거면 이만 돌아가볼게요."


돌아가보겠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던 걸까.

부스럭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자박하고 바닥을 즈려밟는 소리가  뒤로 따라붙었다.

그에 흠칫한 가영이 안 그래도 움츠리고 있던 몸을 한층  움츠린 순간ㅡ

"흠, 연상이 맞나 보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가 저벅저벅하고 울려퍼지던 발소리를 그대로 끊어냈다.

"으으음··· 나이 차가 대체 얼마나 나길래."


"···그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권하연이요."

"네?"


"그쪽 말고 권하연이라고요. 제 이름."


"하··· 예, 권하연 씨. 제가 누굴 좋아하든 그건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 이만 신경 꺼주시겠어요?"


"신경끄기 싫으면요?"

"···네?"


"그 여자 말고  어때요?"

그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슴 속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것이 발치까지 뚝 떨어지는 느낌에 가영은 아까 전부터 가슴께를 꼬옥하고 짓누르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될  같을 정도로 그곳이 답답했으니까.


"몇 살이에요?"

"···누구요."


"그쪽 말하는 거지 누구겠어요."


"···스물 둘요."

"아, 스물 두살? 그러면 저도 일단은 유한 씨보다 연상이네요."

잘 됐다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거슬렸다.

물어본다고 순순히 답을 해준 유한의 태도도 그랬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아니, 보니까 연하보다는 연상 쪽이 취향이신  같아서요. 그래서 말인데··· 뭐하는 사람이에요?"


"네?"


"유한 씨가 짝사랑한다는 분이요. 저보다 예뻐요?"


그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 가영은 하연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어디가서 못 났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지만 그래도 상대가 연예인이기 때문일까.


거울에 비치던 귀여우면서도 생기 넘치는 하연의 외모에 비교하면 자신은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화장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하며 피로감에 찌들어있는 모습까지.


여태껏 단 한 번도 거슬리지 않았던 것이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랬는데ㅡ


"네."


유한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질문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도 모자라 단호하기 그지없는 유한의 대답에 가영은 거슬리기 시작했던 것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웃었다.

그게 뭐라고,  한 마디가 뭐라고 이럴 수 있나 싶었으니까.


"···진짜요? 혹시 상대가 연예인인가?"

"····"

"그, 그럼 몸매는요?"

그렇게 마음이 놓이기 무섭게 귓속으로 파고 들어온 건 아까하고는 다르게 살짝 초조함마저 느껴지는 하연의 목소리였다.


그것이 귓속으로 박혀든 순간 가영은 어느새 하연의 몸매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린 것이라 실제하고 똑같다고 장답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쳐도 하연의 몸매는 분명 훌륭한 게 맞았다.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철저한 관리 속에서 만들어진 몸매는 분명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듬뿍 담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서 이쪽은··· 솔직히 말해 잘 관리된 몸매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관리라는 걸 손에서 놓아버린  치고는 상당히 날씬한 편이라는  알고 있지만, 옆구리만 만져봐도 벌써 군살이 살짝 잡힐 정도니까.

이제 보니 허벅지도 전에 봤을 때보다 좀··· 굵어진 것 같았고.


허나 그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질문을 받자마자 대답했던 아까와는 다르게 유한이 유난히도 길게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작된지  1분도 되지 않은 침묵이 이상할 정도로 거슬렸다.

"···몸매는 내가 더 낫구나?"


언제 초조하고 그랬냐는 듯 금세 득의양양해진 하연의 목소리도 그랬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아, 그냥  번 확인해 본 거예요. 알고 싶었거든요. 나한테 승산이 얼마나 있나."

"하···"

"승산이 아예 없으면 깔끔하게 포기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적어도 몸매만큼은 제쪽이 더 나은 것 같으니까··· 포기 안 해도 될  같기도 하고?"


"···네네, 그쪽 마음대로 하십쇼."

"아, 맞다.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또 뭐요."


"그···"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걸까.

말 뒤에 달라붙은 꼬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덩달아 초조해지는 것만 같아서 가영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보니까 점심은 직접 만든 도시락으로 해결하시는  같던데 맞나요?"


"···그래서요."

"그으··· 혹시 정말 실례가 안 된다면 만드시는 김에 제 것도 같이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ㅡ"

"무, 물론 비용은 챙겨드릴게요! 도시락 하나당 5만원씩 어떠세요?"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한은 대답이 없었다. 꼭 망설이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용돈이 필요하다고 하더니 혹시 그래서 그런 걸까.


"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제가 진짜 집밥느낌나는 걸 못 먹은지 엄청 오래되서 그래요. 맨날 스케쥴다닌다고 사먹기만 했더니··· 집밥이 그리운데 해줄 사람도 없고···"

"···그럼 그쪽 부모님한테 부탁드리면 되잖아요. 아니면 뭐 매니저라던지."


"외국에 계시거든요. 그리고 매니저 언니도 그쪽으로는 영 젬병이라서··· 지, 진짜 어떻게 안 될까요? 하나당 10만원씩이라도 상관없으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따로 사람을 고용하시죠?  정도 돈이면 너도 나도 하겠다고 할  같은데."


"그··· 제가 이래뵈도 입맛이 꽤 까다로운 편이거든요. 근데 뭐랄까 유한 씨가 만든 도시락은 제 입맛에 딱 맞는다고 해야할까···"


"아니, 대체 언제 먹어봤다고ㅡ"


"그···! 유, 유한 씨 어머님이 좀 나눠주셨거든요. 근데 먹어보니까 딱 이거다 싶어가지고···"

득의양양해할 때는 언제고 서서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그걸 듣고 있으니 시무룩한 척을 하고 있는 하연의 모습이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만 같아서 더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슬리는 건···

"대, 대신 제가 동료들한테 어머님 가게도 열심히 홍보하고 다닐테니까···!"

자신을 핑계 삼아 걸고 넘어지는 하연의 태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하연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유한의 입을 뚫고 튀어나온 건 '으음···'하고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소리였다.

그러더니···


"···일단, 생각 좀 해볼게요."


처음으로 거절이 아닌 다른 말이 유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게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질투가 맞다는 걸.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질투라는 감정의 맛은··· 썼다.

난생처음 먹었던 가루약보다 몇 배는 더 텁텁하고 써서 어린  그랬던 것처럼 눈물이 찔끔 흘러나올 정도로 구역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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