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1부
"응?"
의문어린 소리와 함께 휴게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직원, 주연의 고개가 발쪽을 향하는 순간 가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뒤에 이어질 장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영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민망함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졸지에 휴게실에서 몰래 야한 거 보다가 딱 걸려버린 꼴이 되어버린 가영이 오들오들 떨며 곧 찾아을 사회적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슬그머니 시선을 밑으로 내려 발밑까지 떠밀려온 가영의 휴대폰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주연의 입술이 동그랗게 변했다.
"오, 미친 개꼴.."
내심 예상하고 있던 것하고는 전혀 다른 주연의 멘트에 가영이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 사진 속 남성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던 주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호들갑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아니아니, 이게 아니고. 원장님!! 대박! 완전 대박!! 제가 방금 누구 전화 받았는지 아세요?"
그걸 휴게실에서 쉬고 있던 자신이 어찌 안단 말인가.
다 필요없고 일단 여전히 주연의 발밑에 놓여져있는 휴대폰이라도 좀 어떻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가영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배우 유하준 아시죠! 요즘 한창 청순한 이미지로 뜨고 있는 남자배우!"
당연히 자신과 똑같은 반응을 보여줄 거라는 확신이 듬뿍 담겨있는 주연의 발언에도 가영의 표정은 변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가영의 온 정신은 주연의 발치에 놓여져있는 본인의 휴대폰을 향해 쏠려있었을 뿐더러 그녀는 주연이 말하는 유하준이라는 배우가 누군지도 몰랐으니까.
아침 일찍 출근해 밤 늦게 퇴근하는 것이 일상인 가영이다.
그런 그녀에게 티비같은 걸 볼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여성치고는 드물게 드라마같은 것에 관심이 많은 주연과는 달리 가영은 그런 쪽에 딱히 관심이 없기도 했고.
"어.. 유, 유하준 모르세요? 요즘 되게 유명한데.. 그 왜 있잖아요 이온음료 광고에 나오는 애."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가영이 절실하게 바라는 건 딱 하나였다.
주연이 이대로 몸을 돌려 휴게실을 빠져나가는 것.
그리하여 여전히 야릇하기 그지없는 사진으로 가득 차 있는 휴대폰을 어떤 식으로든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영의 바람이었다.
"모, 모르시는구나. 하긴.. 티비 잘 안 보신다고 그러셨죠."
보다보면 진짜 재밌는데 왜 그리들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며 평소 속 안에 담아두고 있던 불만을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리던 것도 잠시, 주연이 다시 기운을 차리고는 재차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튼 연예인 온대요! 연예인!"
'알겠으니까 일단 나가주지 않을래..'라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속으로 삼키며 가영이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여 주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어디서 원장님 소문을 들었나봐요! 원장님 앞으로 예약잡아달라고 하던데 어떻게 할까요?!"
그리 물은 주연이 슬그머니 몸을 숙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가영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주워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런 주연의 행동을 확인한 가영에 속으로 간절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녀의 뜻이 주연에게 전해지는 것보다ㅡ
"아!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네요!"
주연의 손가락이 가영의 휴대폰에 닿는 게 훨씬 더 빨랐다.
덕분에 조금만 더 있으면 까맣게 물들 것 같았던 휴대폰 화면이 다시 확 밝아지며 유한이 손수 찍어서 보낸 사진이 재등장했다.
다시 봐도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야릇하기 그지없는 사진.
이따금씩 끓어오르는 욕구를 혼자서 달랠 때 보던 영상들에 비하면 사실 야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 이토록 야릇하게 느껴지는 건 분명 이곳이 집이 아닌 직장이기 때문이겠지.
동시에 생각했다.
아까 느꼈던 기묘한 익숙함은 당혹스러운 나머지 순간적으로 착각했던게 분명하다고.
그도 그럴 것이 아는 사람일리가 없지 않은가.
애를 셋이나 키우다보니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어 남자라는 생물과 자연스레 연을 끊게된지가 어연 10년이다.
그런만큼 근처에 남자라고 해봐야 유한이 전부였다.
'..아니지.'
유한이 어떻게 남자란 말인가.
유한은 남자가 아니라 아들인 것을.
하도 당황스럽다보니 자꾸만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고 자조하면서도 가영은 슬그머니 손을 말아쥐었다. 유한을 떠올리니 가슴 안쪽에 뭐라도 얹힌 것마냥 마음이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요 며칠동안 유한이 아침마다 보여준 행동은 명백히 비정상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 천지 어느 남자애가 여자를 상대로 먼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하물며 유한과 자신은 모자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피라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긴 했지만 가영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유한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 확신했었다.
유한이 자고 있던 자신의 입술에 몰래 입을 맞추기 전까지는.
정말 자신을 엄마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절대 할 리 없는 행동.
그렇기에 그때부터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한의 평소 행동들 중 몇 가지가 전과는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꼬박꼬박 고모라고 부르는 것 같은 게 그랬다.
엄마가 아닌 고모.
원래는 엄마라 부르기에는 아직 좀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되도록 신경쓰지 않으려 했는데ㅡ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아니어야 했다.
설령 그 불길하기 그지없는 가정이 진실이라 해도 자신은 유한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그게 진정으로 유한을 위한 일이니까.
그도 그럴 것이 유한은 지금 자신의 마음을 착각하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있는 경우였다.
하물며 유한은 유독 특출난 외모 탓에 학창시절에 여자들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말썽들을 자주 겪지 않았던가.
무려 '그런 일'까지 겪기도 했으니 낯선 여자들을 믿지 못하고 대신 안심할 수 있는 상대인 자신에게 기대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다는 마음.
사랑이라고 오해하기에는 충분한 감정이다.
그런만큼 더더욱 지금 유한이 몰래 내보이고 있는 것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착각이라는 건 원래 언젠가는 깨지게 되어있으니까.
그리고 그게 깨져버린다면 그로 인한 상처는 고스란히 유한이 감당하게 되겠지.
'차라리..'
유한이 그런 마음을 품은 대상이 지나나 세나였다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왜 하필 20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자신이란 말인가.
나이에 비해 엄청 젊어보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저 기쁘기만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자신의 외모가 또래와 비슷하기만 했어도 유한이 그런 말도 안되는 착각을 할 일도, 이런 고민을 할 일도 없었을테니까.
'어떻게..'
어떻게 해야할까.
알고 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솔한 대화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쯤은.
그럼에도 선뜻 그것을 택할 수가 없었다.
대화가 무사히 끝난다면 그것만큼 좋은 결과도 또 없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듯 꼭 잘 풀리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여태껏 힘들게 꾸린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모래성마냥 와르르 무너져버릴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라고 고민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장님? 원장님?"
"으, 응?"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주연의 목소리에 가영은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상황과 직면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유한에 관한 고민만큼은 아니었지만 이쪽도 난감한 건 매한가지인 상황.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뱉어보려 했던 목소리가 제멋대로 떨렸다.
"이 사람 누구에요?"
"..응?"
"이 남자 있잖아요. 혹시 모델이에요? 와.. 색기가.."
주연의 발언에 가영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당혹스러워졌다.
주연의 성격이 괴짜라고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특이하다는 것 정도야 몇 달동안 같이 일한 게 있다보니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사된 입장에서 부하 직원이라 할 수 있는 이에게 저런 말을 듣게될 줄은 몰랐으니까.
'요, 요즘 애들은 이런가..?'
얼떨떨한 심정을 느끼면서도 가영은 사실대로 답했다.
"그거 스팸문잔데.."
"네? 아, 진짜요? 그럼 또 어디서 도용한 건가 보네요."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휴대폰을 슥 내미는 게 이쪽을 비꼬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경멸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으.. 아깝다 아까워. 모델이었으면 바로 찾아서 팔로우 할라고 그랬는데.."
대체 뭐가 그리 아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주연의 눈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원장님!"
"으, 응?"
그와 함께 터져나온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가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사진 혹시 지우실 거면그 전에 저한테 좀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이, 이걸?"
"네! 가지고 있다가 퇴근하고 찾아보려구요!"
"굳이..?"
"그, 그게.. 실은.. 왠지 엄청 잘생겼을 것 같아서요."
주연이 부끄럽다는 듯이 토해낸 말에 가영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 턱같은 거라도 찍혔다면 그걸 보고 짐작했겠구나라도 했을텐데 사진에 찍힌 건 말 그대로 남자의 상체가 전부였으니까. 잘생기고 자시고를 판단할만한 건덕지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주연은 사진 속 남자가 엄청난 미남일 거라고 이미 확신하고 있는 건 물론 그 누군지 모를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듯 했다.
"대체 뭘 보고?"
"피, 피부가 미쳤잖아요. 완전 우유빛인게 어우.."
확실히 피부만큼은 남다르긴 했다.
뽀얀데다가 살짝이지만 복숭아빛까지 도는 게 절대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일을 하다보면 연예인들의 얼굴을 볼 기회가 종종 있는데 그렇게 봤던 이들 중에서도 사진 속 남자와 비견될만한 피부를 가진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고 주변에 한 명도 없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유한이 있지 않은가.
'아.'
유한을 떠올린 덕분에 자연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사진 속 남자에게서 묘한 익숙함을 느꼈던 이유를.
'그러고보니 둘이 피부가 살짝ㅡ'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이내 피식하고 웃었다.
저 사진이 진짜일리 없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원본 그대로일리가 없었다.
분명 이런저런 보정이 덕지덕지 들어간 거겠지.
이쪽 일을 하다보면, 그리고 여자로 살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사진이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여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건 바보짓이나 다름없다는 걸.
"피부가 미쳤으면 뭐하니? 그래봐야 어차피 다 보정일텐데."
"아, 아무튼요. 저한테 보내주시면 안 돼요? 좋은 건 원래 같이 보라는 말도 있잖아요."
간절하게 쳐다보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주연 때문에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놀랐던 게 생각나 왠지 모르게 그걸 갚아주고 싶었다.
웃어른으로써 할만한 생각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한 번 정도는 유치해져도 괜찮지 않겠는가.
특히나 요즘처럼 신경쓰이는 일이 많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런 식으로라도 기분 전환을 할 필요가 있었다.
"주연아."
"..네?"
"가서 일이나 하렴."
싱긋 웃으며 주연에게 보란듯이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주머니 안으로 쏘옥하고 집어넣었던 건 다 그래서였다.
설마 자신이 그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던 것일까.
"와, 와아- 이,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죠?"
"사장이 직원한테 일하라고 했을 뿐인데 그게 뭐 잘못됐니?"
"자꾸 이렇게 좋은 거 혼자만 보시려고 하면.."
"하면?"
"소, 소문 낼 거에요! 원장 쌤이 휴게실에서 몰래 야한 사진 보고 있었다고."
솔직히 좀 당황하기는 했다. 아마 주연도 장난삼아 한 말일테지만 그럼에도 그랬다.
"여자가 야한 것좀 볼 수도 있지 그게 뭐 문제인가?"
"하긴.. 그건 그렇죠. 그래도 원장쌤은 그런데 관심없으실 줄 알았는데.."
"얘, 나도 여자야."
"그 사실을 잊지 않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자만 사귀시면 될 텐데ㅡ"
농담과 진심이 반쯤 섞여있는 그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게 유한의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나, 남자는 무슨 내 나이가 몇 인데."
"왜요? 원장쌤이 어때서요? 저는 원장쌤이랑 얼굴 바꿀 수만 있었으면 당장 바꿨을검다."
40대임에도 자기보다 어려보이는 게 말이 되냐면서 장난스럽게 씩씩대는 주연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자꾸만 낯이 뜨거워져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가서 일해. 일."
해서 일부러 싸늘한 목소리를 냈더니 그걸 듣고는 입을 떡 벌린 채 굳어있던 것도 잠시 주연이 입술을 슬쩍 내민 채 뒤로 돌아섰다.
그렇게 터덜터덜 휴게실을 빠져나가는 주연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쟤도 참..'
기분전환 삼아 살짝 놀려주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설마 역으로 당황하게 될 줄이야.
그러고 있으니 미처 지우지 못한 스팸문자의 존재가 머릿속으로 떠올라 그게 살짝 신경쓰이긴 했지만ㅡ
'그거야.. 나중에 지우면 되니까.'
당장은 제멋대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는 게 먼저였다.
덤으로 쓸데없이 머릿속에 눌러앉은 주연의 말들도 털어내야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