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1부
물론,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해도 그걸 바로 써먹을 수는 없었다.
들켜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어설프게 진행하지 않으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집에서 하기도 좀 그랬고.
'집에서 하면 바로 들키겠지.'
고로 집에서는 안 된다.
집에서는.
그렇다면 어디가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노트북과 연결시켜놓았던 것을 분리해 다시 매트리스 밑으로 밀어넣었다.
생각치도 못했던 소득까지 거둔 이상 더이상 그것에 집착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으니까.
물론, 노트북을 끄기 전에 이런저런 기록까지 깔끔하게 지워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노트북까지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서는 가영의 방을 빠져나온 순간이었을 것이다.
"뭐야, 어디 갔나 했더니만 엄마방에 있었어?"
사람을 흠칫하게 만드는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세나의 목소리였다.
마침 1층으로 내려오고 있던 참이었던 걸까.
그녀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중간 쯔음에 서 있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오는 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을 얼굴 위에 띄운 채로.
'시발..'
이건 명백히 내 실수였다.
가영을 혼내줄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고 방을 빠져나오기 전에 바깥을 살피는 걸 게을리 해버렸으니까.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빼도박도 못하게 딱 걸릴 일은 없었겠지.
'어쩐다..'
잠시 고민하다가 머릿속으로 떠오른 말을 그대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아, 응. 혹시 빨래할 거 있을까 싶어서."
"뭐야 빨래하게?"
"그냥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인 뒤 세나를 향해 물었다.
"누나는? 빨래할 거 없어? 있으면 지금 내놔."
딱 거기까지 말하고는 속으로 자화자찬했다.
급조해서 내놓은 것 치고는 굉장히 그럴 듯 했으니까.
그래서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ㅡ
"지금 빨래같은 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세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영문모를 소리가 날 다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 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
그럼 대체 뭘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뜬금없이 뭔 소리야."
"야, 너 지금 바쁘냐?"
"빨래할 거라고 했잖아."
"빨래야 어차피 세탁기가 하는 거고, 안 바쁘면 나 뭐 하나만 도와주라."
그제서야 깨달았다.
세나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일단 눈부터가 토끼마냥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혹시 잠이라도 설친 걸까.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매우매우 빡치는 일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눈에 핏발이 선 느낌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거기에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 마치 도박판에서 제대로 빨래질을 당한 도박중독자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설마 돈이 넘쳐서 진짜 도박에 손을 대기라도 한 것일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
뭐,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럼 대체 뭘까.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밥먹을 때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애가 몇 시간만에 저런 몰골이 된 걸까.
도와달라는 말은 또 뭐고.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라서 슬쩍 인상을 찌푸린채 그녀를 향해 물었다.
"뭐 도와주면 되는데."
그에 초조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연신 내 얼굴을 힐끔거리던 세나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별로 안 어려워. 그냥 마우스 잡고 클릭 몇 번만 해주면 돼."
"..혹시 뭐 이상한 건 아니지?"
"이, 이상한 거라니?"
"뭐, 도박이라든지 대출이라든지.."
"미, 미쳤냐?! 그런 걸 왜 해!"
저렇게 펄쩍 뛰는 걸 보면 다행히 그런 건 아닌 모양인데..
"알겠어. 빨래만 돌려놓고 누나 방으로 갈게."
"아, 아니 거기 말고 스튜디오로 와."
"스튜디오?"
왜 하필 거기냐는 뜻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이내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활짝 웃은 세나가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2층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대체 뭘 시킬 생각인 걸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야한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주방과 연결되어 있는 다용도실로 향했다.
그렇게 빨래를 돌려놓고서 세나의 스튜디오로 올라가니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세나가 왜 도박에서 왕창 꼴은 도박중독자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는지를.
그녀의 말대로 도박은 아니었다.
유사 도박이라서 그렇지.
아니, 그 부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휴방이라고 했던 사람이 대체 왜 방송을 하고 있는 걸까.
"아까 오늘 휴방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저기 켜져있는 저건 대체 뭐냐는 뜻으로 날 발견하고는 폭주하기 시작한 채팅창을 턱짓으로 가리키니 세나가 머쓱한 표정으로 얼토당토 않은 말을 내뱉었다.
"휴, 휴방 방송이야."
휴방 방송이라니.
공지로 휴재한다고 해놓고 3연참 갈기고 뭐 그런 건가.
"그, 그래서 제목에도 써놨잖아. 휴방 중이라고.."
이 상황이 어이없게 느껴지는 건 나뿐인가 싶어서 힐끔하고 채팅창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그쪽의 반응도 비슷했다.
[헤으응.. 오빠 나주거.. 헤으응.. 오빠 나주거.. 헤으응.. 오빠 나주거.. 헤으응.. 오빠 나주거.. 헤으응.. 오빠 나주거..]
[아 아직 낮인데 이런 거 보여줘도 되는 거냐고!!]
[휴방한다고 해놓고 방송키는 스트리머가 있다?!]
[낮부터 화나게 하네 ㅆㅂ]
[이왜진;;]
[아 더는 못 참겠다 으르르르]
[아 뭐야 오늘 휴방 아니었음?]
[내츄럴한 모습.. 아 간드앗..! 내츄럴한 모습.. 아 간드앗..! 내츄럴한 모습.. 아 간드앗..! 내츄럴한 모습.. 아 간드앗..!]
[아 ㅋㅋ 방제 보라고]
[!방제]
[현재 방송제목: 쉿! 휴방중!]
[ㅆㅂ 저런 걸 맨날 본다고?]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아.. 정신나갈 것 같아.. 점심나가서 먹을 것 같애!!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아.. 정신나갈 것 같아.. 점심나가서 먹을 것 같애!!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아.. 정신나갈 것 같아.. 점심나가서 먹을 것 같애!!]
[아 ㅋㅋ 제목에 휴방중이라고 써놨으면 휴방중 맞지 ㅋㅋ]
[아무튼 휴방중임 ㅋㅋ]
[동생 분;; 세나 좀 말려주세요;;]
[ㄹㅇ 이 언니 지금 눈 돌아갔음]
정상적인 채팅과 이성을 잃고 폭주하고 있는 이들의 채팅이 이리저리 뒤섞여있는 걸 눈으로 훑다보니 요상한 채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나를 말려달라는 식의 채팅이었다.
그에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세나를 향해 물었다.
"누나 혹시 뭐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
"으, 응?"
"아니 다들 누나 좀 말려보라고 그래서."
저렇게 어깨를 흠칫하고 떠는 걸 보면 찔리는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나 보다.
암만봐도 묻는다고 답해줄 것 같은 표정은 아니라서 대신 시청자들에게 물었다.
"그.. 시청자 분들? 혹시 누나가 뭐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요?"
[아, 그건 말이죠..]
[무슨 짓을 했나면요..]
[ㄱㅆㅇ]
[글쎄요? 킹쎄요?]
[무슨 짓을 하긴 했지 ㅋㅋ]
[알려드렸읍니다 ^^7]
[ㄹㅇ 낮이라 볼 거 없어서 켜놓고 있었는데 여기서 동생 분이 나온다고? 개꿀 ㅋㅋ]
[회사라 라디오 모드로 방송보고 있는 인생 패배자련들 실시간 오열중 ㅋㅋㅋ]
[휴;; 이걸 회사 안 다녀서 인생 이득보네 ㅋㅋ]
[ㅅㅂ 바로 화장실 달린다]
[이건 못참지 ㅋㅋ]
[ㅆㅂ 우리 부장 방금 화장실 간다 하고 나갔는데 설마..?]
[부장님도 못 참으셨네 ㅋㅋㅋ]
[솔직히 참기 힘들긴 해~]
[아니 그런데 갑자기 왜 나오신 거임?]
"아니, 그.. 빨래 돌리려고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려와서 뭣좀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클릭 몇 번만 하면 된대서 일단 와봤는데.."
방송에 출연하게 된 계기를 밝히니 채팅창이 다시 한 번 폭발했다.
[아니 씹ㅋㅋㅋ 갑자기 왜 뛰쳐나가나 했더니만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동생 찬스 쓰러 간 거였눜ㅋㅋㅋㅋㅋㅋ]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그래서 남자 분 성기사이즈가?]
[그만큼 게임에 진심이시라는 거지~ 그만큼 게임에 진심이시라는 거지~ 그만큼 게임에 진심이시라는 거지~ 그만큼 게임에 진심이시라는 거지~ 그만큼 게임에 진심이시라는 거지~]
[대리 큡 시키려고 집안일하고 있던 동생을 불러오는 스트리머가 있다?!]
[솔직히 이것도 집안일이긴 하지 ㅋㅋㅋ]
[이왜진;;]
[아니 이게 왜 진짜냐고;;]
[ㄹㅇ 벌써 집 기둥 하나 정도는 날아갔자너 ㅋㅋㅋ]
주르륵 올라가는 채팅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세나가 날 급하게 불렀던 이유를.
궁금한 건 대체 얼마나 꼴았냐는 거다.
대체 얼마나 꼴았길래 지푸라기라도 빌리는 심정으로 내 운까지 땡겨쓰려 한 걸까.
"누나."
"으, 응?"
"솔직히 말해."
"무, 뭘.."
"나한테 뭐 아이템 강화같은 거 시키려고 부른 거지."
"그으.. 렇긴 한데.."
"그래서 지금까지 얼마 썼어?"
세나와 똑바로 시선을 맞춘 채 싱긋 웃으며 물으니 세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건 부끄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대체 얼마나 질렀길래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걸까.
추측할 필요성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그럴 필요 없이 채팅창을 보면 답이 나올테니까.
[ㅆㅂ ptsd 오네;;]
[몰래 플스5 지른 거 남편한테 걸렸을 때 생각나누;;]
[그래서 하지마..?]
[남편 얼굴이 저 정도면 혼나두 좋아 헤으응.. 더 혼내조..]
[실컷 혼난 다음에 침대에서 역으로 혼내주고 싶네 ㅋㅋ]
[아 채팅보니까 못 참겠다 한 번 가고 온다;;]
[퍄;;]
그렇게 채팅창 쪽에 시선을 두고 있던 나를 세나가 황급히 제쪽으로 잡아당겼다.
채팅창을 통해 알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본인의 입으로 직접 이실직고하는 편이 더 나을 것같다고 판단한 모양.
그런 식으로 내가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세나가 조심스레 손을 펼쳐보였다.
가느다란 손가락 다섯개가 쫘악하고 펼쳐지는 모습을 눈에 새기며 설마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십?"
내 물음에 세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오천?"
"그,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러면 오백이란 소리네."
"..."
오백만원이라.
솔직히 잘 실감이 안 났다.
나도 나름대로 게임에 돈 좀 쓰는 편이긴 했는데 몇 달도 아니고 고작 몇 시간만에 그 정도 금액을 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바, 방송에 쓴 거니까 비용처리 하면 돼!"
그래놓고 한다는 소리가 저거라니.
얘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고 고민하다가 이내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세나가 뭐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을 쓴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그만큼이나 질렀는데 다 실패한거야?"
"응.."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상식적으로 500만원이나 질렀으면 접지 말라고 뭐라도 찔러줘야하는 거 아닌가?
[500만원 무과금 ㅋㅋㅋㅋ]
[솔직히 근데 오늘 세나 운 개 봊박긴 함 ㅋㅋㅋ]
[아니 어떻게 세 줄이 단 한 번을 안 뜰 수가 있지?]
[ㄹㅇ 사람새낀가 싶더라]
[저 마일리지로 큡 하나 사서 돌려봤는데 힘 30%떴는데 이거 좋은 건가요?]
[그걸 몰라서 묻냐 10련아^^]
[-단-]
[그저 정공겜;;]
"그 정도로 힘든 거면 내가 한다고 되겠어?"
"호, 혹시 모르잖아! 그리고 이런 건 원래 게임 안 하는 사람이 눌러야 잘 떠!"
"그러면 차라리 지나 누나를 부르는 게 낫지 않아?"
내 물음에 세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겠지.
지나에게 이 사실을 들켰다간 방송이 끝나자마자 쥐잡듯이 잡혔을테니까.
"에휴.. 알겠어. 비밀로 해줄게."
"지, 진짜?"
"그래."
고개를 끄덕끄덕해보이고는 세나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대체 뭘 클릭하면 되는 거냐고.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띠링-
경쾌하기 그지없는 소리와 함께 방송용 컴퓨터 위로 미션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그에 그 밑에 적힌 내용을 확인해보니ㅡ
-아무 옵이나 33퍼 이상 띄우기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나야 지금 세나가 켜놓은 게임을 원래 세계에서도, 이곳에서도 해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성공 조건이 꽤나 어려운 것인듯 했다.
[ㅆㅂ 미션건 련 양심 ㅇㄷ?]
[33펔ㅋㅋㅋㅋㅋ]
[개씹 안전자산이누 ㅋㅋㅋ]
[아니 혹시 또 모르지 500이나 박았는데 불쌍해서라도 한 번 뜰 수도 있는 거 아님?]
[뜨겠냐고 ㅋㅋㅋ]
[안전자산? 이건 못 참지 ㅋㅋ 바로 충전하러 간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과 함께 미션이라는 글자 아래에 적힌 금액이 미친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보는 사람이 많다보니 후원으로 들어오는 금액도 남달랐다.
미션이 걸린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모인 금액이 100을 넘어섰으니까.
"이러면 성공하면 이거 다 받는거야?"
"그.. 그렇긴 한데.."
[아니 되겠냐고 ㅋㅋㅋ]
[페이백? 어림도 없지 ㅋㅋ]
[100만원 페이백 받으려다 천만원 찍는 각이쥬?]
[아니 근데 이 정도 질렀으면 솔직히 떠야하는 거 아니냐 징하네 ㅋㅋ]
"그러면 내가 성공하면 누나가 이거 다 받는다는 거네?"
"너, 너줄게. 성공하면.."
"아냐, 그러지 말고 흠.."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손이나 좀 씻고 오겠다며 일단 세나의 방을 빠져나왔다.
[목욕재계 on]
[ㅗㅜㅑ..]
[깨끗하고 순결한 몸으로.. 헤으응..]
다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냐고 비웃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거야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시청자들의 채팅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열심히 비웃던, 그리고 지금도 열심히 비웃고 있는 이들이 맞을지 아니면 내가 맞을지는ㅡ
결과가 말해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