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1부
눈총을 한 번 받았으면 자제할 법도 한데 스트리머답게 깝치는데 도가 튼 세나는 지나를 합법적으로 약올릴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2층에서부터 재등장한 세나의 복장은 올라가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아까 몸에 걸치고 있던 잠옷은 또 어디다가 내팽개쳐놨는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제 세희네 가게에서 샀던 티셔츠와 스키니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티셔츠 위에 걸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봐야 옷장에 쳐박아두기만 하지 입기나 하겠냐는 지나의 발언에 뒤늦게 반박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나에게서 간신히 되찾는데 성공한 가죽 자켓을 몸에 걸치고 나타난 세나가 그대로 식탁 앞으로 합류했다.
'아니..'
후환이 안 두렵나?
아니면 혹시 뭐 나중에 뒤지는 한이 있어도 일단 놀리고 보자는 뭐 그런 심보인가?
아무튼 그런 세나의 모습이 꼭 선언이라도 하는 듯 했다.
이 옷은 내꺼라고.
그러니까 탐낼 생각따위 하지 말라고.
그게 지나에게도 전해졌던 것일까.
아까 전부터 묵묵히 자신의 접시에 담겨있던 것을 퍼먹고 있던 지나의 입에서 '하..'하고 날카롭기 짝이 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면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는데 그 모습이 참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기가 좀 과하게 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일까.
세나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뻣뻣해지고 있던 그때 두 자매의 대치를 보다못한 가영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세나 너 밥먹고 어디 가니?"
"으, 응? 아, 응.. 펴, 편집자들이 만나서 회의 좀 하자고 그래서.."
진짜일까.
목소리가 어색하기 그지없는 게 솔직히 잘 신뢰가 안 갔지만, 다른 건 몰라도 방송에 있어서만큼은 진지하다는 세나의 설정을 생각하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입고 다니니까 훨씬 보기 좋네."
"그, 그래?"
실시간으로 파괴신으로 진화하고 있는 지나 때문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와중에도 칭찬만큼은 듣기 좋았나 보다.
세나가 자꾸만 꿈틀꿈틀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순간, 지나 쪽에서 탁하고 뭔가를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넌 회의를 씻지도 않고 나가냐?"
"바, 밥 먹고.. 씻을 거거든?"
"아, 네, 그러시겠죠. 왜? 아예 옷 입고 씻는다 그러지?"
그리 말한 지나가 어느새 텅 비어버린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나의 몸에 떠밀린 의자의 다리가 바닥에 끌리며 드드득하고 거친 소리를 냈다.
"전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서 좀 쉴게요."
그러거나 말거나 가영이 뭐라고 한 마디 하기 전에 지나가 자신의 방으로 쏙 자취를 감춰버렸다.
덕분에 식탁 위에는 어색한 분위기만이 맴돌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이어나가긴 좀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아침인지라 기름진 걸 너무 많이 먹기에는 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지나의 뒤를 이어 가영이 자신의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그렇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가영이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싱크대 안에다가 내려놓고 그대로 돌아서려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응? 엄마 목 뒤에 뭐 난 것 같은데?"
나도, 가영도 철렁하게 만드는 한 마디가 세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설마 다른 이도 아니고 세나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에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있으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세나가 가영을 향해 다가갔다.
좀 더 가까이에서 확인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그 몸짓에 가영에게서 당황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 무슨 소리니? 나긴 뭐가 났다고.."
"아니, 분명 목 뒤에 빨간 게ㅡ"
그 상황을 보다 못해 나섰다.
"벌레한테 물리신 거 아냐?"
"야, 그래도 아직 겨울이거든? 벌레가 어딨냐?"
"왜? 있을 수도 있지. 집에 맨날 난방 틀어놓잖아."
그러니 한두 마리 정도는 살아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둘러대니 세나가 '그런가..'하고 읊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안도했다.
그걸 발견한게 세나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많이 간지러우시면 약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약상자 뒤져보면 있을텐데."
"아, 아냐.. 딱히 간지럽지도 않은데 뭘.. 내버려두면 알아서 낫겠지."
황급히 대꾸한 가영이 이만 출근준비하러 가보겠다며 도망치듯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의 손은 어느새 아까 내가 키스마크를 새겨놓았던 곳 위를 꼭 덮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게 또 세나의 눈에 띌세랴 두렵기라도 했던 것일까.
"이상하네.. 벌레물린 자국 같지는 않았는데.."
그런 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나가 지나가듯 읊조린 말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지만 티내지 않고 깔끔하게 비운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것을 싱크대 안에다가 내려놓는 척 하며 세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편집자 분들이랑 회의하러 가야된다며? 씻고 뭐하고 하려면 서둘러야 되는 거 아냐?"
"아, 마, 맞다! 그랬지?"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해보인 세나가 쪼르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남아있던 소시지를 그대로 입 안에다가 욱여넣었다. 그러더니 벌려놓은 포크하고 나이프를 빈 접시 위에다가 올리길래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접시는 내게 치울테니까 가서 씻기나 해."
"웅, 땡큐."
귀찮았던 모양인지 입 안으로 밀어넣은 소세지를 우물우물대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세나가 그대로 몸을 돌려 2층으로 쪼르르 올라갔다.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아침식사가 종료되었다.
내게 '토라진 지나'라는 희대의 숙제를 남긴 채로.
'어떻게 달래준담..'
선물 때문에 삐진 거니 선물을 해주면 마음에 좀 풀리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엎드려 절받는 느낌을 줄 것만 같아서 솔직히 좀 그랬다.
급하게 구매한 선물이 토라진 지나의 마음을 제대로 풀어줄 수나 있을지 확신하기도 어려웠고.
거기에 가영에 관한 것까지 생각하고 있으려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설거지나 하며 그것을 쉬게 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새 다 씻었는지 2층으로 올라갔던 세나가 문제의 그 복장에다가 검은색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채 등장했다.
"야, 나 나갔다 온다?"
"어."
잘 다녀오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해주니 이내 등 뒤에서부터 쿵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세나의 뒤를 이어 가영도 출근을 위해 집을 빠져나갔고, 그렇게 지나와 집 안에 단둘이 남겨지게 된 순간 띵동하고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집 안으로 울려퍼졌다.
마침 설거지도 막 끝난 참이라 뭐가 왔나 싶어서 인터폰을 켜 확인해보니 대문 앞에 택배 박스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까 택배로 직접 받기로 했었지.
아무래도 저번에 상점을 통해서 구매했던 것들이 도착한 것 같아 그대로 대문 앞까지 나가보니 과연 문 앞에 쌓여있던 박스에는 하나같이 이유한이라는 이름 석자만 적혀있었다.
그것들을 들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내 방에 있는 3층으로 향하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거 선물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물론, 그걸 선뜻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이게 뭐 세나에게 선물해준 자켓처럼 몇십만원짜리도 아니고 하나같이 100만 단위는 가볍게 넘어가는 것들 아니던가.
특히나 운동화같은 경우에는 무려 3천만 캐쉬짜리였다.
이 세계의 돈을 캐쉬로 환전하는 건 가능해도 캐쉬를 이곳의 돈으로 환전하는 건 불가능한만큼 3천만 캐쉬라고 해봐야 현실에서는 과자 하나도 못 사먹는 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원래 세계에서 내가 뼈빠지게 번 돈 아니던가.
그런 걸 선뜻 넘겨주자니 뭔가 좀 그랬다.
그렇다고 아대나 보충제를 선물이랍시고 들이밀자니 그것도 좀 그랬고.
선물이 선물다워야 선물이지 아대 하나만 덜렁 넘겨주는 건 뭔가 좀 아니지 않은가.
절대 내가 운동하기 힘들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래..'
선물이야 나중에 알바를 하든 다달이 통장으로 꽂히는 용돈을 가불하든 해서 사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토라진 지나의 마음이야 내가 온몸으로 녹여주면 되는 것이고 말이다.
라고 생각하며 일단 운동화가 담겨있는 걸로 추정되는 상자의 포장부터 풀어헤쳤더니 상자의 포장을 뜯기 무섭게 튀어나온 건 웬 쪽지였다.
-이번 한 번만 도와드리는 겁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그리 적혀있는 쪽지의 출처가 어디인지 파악하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점을 통해 구매한 물건에 이런 식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을 수 있는 이라고 해봐야 딱 한 명뿐이었으니까.
아무튼 그거야 그렇다 치고, 이번 한 번만 도와주는 거라니 이건 또 무슨 뜻일까.
내가 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위기와 직면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택배 박스 안에 담겨있는 내용물을 확인해보니 도와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참..'
아무래도 우리 여신님께서는 나와 지나가 커플 아이템을 몸에 걸치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켤레에 무려 3천만 캐쉬나 하는 운동화를 한 박스 더 넣어줄 이유가 없으니까.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운동화만 추가로 온 게 아니었다.
아대도 하나 더 들어있었고, 심지어는 보충제에 딸린 플라스틱 물통도 한 세트가 더 들어있더라.
'대체..'
얼마나 그 장면을 보고 싶었길래 물건을 이렇게 욱여넣은 것일까.
'어쩔 수 없구만..'
보고 싶다면 보여주는 것이 도리겠지.
그렇다고 지금 당장 지나를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이왕 선물을 줄거라면 좀 더 극적인 분위기에서 주는 게 좋지 않겠는가.
고로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은ㅡ
'무조건 존버한다.'
존버의 효과는 확실했다.
이것저것 하면서 기다리다보니 어느새 운동하러 갈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안 올라오지?
슬슬 내 방으로 올라와서 운동하러 갈 시간이라며 날 끌고 갈 때가 됐는데ㅡ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옆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웅웅하고 진동했다.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그 소리에 슬그머니 그것을 집어들어 확인해보니 지나로부터 운동가야 되니 밑으로 내려오라는 문자가 도착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매번 내 방이 있는 3층까지 직접 데리러 올라왔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확 달라진 대우.
그것 덕분에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나가 그냥 토라진 게 아니라 제대로 토라졌다는 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대가 동생인데 이렇게 삐졌다고 티를 팍팍 내도 되는 건가.
열몇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말이다.
아무튼 내려오라고 하니 내려가야할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둔 에코백에다가 따로 모아둔 물건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그 안에 든 것이 보이지 않도록 적당한 옷을 골라 그것들을 덮어주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밑으로 내려가니 지나가 소파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딱히 발소리를 줄이거나 그러지 않았으니 분명 내가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을텐데도 지나는 내게 일절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뿐.
원래라면 그런 지나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못 했겠지만 여신이 이번 한 번만이라며 챙겨준 물건들 덕분에 당당하게 그녀를 맞이할 수 있었다.
"누나 안 가?"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고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물으니 꼬고 있던 다리를 푼 지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내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현관을 휙 빠져나가 버리더라.
그런 지나의 행동에 당황한 척 허겁지겁 그녀의 뒤로 따라붙는 척을 하니 내쪽을 흘깃 한 번 돌아본 그녀가 바이크가 주차되어 있는 차고 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오토바이는?"
"..피곤해."
본인이 그러시다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오늘은 오토바이 대신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쌀쌀맞은 분위기는 체육관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체육관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누가보면 정말 피곤해서 저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거참..'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쌀쌀맞게 변한 지나의 모습을 보고서도 쓴웃음 외에 다른 건 나오지 않았다.
토라진 모습이 나름대로 귀엽긴 했는데 한편으로는 이 몸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면서 저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었으니까.
'안 되겠구만..'
원래는 체육관에 도착하는대로 가영에게 보낼 오늘의 딸깜부터 마련한 다음에 토라진 지나를 우쭈쭈해줄 계획이었는데 말이다.
'순서를 좀 바꿔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