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1부
시발 역시 키스마크는 아직 좀 오바였나?
아니면 설마 어제 보낸 사진 속 남자가 나라는 걸 눈치깐 건가?
가영이 던진 한 마디 때문에 정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왜요?"
가영을 향해 그리 물었던 건 그래서였다.
가영이 그런 말을 꺼낸 저의가 뭔지 몰라도 혼자 지레짐작해서 헛다리를 짚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핑계랍시고 꺼내드는 걸 듣고 나서 판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참으로 다행히도 가영이 핑계랍시고 내놓은 것은 놀란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 그야.. 유한이 네가 피곤할까봐 걱정돼서 그렇지."
그 말을 들은 순간 깨달았으니까.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느낌으로 한 번 꺼내본 말이라는 걸 말이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을 정도로 놀란 게 가시고 나니 그 대신 고개를 치켜든 것은 괘씸함이었다.
자기는 몰래 혼자만의 시간을 즐겨놓고 내가 해피타임을 좀 가지겠다고 하니 그걸 압수하려는 꼴이 뭐랄까.. 참으로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고모가 그러셨잖아요. 방학이라도 너무 늘어지지 말라고."
전에 가영이 했던 말을 언급하기까지 해가며 반박했던 건 다 그래서였다.
설마 본인이 했던 발언에 발목이 잡힐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일까.
분명 그래놓고서 이제와서 왜 이러냐는 투로 내뱉어진 내 발언에 가영이 흠칫하고 몸을 굳혔다.
"그, 그야.. 그러긴 했는데.."
"아니면 혹시.. 제가 한 게 맛이 없어서.."
그게 아니면 내가 한 음식이 맛이 없어서 그러는 거냐.
대충 그런 뉘앙스로 말을 하며 가영으로 하여금 보란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려 시무룩해하는 척을 해보이니 그녀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절대 아니라는 것처럼 퍽 격렬하게 부정을 해대는 가영을 향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것마저 아니라면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것이냐고.
"그러면 왜.."
"그, 그야 아,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많이 피곤하잖니? 졸리기도 하고.. 그런 상태로 칼질같은 거 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까.."
"아뇨."
설마 내가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거부감을 드러낼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모양인지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가영을 상대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기쁘고 즐겁기만 한 걸요."
"그, 그러니..?"
"네, 고모나 누나들이 제가 한 걸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상상하니까.."
그것만으로도 힘이 엄청 난다고 말을 하니 가영의 얼굴이 어색하게 변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방금 내 발언으로 내가 아침마다 내려오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아버렸을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가영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그 중에 하나를 꼽아보자면 내가 깨우러 오기 전에 먼저 일어나있는 것정도?
먼저 일어나있으면 자고 있는 틈을 타 엄한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테니 말이다.
물론, 그걸 고르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가영을 향해 생긋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뭣보다.. 저는 고모가 조금이라도 더 주무셨으면 좋겠어요."
"으, 응?"
반응을 보니 역시나 앞으로는 내가 내려오기 전에 일어나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별 것도 아닌 저 말에 저토록 격하게 어깨를 떨어댈 이유가 없었다.
"늘 아침 일찍 출근하셔서 밤 늦게 들어오시잖아요. 분명 엄청 피곤하실텐데.."
"아, 아냐.. 이제는 익숙한 걸.."
"그래도요. 익숙하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여기서 포인트는 역시 가영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마치 가영이 뭔가를 알아챈 건 아닐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내 시선을 받아내고 있던 것이 이내 옆으로 살짝 돌아갔다.
"정 힘들면 말씀드릴테니까요. 당분간 아침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으, 응.. 그래.."
됐다.
이 정도면 가영은 당분간 내 앞에서 아침의 아자도 꺼내지 못할 거다.
그걸 입밖으로 꺼내든 순간 격렬하기 그지없는 내 저항을 상대하게 될 거라는 걸 방금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을테니까.
그렇게 내가 가영의 저항을 무사히 분쇄한 순간 세나가 2층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하는 짓이 좀 요상했다.
부스스하게 뻗쳐있는 머리나 어떻게 좀 할 것이지 자꾸만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대는 꼴이 꼭 뭔가를 잃어버려서 그걸 찾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으니까.
아침부터 뭘 저렇게 찾는 건가 의문을 느끼면서도 막 주방 안으로 들어선 세나를 미소와 함께 맞이했다.
"누나 왔어? 얼른 앉아."
동시에 그녀 몫의 접시를 그녀가 늘 앉는 자리에다가 놓아주었다.
그리하면 틀림없이 접시 안에 담겨있는 걸 확인하고는 싱글벙글 웃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왠걸?
내용물이 대부분 그녀의 입맛에 딱 맞는 것들로 채워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나는 접시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계속 요리조리 돌려가며 뭔가를 찾는 시늉만 해댈 뿐.
'설마..'
그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건 샤워를 끝마치고 내려온 지나의 품에 안겨있던 것이었다.
세나한테 받은 건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나..
"누나? 혹시 뭐 찾아?"
"아.. 그.. 야, 그, 그거 못 봤냐?"
"그거?"
"그 왜 있잖아.. 서비스.."
내가 선물해준 거라고 말을 하자니 뭔가 좀 부끄러웠던 것일까.
아무튼 그런 세나의 발언 덕분에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도 같았다.
'자기꺼라고 착각했구만..'
아무래도 그런 듯 했다.
생각해보면 그럴만도 한 것이 내가 세나에게 선물해준 것은 보자마자 지나의 얼굴이 떠오를 정도로 평소 그녀가 입고 다니는 스타일 그 자체였으니까.
그래서 세나를 깨우러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가 방 한쪽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쇼핑백 중 하나에 담겨있는 그것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옷 사러간 김에 자기한테 선물해줄 것도 하나 산 거라고 착각했던 게 아닐까.
'애매하네..'
이건 꼭 지나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자기께 맞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가져간 지나가 잘못한게 맞기는 하지만 기껏 비싼 돈 주고 산 옷들을 정리하지도 않고 쇼핑백채로 내버려둔 세나의 탓도 어느 정도는 있다고 볼 수 있으니까.
세나가 어제 산 것들을 꼬박꼬박 옷장 안에 넣어만 놨어도 지나가 그것들을 볼 일도, 보고 자기꺼라고 착각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뭐, 아무튼 내가 선물해준 것을 찾지 못하면 언제까지고 저러고 있을 기세라서 그것의 행방을 알려주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보니까 아까 지나 누나가 쇼핑백 하나 들고 가던데.."
"어, 언니가?"
범인이 지나라는 사실을 전해듣고는 움찔하며 당황하길래 설마 이대로 포기하나 싶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울컥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이는 걸 보면 순순히 포기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리고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세나가 울컥하기 무섭게 지나의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리며 그 방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에서 대체 뭘 하길래 이리도 안 나오나 싶더니만 머리를 말리고 있었던 것일까. 들어갈 때와는 달리 물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잘 마른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자신의 방을 빠져나오던 지나를 향해 세나가 빼액하고 세자후를 터뜨렸다.
"언니!"
보통이라면 그 시점에서 당황하거나 깜짝 놀랬을 것이다.
허나 세나의 상대는 보통이 아니었다.
"뭐."
갑작스레 들려온 뾰족하기 그지없는 외침에도 놀라기는 커녕 지나가 짜증으로 얼굴을 구기며 아침부터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냐고 따져묻는 듯한 표정을 해보였다.
그러자 역으로 당황한 건 세나였다.
'아이고 세나야..'
몸을 흠칫하고 떨어대는 세나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속으로나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으니 언제 당황했냐는 듯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려보인 세나가 지나를 향해 따지기 시작했다.
"어, 언니가 내 옷 가져갔어?"
"자켓?"
"..어."
"아, 뭐야. 나 주려고 산 거 아니었어?"
역시나 내가 생각한 그게 맞았던 모양이다.
'으이구..'
그러니까 좀 바로바로 정리할 것이지 왜 내버려둬서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차고 있으니 우물쭈물하던 세나가 이내 시청자 핑계를 댔다.
"그, 그거 시청자들이 선물해준 거란 말야!"
"그래? 나야 몰랐지."
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긴 했다.
나도 세나의 방송을 본 적이 몇 번 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지나라도 시청자들이 선물해줬다는 것에 손을 댈 생각은 없었던 것일까.
"아, 아무튼 돌려줘."
"그래, 내 침대 위에 있으니까 가져가."
그렇게 문제의 자켓은 다시 세나의 품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흐음..'하고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하던 지나가 문제의 그 자켓이 든 쇼핑백을 꼭 안아든채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세나를 불러세우지만 않았어도 필시 그렇게 됐겠지.
"야, 유세나."
"무, 뭐."
자신을 부르는 지나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불안한 예감같은 거라도 받은 것일까.
그런 것치고는 지나에게 이름이 불리자마자 즉시 그 자리에 멈춰서는 게 참으로 세나답긴 했다.
"그거 그냥 나 주면 안 되냐?"
아무래도 지나는 문제의 자켓이 꽤나 마음에 든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청자들이 선물해준 거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저렇게 물을 이유가 없으니까.
문제는 역시 그 말을 하는 지나의 표정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내놔.'
라고.
덕분에 세나의 얼굴이 새로 산 패딩을 입고 왔다가 일진한테 그것 좀 빌려달라는 말을 들어버리고 만 학생A처럼 변해버렸다.
"너 어차피 그런 거 잘 안 입고 다니잖아."
"...."
"아니면 나한테 팔아라. 얼마냐 그거?"
어차피 옷장 안에만 처박아두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낫지 않겠냐는 투로 내뱉어진 지나의 말은 철저히 팩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나는 거기에 쉬이 반박을 하지 못했다.
"아, 안 돼.. 시청자들이 선물해준 거라고 했잖아.."
"그 사람들도 입으라고 선물해준 걸텐데 입지도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인데."
"이, 입을 거거든..?"
소심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내뱉어진 세나의 발언에 지나가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니가?"
"..."
"그러지 말고 나한테 팔아. 시청자들이 선물해준 거라 좀 그러면 내가 두 배로 줄테니까 그걸로 시청자들한테 뭐 치킨이벤트라도 해주던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본데..'
뭐, 생각해보면 그럴만하긴 했다.
벽에 걸려있던 가죽 자켓을 보자마자 마치 지나를 위해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을 정도니 그녀하고 오죽 잘 어울리겠는가.
"그, 그럴거면 언니가 제 돈 주고 사면 되잖아.."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지. 귀찮기도 하고."
"아, 아무튼 안 돼.."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세나의 시선은 어느새 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안타깝기 그지없는 표정에 결국 앞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만해 누나. 저거 내가 선물해준거야."
그러니까 그쯤하라고 말한 순간 지나의 행동이 우뚝하고 정지했다.
"..유한이 네가?"
"응, 내 돈이라도 쓰면 그나마 좀 자주 입고 다니지 않을까 싶어서."
볼을 긁적긁적하면서 어디까지나 그런 목적으로 선물해준 거라고 밝혔는데 지나가 궁금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나는?"
"으, 응?"
"내꺼는?"
"어, 그게.. 누나는 옷 많으니까.."
당연히 있을 리 없었다.
설마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말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통장잔고를 다 터는 한이 있어도 지나의 것까지 구매했겠지.
'시발 어쩌지..?'
고민한다고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지나는 그런 내 침묵을 '니껀 없는데?'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없어?"
아니, 안 어울리게 시무룩해하지 말라고..
늘 엄한 모습만 보여주던 지나가 어깨까지 축 늘어뜨리면서 저러고 있으니 양심이라는 것이 따끔거렸다.
"사, 사줄게.."
"..아냐, 괜찮아. 신경쓰지마."
누가봐도 괜찮아보이지 않는 얼굴을 해놓고서는 괜찮다니.
'이거이거 삐졌구만..'
하긴 생각해보면 섭섭할만도 했다.
자기는 내게 운동을 가르쳐주겠다고 원래보다 2시간이나 일찍 출근할 정도로 날 꼼꼼하게 챙겨주고 있는데 정작 세나한테만 선물을 해주었으니.. 자기는 신경쓰지도 않고 세나만 신경쓰는 것처럼 비춰졌을지도 모르지.
'이걸 어쩐다..'
그 와중에 날 헛웃음짓게 만들었던 건 세나의 반응이었다.
지나는 받지 못한 걸 자기만 받았다는 게 그리도 기쁜지 아주 그냥 기고만장해져서는 콧대가 잔뜩 높아져있는데 그 모습이 꿀밤이 마려울 정도로 얄밉기 그지없었으니까.
내게도 그리 느껴졌을 정돈데 지나에게는 어땠겠는가.
맹수의 그것마냥 번뜩이는 시선이 히죽히죽대고 있던 세나를 향해 날아가 꽂혔다.
"힉..!"
그에 생명의 위협같은 거라도 느꼈던 것일까.
어깨를 들썩거리며 크게 헛숨을 들이킨 세나가 토끼마냥 깡총깡총 뛰어서 2층으로 토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