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1부
'시간이 별로 없어.'
그러니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세나에게는 말 그대로 가차없긴 하지만 유한에게만큼은 은근히 무른 게 바로 지나다.
허나 그런 그녀라도 지금 내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는 목록에 적힌 것들을 전부 다 사겠다고 하면 난색을 표하며 말리려고 들테지.
그래서 사용한 방법이 바로 주문부터 넣는 것이었다.
주문한 게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나하나 받고 있으면 정말 핫바밖에 못 먹을테니까.
물론, 핫바도 충분히 맛있긴 하다.
특히나 위에 문어 다리 한짝이 통째로 올라가 있는 저건 더 그래보였고.
허나 저것 하나 가지고는 그리 오래 즐길 수가 없다.
몇 입 먹으면 사라져버릴게 뻔한데 저걸로 어떻게 즐긴단 말인가.
게다가 내 진짜 목적은 지나에게 말했던 대로 허기를 달래는 게 아니었다.
멀미를 우려해 아침을 평소보다 적게 먹었다는 것까지는 진실이긴 했지만,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몸인지 몰라도 평소 먹던 양에 비하면 반절도 안 되는 양밖에 안 먹었는데 허기가 지기는 커녕 아무 느낌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굳이 지나를 조르기까지 해가며 휴게소에 들린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서 파는 것들을 잘만 이용하면 지나와 소소한 추억을 쌓는 건 물론이거니와 자연스레 그녀를 자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기에 메뉴를 선정하는 기준또한 철저히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뭐, 말만 기준이지 사실 조건 자체는 굉장히 간단했다.
종류도 딱 하나 뿐이었고.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ㅡ
"주문하신 떡볶이 1인분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소시지 나왔습니다!"
"맥반석 오징어 시키셨던 분?"
"아까 알감자 시키고 가셨던 분! 주문하신 거 가져가세요!"
그래 그거 맞다.
옆에서 누가 먹여주지 않으면 운전 중에 혼자 먹긴 좀 힘든 것들 말이다.
그럴만한 것들 위주로 골라서 시켰다.
음식만 먹이면 목이 메일테니 겸사겸사 휴게소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자그마한 카페에 들려 아이스티도 하나 샀다. 물론, 빨대는 두 개를 꽂았고.
그렇게 휴게소를 한 바퀴 돌다시피 하며 수집한 것들이 한데 모이니 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꽤 됐지만 드는 것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주문하면서 보여준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요즘 휴게소가 다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싹다 깔끔하게 포장을 해줘서 품에 껴안다시피하면 됐으니까.
그리 많이 먹을 것 같지도 않은 놈이 족히 3인분은 될 듯한 양의 간식을 품 안에 끌어안다시피해서 들고 있으니 희한하게 보였던 것일까.
주변을 오가는 이들의 시선이 이쪽을 흘깃거리는 게 느껴졌다.
물론, 여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래서..'
화장실에 간다던 지나는 대체 언제 돌아올 생각인걸까.
혹시 뭐 카드 사용내역이 찍힌 문자를 확인하고는 뒷목잡고 쓰러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냥 기다리긴 좀 지루해서 그런 식으로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방학을 맞이하여 친구들끼리 여행이라도 가는 중인지 척봐도 같은 일행으로 보이는 세 명끼리 옹기종기 모여 은근히 내쪽을 힐끔거리고 있던 여성들이 이내 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세 명 중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여성이 양 옆에 자리하고 있던 친구들에게 떠밀려 내 앞까지 도달했다.
밝은 갈색으로 물들인, 어깨까지 오는 단발이 퍽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그, 그.. 저기요."
"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내 앞에 서서 뭐라도 마려운 사람마냥 안절부절 못하던 여성이 이내 쭈뼛쭈뼛대며 주머니 안에서 꺼내든 것은 다름아닌 휴대폰이었다.
그렇게 주머니 밖으로 탈출한 것이 내 앞으로 들이밀어지려던 순간ㅡ
"뭐야. 유한아 여기 있었어?"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닌다고 처음보다 한껏 뒤로 젖허져있던 후드가 누군가의 손에 잡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아, 누나 왔어?"
"미안, 기다렸지? 화장실에 사람이 많더라고."
"아냐,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는데 뭐."
그리 말하고는 내게 말을 걸었던 여성을 향해 힐끗 시선을 던져보니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발갛게 달아올라 풋풋한 분위기를 사방으로 흩뿌리던 것이 어느새 허옇게 질려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안색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무슨 저승사자라도 마주친 것 같은 모습이어서 자연스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 뒤에 선 지나의 얼굴이 대체 어떻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나 싶었으니까.
그래서 지나를 맞이하는 척 하며 자연스럽게 확인해보려 했는데 이미 목적을 달성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내 머리 위에 눌러앉는 걸 택한 지나의 손이 그걸 허락치 않았다.
그렇게 내가 혹시라도 돌아보지 못하도록 내 머리를 단단히 고정시킨 지나가 이제 막 발견했다는 투로 헌팅녀의 존재에 대해 언급했다.
"그런데 앞에 계신 분은 누구셔? 혹시 네가 아는 분이야?"
"아니? 여기서 처음 뵙는데..?"
"그렇구나. 흠, 혹시 저희 유한이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저희 동생'이 아니라 '저희 유한'이라니.
단어 선택이 교묘하기 짝이 없었다.
저래서야 나와 지나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한테 우리 둘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비춰질지야 솔직히 뻔했다.
필시 열에 아홉은 연인관계라고 생각할테지.
그리고 아까의 용기는 대체 어디로 증발한 건지 소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변해버린 헌팅녀는 아무래도 하나가 아닌 아홉 소속인 듯 했다.
"예? 가만히 계시지만 말고 말씀 좀 해보시죠?"
더욱 '연인'처럼 보이기 위함인지 어느새 내 바로 뒤까지 다가온 지나의 목소리는 분명 평소와 같았다. 그래서 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아, 아뇨. 아무 것도.."
"네? 뭐라고요?"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결국 그 오싹함을 견뎌내는데 실패한 헌팅녀가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언제 흥미진진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냐는 듯 지나가 등판한 후로 줄곧 '씨바 봊 됐네..'하는 시선을 던지고 있던 그녀의 친구들이 그런 헌팅녀의 뒤를 따랐다.
"후우- 저런 년들은 어딜가나 꼭 있다니까."
짜증나서 죽겠다는 투로 내뱉어진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오고 난 후에야 내 머리 위를 점령하고 있던 지나의 손이 자신이 원래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갔다.
궁금한 걸 확인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나를 향해 돌아섰다. 언제까지고 앞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렇게 지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는데 그런 내 시선에 그녀가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마치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설마 연인인 척 했던 것 때문에 내가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내 눈치를 저토록 열심히 살피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듯 해서 더더욱 그녀를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지나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압박감을 느낄 수 있도록.
내가 뭐라고 말은 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만 하니 화가 많이 난 것처럼 보이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뒤돌아선 순간부터 지나의 몸에 깃들어있었던 안절부절 못 하는 기색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선사하는 초조함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참다 못한 지나가 입을 열었다.
헌팅녀를 쫓아낼 때와는 달리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호, 혹시 화났어..?"
"..."
"그- 저런 애들은 보통 이렇게 안 하면 잘 안 떨어지거든 그래서.."
"무슨 소리야. 나 화 안 났는데?"
"그, 그러면 왜ㅡ"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던 거냐고 그리 물으려던 것이겠지.
물론, 끝까지 들어줄 생각은 없었기에 지나의 발언을 중간에 잘라내며 들어갔다.
"그냥- 생각해보니까 좀 부러워서."
"으, 응?"
내 말이 지나에게는 상당히 뜬금없게 들렸던 것일까. 지나가 답지 않게 귀여운 모습을 보였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는 식으로 말이다.
"뭐가?"
"..있어. 그런 게."
순간 머릿속으로 떠올랐던 말은 '누나 남자친구'라는 단어였지만 그것을 입밖으로 내는 대신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내가 들고 있던 것들 중 절반을 지나에게 떠넘겼다.
"됐고. 이거나 좀 들어줘."
"아니, 이걸 다 먹으려고?"
졸지에 내가 끌어안고 있던 것들 중 절반을 떠안게 된 지나가 제 품안으로 넘어온 것과 내 품안에 남아있는 걸 번갈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뭐 나만 먹나? 누나도 같이 먹을 거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건 좀 많지 않나?"
"아, 다 맛있어 보이는 데 어떡해 그럼. 그러니까 얼른 와서 날 말리셨어야죠."
그리 말하고는 아까보다 한결 자유로워진 손을 이용해 제 역할을 다한 지나의 카드를 그녀의 주머니 안에다가 쏘옥하고 집어넣었다.
"아무튼 덕분에 잘 썼습니다."
"그냥 계속 가지고 있지."
"응?"
"놀러가서 쓸 돈 필요할 거 아냐. 그냥 누나 카드로 써."
"됐네요. 내가 용돈 안 받는 것도 아니고."
"어허, 좋은 말로 할 때 가져가시죠?"
"왜? 카드 내역 날라오는 거 보고 그걸로 뭐하는지 감시라도 하려고?"
내 딴에는 정말 농담삼아 던졌던 말이었는데 놀랍게도 그게 지나의 진심이었나 보다.
이만 차로 돌아가자는 내 말에 내 옆에서 걷고 있던 지나의 몸이 순간 흠칫하고 떨렸다.
물론, 모르는 척 해줬다.
"아, 맞다. 누나."
"..응?"
"나 뭣좀 물어봐도 돼?"
그에 지나가 열심히 들고온 것을 하나씩 내게 건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나 혹시 남자친구랑 여행가본 적 있어?"
물어보라고 해서 물어봤는데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내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지나가 표정을 살짝 찌푸렸으니까. 그것도 잠시 그녀가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풀고는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궁금한데?"
"..뭐, 그냥?"
"참 슬픈 이야기긴 한데 아직 없네."
"왜?"
"알잖아. 누나 바쁜거. 여행은 커녕 누구 만날 시간도 없더라."
그리 말하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지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게- 누나가 이 나이먹도록 독수공방한다는데 같이 슬퍼해주지는 못할 망정 웃어?"
"무, 뭔 소리야 웃긴 내가 언제 웃었다고.."
"목소리에서 웃음기나 빼고 말하지? 솔로가 웃기냐?"
"안 웃었다니까? 엄한 사람 잡지 말고 얼른 타기나 하시죠."
일부러 퉁명스럽게 내뱉었더니 이번 한 번만 봐주겠다는 듯 피식 웃은 지나가 차 옆을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혹시 음식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한 마디를 툭 던진 뒤 그대로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아, 나가기 전에 기름 좀 채우고 가자."
휴게소를 빠져나가려다 말고 출구 쪽에 위치한 주유소로 접어든 지나가 3분의 1정도 남아있던 기름을 끝까지 채우는 동안 난 계속 그녀를 힐끔거리며 웃었다.
"또또- 그게 그렇게 웃기냐? 응?"
"아니, 뭐.. 아무튼 이게 처음이라는 거네?"
"응? 뭐가?"
"그.. 이렇게 누구랑 단둘이서 놀러가는 거 말이야."
작은 목소리로 툭 흘린 말에 기어를 조작하던 지나의 손이 순간 우뚝하고 멈추었다.
"..뭐, 처음이긴 한데."
"그럼 됐어."
"응? 뭐라고?"
"아무 것도 아냐."
그리 둘러대고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차를 핑계삼아 지나를 채근했다.
그 순간 지나의 볼이 발그레하니 달아올라 있었던 건 꼭 바로 조금 전까지 바깥에 있다가 와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겠지.
다시금 어색하게 변해버린 분위기.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열어 우리 둘 사이로 내려앉아 있던 그것을 깨뜨린 건 다름아닌 지나였다.
"그.. 간식 안 먹어? 식겠다."
"아."
그제서야 우리 둘 사이에 놓아두었던 것들의 존재가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였다.
그리고는 지나를 향해 흘깃하고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누나 뭐 먹을래?"
"난 아무거나 딱히 상관없는데."
"그러면 소시지?"
"그걸로 주던가 그럼."
그렇다길래 케찹하고 머스타드가 골고루 흩뿌려져있는 소시지를 잡아 지나를 향해 내밀었다.
"자, 아ㅡ"
"뭐?"
"아ㅡ 하라고."
소세지 위에 뿌려둔 케찹하고 머스타드가 시트 위로 떨어지기라도 했다간 참사도 그런 대참사가 또 없었기에 한손으로는 소시지에 꽂혀있는 막대 끝부분을, 다른 손으로는 그 밑을 받치고 있으니 줄곧 전방에 고정되어 있던 지나의 시선이 마침내 내쪽을 향했다.
"..됐어. 내가 알아서 먹을테니까. 그냥 이리줘."
동시에 운전대 위에 올라가있던 지나의 오른손이 내쪽을 향해 뻗어왔다.
물론, 넘겨주지 않고 피했다.
"안 돼. 운전 중에 위험하잖아."
"그러면 그냥 나중에 먹을테니까ㅡ"
"식으면 맛없잖아. 따끈따끈할 때 먹어야지. 자, 그러니까 얼른."
그리 말하며 다시 한 번 소시지를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그렇게 얼굴 근처까지 들이밀어진 것을 연신 힐긋거리며 묘하게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보이던 지나가ㅡ
"그, 그럼 한 입만-"
그리 말하며 슬며시 입을 벌려 소시지를 베어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