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1부
아무리 서로 볼장 다 본 연인 사이라고 해도 선물이랍시고 자위기구를 내미는 건 결코 쉽지 않은 행동이다.
하물며 남자가 자기 물건을 본 따서 만든 걸 여자에게 선물한다면?
그런 걸 선물이랍시고 건네받게된 여자 입장에서는 '뭐 이딴 씹 변태새끼가 다 있지?'라는 생각부터 들겠지.
동시에 지금이라도 빨리 손절을 치는게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할테고.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하는 경우는 그렇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떨까.
여자가 자기 보지를 본떠서 만든 오나홀을 남자친구에게 선물한다면?
그러면서 '앞으로는 자위할 때 그것만 써.'라는 멘트까지 수줍기 그지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덧붙인다면?
그런 걸 선물받게된 남자친구는 어떤 기분이 들까.
'그야 뭐..'
당혹스럽겠지.
이런 건 대체 어떻게 만들었나 싶을테니까.
허나 그 당혹스러움 이상으로 흥분이 되지 않을까.
자신의 보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오나홀을 내밀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여자친구의 모습이 자위할 때도 나만 생각해달라는 귀여운 투정처럼 보이진 않을까.
그러니 이건 한 번 정도는 써봄직 했다.
남녀의 정조관념이 정반대인 이 세계에서는 남자가 '선물을 건네는 여자'의 입장이고 여자가 '남자친구'의 입장이니까.
남자가 수줍기 그지없는 표정을 한채 앞으로는 이걸로만 쑤시라며 자기 물건을 본따서 만든 딜도를 선물해준다?
농담이 아니고 그 자리에서 눈이 돌아가서 남자를 덮치지 않을까.
'뭐, 아님 말고.'
사실 내가 내게는 하등 쓸모가 없어보이는 물건을 보고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써볼만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건 다 가영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삽입 자위보다는 클리 자위쪽을 선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영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위기구를 보관해두는 서랍 안에 딜도가 들어있었던 걸 떠올려보면 삽입 자위를 아예 안 하는 건 아닌 듯 했으니까.
아마 어쩌다가 한 번 정도 기분전환 삼아서 하는 식 아닐까.
그렇다면 이왕 쑤실 거 내 물건하고 꼭 닮은 걸로 쑤셔줬으면 하는 게 내 솔직한 바람이었다.
'문제는 건네더라도 어떤 식으로 건네주냐는 건데..'
솔직히 그런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가영이 날 진짜 자기가 배 아파서 낳은 아들처럼 여기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더더욱 그랬다.
아들처럼 생각하는 아이한테 그런 걸 선물이랍시고 받아봐야 흥분이 되기는 커녕 당혹스럽기만 할 뿐이겠지.
'뭐..'
사실 전부 부질없는 고민이긴 했다.
애초에 저걸 살 돈도 없는데 고민해봐야 뭘 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치도 못하게 돈이 생겼다.
그러니까 세나와 미리 약속했던대로 마트로 향하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꾸만 내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길래 혹시 뭐 할 말 있으면 해보라고 했더니 세나가 누가봐도 연기임을 알 수 있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한채 막 생각났다는 투로 말했다.
"아, 맞다. 출연료 입금해놨거든? 한 번 확인해봐."
"어? 출연료?"
"응."
"아니, 진짜 필요없는데.."
"됐고. 잔말말고 받아. 가지고 있다보면 어디든 쓸 일이 생기겠지."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꽤 단호하게 말한 세나가 갑자기 걸음을 재촉했다.
일단 나름대로 단호하게 말을 하긴 했는데 말하고 나니까 뭔가 좀 부끄럽기라도 했던 것일까.
빨갛게 익어버린 귀 끝부분을 머리카락 사이로 숨기며 호다닥 달아나는 세나의 뒤를 따르며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얼마나 들어왔는지 확인해봤는데ㅡ
'미친?'
덕분에 알게 되었다.
대기업들이 왜 대기업이라고 불리는지를.
'아니, 이만한 금액을 출연료랍시고 꽂아준다고?'
아니면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가 실수로 뒤에다가 0을 하나 더 붙여버렸나?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상당한 금액이 세나에게 옷을 선물해주느라 강제로 다이어트를 해야만했던 통장의 배를 빵빵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말은 계속 필요없다 필요없다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립서비스였을 뿐이고 챙겨준다는 걸 굳이 마다할 생각은 없었는데ㅡ
'그래도 이건 좀.. 너무 많지 않나?'
휴대폰을 향해 내려꽂고 있던 시선을 슬그머니 들어올려 세나를 찾았던 건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선을 들어올렸는데 정작 눈으로 들어온 건 내가 자기를 찾을 거라는 걸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잠깐 사이에 저 멀리까지 달아나있는 세나의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조금만 움직여도 헉헉대더니만 대체 언제 저기까지 달아난 걸까.
뭔가 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고 있으니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나가 얼른 오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날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그러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뒤에 있던 마트 출입구 사이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졌던 세나와 다시 합류하게 된 건 마트 안으로 들어서고 난 후였다.
"아, 왔네요."
오늘은 저번하고는 다르게 생방으로 진행할 거라길래 틀림없이 요리할 때나 킬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왜 벌써부터 방송을 킨 걸까.
그거야 뭐 솔직히 뻔했다.
이런 식으로 내 입을 틀어막아버리겠다는 속셈이겠지.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천 명에 가까운 시청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출연료같이 민감하기 그지없는 주제를 꺼내드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세나의 뜻이 정 그렇다면 이대로 낼름해주는 수밖에.
아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셀카봉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소소한 의문을 느끼고 있으려니 휴대폰을 얼굴 가까이 가져다댄채 시청자들을 상대로 뭐라뭐라 떠들어대고 있던 세나가 그것을 앞세운채 내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주인님 후딱후딱 좀 다니시라고요. 아무리 노예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도 되는 겁니까? 네?"
"노예가 주인을 버리고 가는 건 되고?"
"크흠.. 아니 그건 네가 걸음이 느리니까.."
"네가? 지금 네가라고 한 거야?"
진심이냐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이며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내보였더니 세나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뭐 시키실 건데요."
일단은 세나가 하는대로 맞춰주고 있으려니 문득 채팅창 반응이 궁금해졌지만 그걸 확인하는 건 잠시 뒤로 미루고 내쪽으로 들이밀어진 세나의 휴대폰을 향해 씩 웃어보였다.
"아니, 내가 생각을 좀 해봤거든?"
"그래서요?"
"그렇게 생각을 하다보니까 문득 이건 좀 아니다 싶더라고."
"뭐가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투로 묻는 세나를 향해 웃음으로 받아쳤다.
"왜 맨날 나만 밥해?"
"크흐흠!"
"그래서 오늘은 우리 노예한테 식사대접 좀 받아보려고. 마침 또 곧 있으면 점심먹을 시간이잖아?"
"시, 식사요..?"
"점심 기대해도 되지?"
싱긋 웃으며 대꾸하니 세나가 입술을 삐죽하고 내밀며 얼굴을 살짝 구겼다.
연기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아주 그냥 방송만 키면 사람이 달라지는구만..'
솔직히 아까는 무슨 로봇이 나와서 연기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속으로 쓰게 웃고 있으려니 세나가 귀찮게 됐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하 씨.."
그러더니 이내 내쪽을 힐끔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왜?"
"아니.. 뭐 메뉴를 말해야 될 거 아냐. 그냥 다짜고짜 밥하라고 하면.."
그 말을 듣고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말하면 할 수는 있고?"
"그거야 뭐.. 레, 레시피 보고 따라하면.."
"됐고. 누나가 가장 자신있는 메뉴로 만들어줘."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딱봐도 요리하고는 거리가 백만광년쯤 멀어보이는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아마 모르긴 몰라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손수 뭔가를 만들어먹은 적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지 않을까.
그렇기에 더 기대가 됐다.
요리 초보 수준을 넘어 젬병일게 분명한 세나는 과연 어떤 걸 선택할까.
"으으음.."
이거다하고 떠오르는 게 딱히 없는지 눈썹을 가운데 방향으로 모으고 있던 것도 잠시,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세나의 얼굴이 언제 찌푸려져 있었냐는 듯 확 펴졌다.
엄청나게 기발한 메뉴라도 떠올린 것 같은 그 반응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나를 향해 말을 툭 던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라면은 안 되는 거 알지?"
"뭐, 뭔 소리야..! 나, 날 뭘로 보고.."
뭘로 보기는 제대로 본 것 같구만.
발끈하는 모습이 누가봐도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느낌이었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 해주기로 했다.
"그래? 아니면 말고."
"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ㅡ"
진짜 억울하기라도 한 것처럼 씨근덕대는 세나를 향해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뭐."
"아니, 휴대폰 달라고. 재료 찾으러 돌아다니는동안 계속 들고 있기 불편할 거 아냐."
"아, 응."
"그런데 이거 촬영허락은 받은 거 맞지?"
"당연하지."
왜 그리 서두르나 했더니만 그게 꼭 날 따돌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나 보다.
이번에야말로 자길 대체 뭘로 보는 거냐고 말하는 것처럼 씨익하고 웃어보이는 세나에게서 휴대폰을 넘겨받고는 그대로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니 좋았는데 왜!!]
[대체 뭐땀시!!]
[내 행복한 시간을 망친 유세나를 죽인다..! 내 행복한 시간을 망친 유세나를 죽인다..! 내 행복한 시간을 망친 유세나를 죽인다..! 내 행복한 시간을 망친 유세나를 죽인다..!]
[모해!!]
[동생 분 ㅎㅇ요]
[ㅎㅇㅎㅇ]
[아니 이게 지금 뭐하는 거냐고!!]
[남자한테 무거운 거 들게하는 얼빠진 련이 있다?]
[세나야 이건 좀 아닌 것 같애;; 그래도 상대적으로 더 튼튼한 네가 드는 게 맞지 않을까?]
[동하]
[아 ㅋㅋ 앵글 좋았는데 ㅋㅋ]
[뭐 사는지 관심없으니까 얼른 셀카모드로 바꾸라고 ㅋㅋ]
[ㄹㅇ ㅋㅋ]
아무래도 아직 평일 오전이다보니 평소보다 채팅창 올라가는 속도가 좀 느렸다.
그렇다고 시청자 수가 적냐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하나두나세나네나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요즘 영상 잘 보고 있습니다 ^^7
"영상이요? 아, 그게 벌써 올라갔어요?"
그런 식으로 시청자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카트 좀 가지고 오겠다며 어딘가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던 세나가 카트를 끌며 나타났다.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러고 있으니 꼭 부모님 대신 카트를 끌게 되서 신난 꼬맹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귀엽긴 한데 그만큼 철이 없어보인다고 해야할까.
저걸 누가 24살이라고 생각할까.
[아니 표정 개 신났네 ㅋㅋㅋ]
[아빠 따라서 마트 놀러온 (2)4살]
[차녀(24살, 스트리머)]
[그만큼 신나시는 거지~ 그만큼 신나시는 거지~ 그만큼 신나시는 거지~ 그만큼 신나시는 거지~]
[무야호~]
[무효야~]
[은근 커여워서 킹받네 아 ㅋㅋ]
[?]
[??]
쭈르륵 올라오는 채팅을 보면 시청자들의 생각도 얼추 비슷한 듯 했고.
그렇게 카트를 끌고 등장한 세나에게 카트의 지배권을 넘겨받았다.
"네가 끌려고?"
"응, 그게 편할 것 같아서."
묘하게 아쉬워하는 표정이긴 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순순히 카트의 통제권을 내게 넘긴 세나가 그대로 몸을 돌려 어딘가를 향해 호다닥 달려갔다.
그런 세나의 뒤를 슬금슬금 따르며 시청자들에게 물었다.
"누나가 뭐 가져올 것 같으세요?"
[이건 고기지 ㅋㅋㅋ]
[고기는 못 참지 아 ㅋㅋ]
[점심에는 한우지 ㅇㅈ?]
[근데 마트인데 사람의 별로 없네]
[ㄴㄴ 백퍼 냉동임 제가 봄 ㅎ;]
[평일 오전이라 그런 거 아님?]
[아무튼 지 먹고 싶은 걸로 가져올듯 ㅋㅋ]
의견이 다 달랐다.
확실한 건 시청자들도 세나가 극한의 초딩입맛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들 있었던 모양인지 그쪽 입맛을 가진 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주로 나왔다.
그래서 틀림없이 그 중에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ㅡ
"자ㅡ"
세나는 그런 나와 시청자들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옆에서 불쑥 등장한 세나가 온몸으로 끌어안다시피하고 있던 것들을 그대로 카트 안에다가 쏟아냈다.
와르르하고 제법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텅 비어있던 카트가 반절 정도 차올랐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뭔놈의 과자를 이리도 많이 챙겨왔나 싶었으니까.
"재료 찾으러 갔던 거 아니었어?"
"찾아왔잖아."
혹시 나만 안 보이는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저토록 당당한 것일테고.
"..어디있는데?"
설마 뭐 브이튜버답게 온갖 종류의 과자를 빻아서 그걸 튀김옷으로 쓴다는 창의적이고 쌈빡한 구상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세나가 카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과자들 사이로 손을 쑥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를 내며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바깥으로 빠져나온 세나의 손에 들린 것은ㅡ
"자, 여기있잖아."
캔 겉면에 프린트된 샛노란 알갱이들의 모습이 퍽 인상적인 옥수수 통조림이었다.
뭐 엄청난 거라도 자랑하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날 향해 콘 통조림을 내밀고 있는 세나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와..'
진짜 강냉이 털어주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