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1부
내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까지만 해도 가영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 얼굴을 힐끔하고 한 번 쳐다보고 말았을 뿐.
그랬던 가영이 드르륵하고 의자 끄는 소리까지 내가며 황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던 건ㅡ
"응? 엄마 방에 있는 거 쓰려고?"
막 주방을 나선 내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이 아니라 가영의 방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는 걸 확인한 지나가 날 향해 그리 물은 순간이었다.
그 순간 가영이 말 그대로 몸을 벌떡 일으켰고, 그러면서 터져나온 소리에 의아함이 듬뿍 담긴 시선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런 가영의 반응 덕분에 직감할 수 있었다.
급한대로 몸에 묻은 것까지는 어찌어찌 씻어내긴 했지만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엄마..?"
당연한 말이지만 세나나 지나가 그런 가영의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둘은 가영이 보인 돌발행동에 굉장히 의구심을 감추질 못했다.
'하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런 행동이라고는 일절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부터 들었을테니까.
말 그대로 순식간에 집중된 자식들의 시선에 급한대로 몸부터 일으키고 봤던 가영은 그대로 당황이라는 늪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몸을 움찔움찔대며 어쩔 줄 몰라하던 것도 잠시, 가영이 허둥지둥 변명을 주워섬겼다.
"가, 갑자기 배, 배가 좀.."
더듬더듬대며 급하게 쥐어짜낸 변명을 입밖으로 밀어내던 가영이 진짜 배탈이라도 난 것처럼 자신의 배를 양팔로 감싸안더니 그대로 내 옆을 지나쳐 방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어, 음.."
"마, 많이 급하셨나 보네.."
덕분에 자리에 남겨진 세나와 지나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분명 바로 조금 전까지 맛있게 잘 먹었으면서 갑자기 깨작대기 시작한 둘을 뒤로 한채 가영의 방으로 향했다.
참으로 다행히도 세나나 지나가 그런 날 이상하게 생각해서 붙잡는다거나 제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가영의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것은ㅡ
쏴아아아-
샤워할 때나 날 법한 그런 소리였다.
'거참..'
배가 아프다더니만 배 아픈 사람이 샤워기는 왜 틀어둔 걸까.
그런 변명을 했으면 샤워기 소리가 거실까지 새어나오지 않도록 방 문이라도 제대로 닫아두던가 급하다고 문도 제대로 안 닫고 말이지..
시간이 부족해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것들을 급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걸 아주 그냥 노골적으로 알려주는 그 소리를 들으며 쓴웃음을 짓고 있던 것도 잠시, 문득 화장대 위에 방치되어있는 가영의 휴대폰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엎어진 상태로 방치된 그것의 위에는..
'썼네 썼어.'
모른 척 해주고 싶어도 차마 그러기 힘들 정도로 뚜렷하게 물자국이 남아있었다.
솔직히 물이 묻어있는 것만으로도 확신이 설 정도인데 심지어 그냥 물자국도 아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지닌 누군가의 손 모양이 가영의 휴대폰 뒷면 위에 고스란히 찍혀있었으니까.
진짜 인주를 가져와서 찍어도 아마 저것보다는 덜 선명하게 나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또렷하고 적나라하게 남아있는 '사용'의 흔적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야동도 과격하기 짝이 없던 것들 위주로 보던 가영답게 역시 그런 쪽이 취향에 맞는 건가 싶었으니까.
'이것 참 곤란하네..'
어제 그녀에게 보내주었던 것에서 더 과격해지려면 대체 무슨 짓을 해야하는 걸까.
설마 뭐 좆에다가 문신같은 거라도 새겨야하는 걸까 '가영이꺼'라고?
'가영이꺼라..'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것을 곱씹으며 내심 쓴웃음을 짓고 있으니 달칵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황급히 주방을 빠져나갈 때와는 달리 안도라는 감정을 품고 있는 가영의 얼굴이 문틈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왔다.
"유, 유한아?!"
그러더니 바깥에 서 있는 날 발견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문을 쿵하고 닫아버리더라.
"고모? 저 급한데.."
"까, 깜박하고 무, 물을 안 내려서..! 자, 잠시만..!"
애초에 물을 내릴 필요조차 없었으면서 깜빡하기는 무슨..
순식간에 굳게 닫혀버린 문 너머에서 들려온 변명같지도 않은 변명에 헛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드륵하고 뭔가를 미는 듯한 소리가 자그맣게 울려퍼졌다.
오늘 그녀를 도와주었던 파트너를 숨기고 있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드륵하는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리며 언제 안도하고 있었냐는 듯 얼굴이 빨갛게 변한 가영이 그 사이로 걸어나왔다.
"그럼 잠시.."
그렇게 화장실 안에서 빠져나온 가영의 옆을 지나쳐 그대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큼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는지 가영이 슬그머니 내 손목을 붙잡았다.
"고, 고모?"
"그.. 그냥 2층에 있는 거 쓰는 게 어떠니?"
"..네?"
"내, 냄새.. 가.."
차마 강하게 주장할 수는 없었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냄새 핑계를 대는 가영을 향해 싱긋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내 손목을 꼬옥하고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걷어내고는ㅡ
"에이, 괜찮아요."
그대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 안쪽의 모습을 확인해보니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또 없었다.
대체 물을 얼마나 뿌려댄 건지 방금 청소라도 한 것처럼 곳곳에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혀있었으니까.
심지어는 변기를 덮고 있는 뚜껑마저도 그랬다.
'듣고 있으려나?'
상황상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컸기에 물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촉촉하게 젖어있는 변기 뚜껑을 커버와 함께 걷어올리고는 그대로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쪼르르륵-
그런 식으로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굉장히 흡사한 소리를 내주면서 미처 다 확인하지 못한 곳들을 마저 훑었다.
그러다보니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영이 아침에 쓴 자위기구를 어디다가 숨겼는지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여기다가 숨겨놨다고 표시라도 하는 것마냥 거울 위에 손자국이 떡하니 찍혀있었으니까.
그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슬며시 그것을 옆으로 떠밀어보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곱게 개어진 채 차곡차곡 쌓여있는 수건들과ㅡ
'오늘은 로터로 했나 보네.'
저번에 가영의 서랍을 몰래 뒤졌을 때 봤었던 핑크색 로터였다.
정확히는 로터의 에그 부분이라고 해야할까.
급하게 밀어넣은 탓인지 몰라도 딱 그 부분만 수건들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수건 사이에 낀채 달랑달랑 흔들리는 핑크 로터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가영이 왜 묘하게 불만족스러워 보였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런 걸로 하니까 부족하지..'
클리토리스만 철저히 조지는 타입으로 보였던 어제 그 기구와는 달리 이쪽은 범용성은 좋아도 출력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을테니까.
어제처럼 몇 번이고 가버리고 싶어도 출력이 부족하다보니 그러기 힘들었을 터.
내가 보낸 움짤과 더불어 가영에게 '사용'된 것의 모습을 구경하며 그녀가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다가 살짝 옆으로 밀어놓았던 것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고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아주 천천히 돌려 문 밖에서 내 동향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가영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나갈 거니까 대비를 하든 뭘 하든 하라고.
역시나 바깥에 서서 화장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일까.
문고리를 잡고 돌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호다닥하고 누군가 황급히 방을 뛰어나가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부터 들려왔다.
탁하고 문닫히는 소리는 덤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반쯤 돌린 상태에서 멈춰놓았던 것을 완전히 돌려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먼저 나간 가영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다시 식탁 앞으로 향하니 그런 날 반겨준 건 가영을 상대로 걱정이라는 것을 쏟아내고 있는 두 자매의 모습과, 쉬지않고 쏟아지는 딸들의 걱정에 민망해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가영의 모습이었다.
"괜찮아 엄마?"
"그러니까. 진짜 병원이라도 가봐야 되는 거 아냐?"
사실 전혀 그런 게 아닌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걱정을 받으니 끓어오르는 민망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탓에 훤히 드러난 가영의 목덜미는 진짜 미열이라도 있는 것마냥 벌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귀여운 모습을 눈에 새기면서 식탁 앞으로 합류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가영을 향해 걱정어린 한 마디를 딱 던지고는 자연스럽게 식사를 이어나가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다 같이 모여서 아침 먹는 것일 뿐인데 상황 자체가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나와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여성들의 반응이 각자 다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구경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으니까.
가영이야 뭐 말할 것도 없이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하기 바빴다.
그에 비해 지나는 어땠는가 하면 아까부터 묘하게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가영을 향해 걱정어린 멘트를 던지는 와중에도 간간히 내쪽을 힐끔거리는 것이 꼭 내게 죄라도 지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설마..'
진짜로 팬티 냄새라도 맡은 건가?
말만 안했다 뿐이지 내 눈치를 하도 보길래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그런 짓까지 했을까 싶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이가 있는 반면 내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이도 존재했다.
물론,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세나였다.
"국 어때? 괜찮아?"
"..뭐, 괜찮네."
그런 식으로 목소리나 말투에서부터 삐졌다는 티를 팍팍 내는 것도 모자라 내가 그쪽을 쳐다보기만 하면 보란듯이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려버리는 것이 누가봐도 단단히 삐진 사람의 그것이었다.
'아니..'
며칠 전에는 지나가 삐지더니만 이번에는 세나 차례인 걸까.
위아래가 확실한 자매답게 삐지는 것도 서열순으로 잘도 삐진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토라진 세나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고심했다.
솔직히 쉽지는 않았다.
삐진 계기가 확실하다 못해 뚜렷하기까지 했던 지나와는 달리 세나 쪽은 대체 왜 삐진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내가 뭐 실수라도 했었나?'
고민을 해봐도 떠오르는 게 딱히 없었지만 혹시 몰라 천천히 기억을 되짚기 시작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설마..'
내가 자기하고 대화하는 와중에 계속 지나 쪽을, 아니 지나 쪽만 쳐다봤다고 저러고 있는 건가 지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저럴까 싶긴 했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그것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솔직히 가능성도 충분하고..'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우리는 세나의 채널에 올라갈 영상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 채우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내가 자기한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계속 지나쪽만 쳐다봤으니 그런 내 모습에 세나의 눈에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물론 관심없는 모습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르지.
다른 건 몰라도 방송과 관련된 것에 있어서만큼은 진지하다는 설정을 지닌 세나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야 솔직히 뻔했다.
'이런..'
정말 그것 때문에 삐진 거라면 어떻게 달래주는 게 좋으려나..
잠시 고민하다가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던 것을 꿀떡 삼키고는 마침 생각났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누나."
난 어디까지나 세나를 불렀을 뿐인데 정작 먼저 반응을 보인 쪽은 내 옆에 자리하고 있던 지나였다.
무슨 형사에게 이름이 불려진 수배범마냥 어깨를 움찔하고 떨어대는데 그 모습을 모르는 척 해주며 다시 한 번 세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지나가 자길 부르는 거라고 오해하지 않도록 이름까지 더해서 확실하게.
"세나 누나?"
"..뭐."
"내가 밥먹으면서 생각을 좀 해봤거든?"
우선 그런 식으로 그냥 밥만 처먹고 있었던 게 아니라 너랑 같이 찍을 영상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고 어필을 좀 해준 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 나중에 시간되면 가족끼리 다같이 모여서 술마시기로 했었잖아."
"..그래서 뭐."
자연스럽게 흐지부지 되는 듯 했던 과거의 약속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걸 슬그머니 드러내면서 말을 이었다.
물론,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두 번이나 어필을 해주니 관심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었는지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세나의 귀가 쫑긋하고 떨렸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말해."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때 먹을 안주를 미리 만들어본다 치고 요리하는 영상을 좀 찍어보는 건 어때?"
"요, 요리를 하라고..?
"응, 그리고 내가 그걸 평가하는 척 하는 거지."
그런 식으로 유한이 잔뜩 토라진 세나를 살살 달래주고 있을 때ㅡ
평소였다면 그건 또 뭔소리냐며 진작에 끼어들고도 남았을 지나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었으니까. 유한이 옆에 앉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랬다.
'어, 어쩌지..'
급하게 쑤셔넣은 탓에 누가봐도 안에 뭔가 들어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주머니를 볼록하게 부풀리고 있는 무언가.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어도 차마 그러기 힘들 정도로 뚜렷하기 그지없는 그것의 존재감에 지나가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