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1부
누가봐도 지난 밤에 있었던 일들을 무지하게 신경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지나의 얼굴을 보며 고민했다.
'저걸 어쩐다..'
속으로 그리 되뇌인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것은 두 가지 선택지였다.
지나에게 호응해 덩달아 어색해하는 척을 하느냐.
아니면 필름이 끊긴 척을 하느냐.
그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 고민하다가 지나를 따라 어색해하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렸다.
"으, 응.. 누나는 조깅 다녀온거야?"
"그, 그렇지 뭐.."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내 물음에 긍정한 지나가 슬그머니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현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누가봐도 신발을 벗기 위한 몸짓이었지만, 내 눈에는 좀 다르게 보였다.
내 눈에는 그런 지나의 행동이 핑계처럼 느껴졌다.
나와 얼굴을 맞대는 걸 그런 식으로라도 피해보겠다는 핑계 말이다.
'뭐, 얼굴 보기 난감한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저대로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쳐다는 봐야할 것 아닌가. 그게 예의고 기본이었다.
그러니 그런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고 있는 지나는 마땅히 혼이 나야겠지.
내가 주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이었던 걸까. 신발 위에다가 손을 올려놓고 의미없이 꼼지락대고 있던 지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마치,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나 있잖아.."
그 목소리에 지나가 반응했다.
내 입에서 그것이 흘러나온 순간, 신발 위에서 의미없이 꼼질대고만 있던 지나의 손가락이 우뚝하고 멈추었다.
"으, 응?"
뒤이어 들려온 지나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제 딴에는 어떻게든 그걸 숨겨보려고 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그랬다.
대체 얼마나 동요한 걸까.
문득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지나의 표정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 속으로 솟구쳤지만 꾹 눌러 참고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으.. 어제 말이야ㅡ"
꿀꺽-
어디선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입에서 '어제'라는 단어가 흘러나왔을 때였다.
"..어제?"
"응, 그.. 혹시 말이야.."
일부러 말꼬리를 쭈욱하고 잡아늘렸다. 지나가 더욱 초조해하도록.
효과는 확실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자꾸만 움찔움찔대던 지나의 몸이 아예 뻣뻣하게 굳어버렸으니까.
'이만하면..'
벌로는 충분하겠지.
해서 미리 준비해놓은 멘트를 입에 담았다.
"나 뭐 시, 실수하거나 그러진 않았어?"
"..응?"
"아, 아니 기억이 잘 안 나가지고.. 분명 누나하고 술집 들어간 것까지는 기억나거든?"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난다고 말을 하니 힘이 바짝 들어가 뻣뻣하게 경직되어있던 지나의 어깨가 이제야 좀 긴장이 풀린 것처럼 추욱하고 쳐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척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혹시 내가 뭐 술김에 실수했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응?"
"..정말 기억 안나?"
"으, 응.."
"정말로?"
줄곧 현관문 쪽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마침내 다시 내쪽으로 되돌린 지나가 날 향해 그리 물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 위에는 어느새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다만 꼭 그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장난기로 가려져있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지나는 아주 살짝 뿔이 나 있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야 술기운 때문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골아떨어졌지만 지나도 그랬을까?
그거야 솔직히 안 봐도 뻔한 이야기였다.
분명 제대로 잠들지 못했겠지.
그 정도로 취한 상태도 아니었을 뿐더러 자려고 눈을 감으면 룸카페에서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을테니까.
그러니 잠이 오겠는가.
보나마나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그걸 가지고 밤새도록 끙끙거렸을테지.
자기는 그랬는데 정작 그 원인을 제공한 놈은 필름이 끊겨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있으니.. 당연히 울컥할 수밖에.
그래서 내가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흐응하고 작게 콧소리를 낸 지나가 처연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누나한테 그런 짓까지 해놓고 기억 안 난다고 하면 땡이야?"
"내, 내가 뭐 실수했어?"
"응, 했지. 그것도 엄청나게 했지."
"지, 진짜?"
"왜? 누나 말 못 믿겠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 아무튼 미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척을 하다가 이내 지나를 향해 고개를 푹 숙여보였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쿡쿡하고 숨 죽여서 웃는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에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올려보니 날 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던 지나가 더 참지 못하고 그대로 빵 터져버렸다.
이참에 그녀를 밤새도록 잠 못 이루게 만들었던 것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털어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아하하하핳'하고 거실이 떠나가라 대소하던 지나가 어느새 눈꼬리 끝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슥 걷어냈다.
"뻥인데."
"..응?"
"뻥이라고."
"진짜..?"
"..응, 아무 일도 없었어."
마지막 한 마디가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은 꼭 기분탓만은 아니었을 거다. 그것이야말로 지나의 진심일테니까.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
나중에도 그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 다행이다 진짜.. 난 또 술김에 내가 뭐 실수한 줄 알고.."
"걱정했어?"
"당연하지. 그런데 놀리기나 하고 진짜아.. 내가 그 이상한 꿈 때문에 얼마나.."
"응? 꿈?"
그건 또 뭔 소리냐는 투로 던져진 지나의 질문에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몸을 흠칫해보였다. 그러다가 그녀로부터 황급히 몸을 돌렸다. 꼭 마치 굉장히 부끄러운 뭔가를 숨기려는 것처럼.
"..그,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
"아, 아무튼 밥 다 해놨으니까 얼른 씻고 나와."
그리 말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뜨는 척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맘 같아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 지나가 어떤 표정으로 내쪽을 바라보고 있을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이걸로 참아야겠지.
그렇게 주방 안으로 들어와 이것저것 만지면서 달그락대는 동안 세나가 2층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일어나자마자 바로 내려온 것일까.
여기저기가 잔뜩 구겨져있는 샛노란 체크무늬 잠옷을 걸친 채 터벅터벅하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세나가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했다.
"하으음.."
"이야 주먹도 들어가겠는데."
"아침부터 왜 시비냐."
맞아봐야 하나도 안 아플 것 같은 앙증맞은 주먹을 홱 치켜들며 되도 않는 위협을 해보인 세나가 다시 한 번 하품을 쩍 하더니 이내 내쪽으로 총총 다가왔다.
"그래서 오늘 메뉴는 뭐냐."
"시원하고 얼큰한 김치 콩나물국입니다. 손님."
"으엑.."
역시나 세나의 취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렇게 표정을 찡그리는 걸 보면.
"이건 뭔데?"
"그거? 계란찜."
"으음.."
계란말이는 환장하고 먹더니만 계란찜은 왜 저렇게 미묘한 표정일까.
뚝배기 안에 들어있는 것의 상태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주머니 안에 꽂혀있던 세나의 손이 슥 빠져나오더니 그대로 뚝배기의 뚜껑을 향해 나아갔다.
한 발 늦게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황급히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다.
달그락-!
"아 뜨거!"
세나의 입에서 그 소리가 터져나오는 게 한 발 떠 빨랐지만.
참으로 다행히 뭔가 깨진다거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뚜껑의 손잡이 부분과 맞닿았던 세나의 손끝만 빨갛게 변했을 뿐.
"으이구, 진짜.. 그걸 왜 맨손으로 만져?"
"씨이.. 불 꺼져있길래 안 뜨거울 줄 알았지."
"많이 아파?"
울상이 풀리질 않는 걸 보면 제법 따끔한 모양이다.
그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세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야, 자, 잠.."
"아, 가만히 좀 있어봐. 일단 차가운 물에 씻어야 될 거 아냐."
순간적으로 벌어진 스킨쉽에 당황했는지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하는 세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뒤 검지손가락의 끝부분이 빨갛게 부어있는 세나의 오른팔을 자연스럽게 옆구리에다가 끼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상체로 꾸욱하고 누르는 느낌으로 고정시킨 뒤 싱크대 쪽으로 데려가 흐르는 물에다가 밀어넣었다.
"으.."
"으휴, 진짜 조심 좀 하지.."
내가 다 속상하다는 것처럼 핀잔하던 것도 잠시 눈꼬리를 슬쩍 늘어뜨렸다.
"어떡해. 흉지겠다."
"..거, 흉 좀 지면 뭐 어떻다고."
"약이라도 발라야 되는 거 아냐?"
"됐어. 귀찮게 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변한 걸 보니 지금 이 상황이 많이 부끄러우신 모양이다.
"시끄럽고. 약상자나 가져와. 귀찮으면 내가 해줄테니까."
"아씨 귀찮은데.."
귀찮아 죽겠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어댈 때는 언제고 내가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자마자 약상자를 가지러 가더라.
"자."
그렇게 눈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진 것을 건네받은 뒤 턱짓으로 식탁에 딸린 의자를 가리켰다.
"손 줘봐."
"걍 밴드나 하나 줘."
"됐고, 얼른."
"그냥 밴드만 감아두면 알아서 낫는데 뭐하러.."
"손."
그런 식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세나는 내 손 위에다가 얌전히 제 손을 올려놓았다.
"아이 착하다. 이제 손도 할 줄 아네?"
"이게 진짜 뒤질라고.."
"왜? 때리게?"
그리 말하며 지나의 방이 있는 곳을 향해 보란듯이 시선을 던지니 내 시선 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세나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넌 진쯔아.. 언니 출근하면 보즈아.."
"지나 누나 출근할 때 나도 같이 나가죠? 하나도 안 무섭죠?"
"하 씨.."
"장난이고. 가만히 좀 있어봐. 얼마나 부었는지 확인 좀 해보게."
자꾸 뿌득뿌득 소리를 내는 세나를 진정시킨 뒤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와있던 그녀의 오른손을 꼬옥하고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그것을 향해 얼굴을 기울이니 순식간에 확 줄어든 거리감 때문인지 내 손 위에 올라와있던 세나의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다행히 그렇게 많이는 안 부었네. 병원은 안 가봐도 되겠다."
"살짝 데인 거 가지고 병원은 무슨 병원이야."
"아, 물기는 좀 닦아야겠다."
툴툴대는 목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티슈라도 찾는 것처럼.
허나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었고, 해서 세나의 손을 조금 더 내쪽으로 잡아당겨 그녀의 손가락을 가슴팍에 대고 문질렀다.
정확히는 그곳을 덮어주고 있던 앞치마 위에 대고 문질렀다.
"무, 뭐하는 거야?!"
"응? 왜? 물 묻어있어서 닦았는데."
"아니, 그걸 왜.. 거기다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더듬더듬하던 세나가 이내 빼액 외쳤다.
"더, 더럽잖아!"
"응, 그래도 누나 잠옷보다는 덜 더러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옆에 놓아두었던 약 상자의 뚜껑을 땄다.
그리고는 그것의 한켠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연고들을 하나하나 집어들어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건은 까진 데 바르는 거고 어디보자 화상용.. 화상용이.. 아, 요있네."
그렇게 찾아낸 것을 빨갛게 부어오른 부분에 대고 찔끔 짜냈다.
이제 본격적으로 따끔거리기 시작한 걸까.
세나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움찔움찔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짜낸 모양 그대로 뭉쳐있는 걸 손가락으로 얇게 펴바른 뒤 반창고 하나를 꺼내 꼼꼼하게 감아주었다.
"됐다."
"다 했으면 저리 꺼져."
부끄러운 걸 숨기고 싶었는지 괜히 퉁명스럽게 행동하는 세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조금씩 목을 움츠리기 시작했다.
"뭐, 왜."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 누나.."
"..뭐."
"혹시 일부러 만진 건 아니지?"
"뭐?"
조심스레 던진 내 질문에 세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뭔 소리냐고 묻는 것처럼.
"아니, 손 다치면 설거지 안 해도 되니까.."
"..뒤진다 진짜."
"아님 말고. 아, 약 상자 좀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놔."
"후우.."
"대신 햄 구워줄게."
"..콜."
역시 몸만큼은 솔직한 세나였다.
언제 쒸익쒸익 거리고 있었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세나가 약 상자를 집어든 채 거실 쪽으로 총총 사라졌다.
그런 세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지런하게 썰어낸 햄까지 바싹 구워 식탁 위에다가 올려놓으니ㅡ
"다 됐어?"
"응."
막 샤워를 끝마친 지나가 목에 수건을 건채 모습을 드러냈고, 그런 지나의 뒤를 이어 가영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앉아있으렴. 나머지는 고모가 하면 되니까."
"아, 네."
가영의 호의를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그렇게 의자에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니 밥과 국, 그리고 반찬들이 테이블 위로 착착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식탁이 가득차고 나서야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