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1부
"고모?"
그런 가영을 보며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그녀가 왜 그러는 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러다가 이내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렸다. 생각만큼 잘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어디 아프세요?"
"으, 응?"
"안색이 창백하셔서요."
이건 사실상 내가 그녀에게 내미는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여기서 가영이 내가 내민 것을 붙들어 쥔다면.. 새로운 계획을 생각해봐야 할테지만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럴 필요는 없을 듯 했다.
"아.. 그! 아, 아침이라서 그런 거야. 고모가.. 살짝 저혈압이 있거든."
"네? 저혈압이요?"
"..응, 그래서 그런 거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정말 괜찮으신 거에요? 뭐 혹시 드시는 약같은 거라도 있으시면.."
말만하면 당장 가져다 주겠다고 말을 하니 가영이 뭐라도 얹힌 듯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냐- 그냥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좀 쉬면 금방 괜찮아져."
그러니 자긴 좀 쉬다가 씻고 나갈테니 먼저 나가보라며 가영이 날 향해 축객령을 내렸다. 그 모습이 나름 간절해보여서 알겠다는 뜻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물론, 얼굴 위에 띄워놓고 있던 표정만큼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렇게 가영으로부터 돌아서서 방 밖으로 향하다가 중간중간 가영을 향해 걱정 가득한 시선을 던져보였다.
그럴 때마다 가영은 내 시선을 살짝 피하며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억지로 쥐어짜낸 것일게 분명함에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건 그만큼 가영에게 있어 미소를 꾸며보이는 게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이겠지.
그런 식으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가영을 그녀의 방에 남겨둔 채 그곳을 빠져나온 순간이었을 것이다.
서서히 닫혀가던, 하지만 아직 완전히 닫히지는 않은 문틈 사이로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참으로 많은 고뇌가 담겨있는 소리였다.
덕분에 비틀어지려 하는 입매를 억지로 평소 모습대로 고정시키며 주방 쪽으로 향하니..
"응? 엄마 방 갔다 온 거야?"
갈색 털을 가진 도둑 고양이 한 마리가 열심히 만들어둔 쏘야를 훔쳐먹고 있었다.
대체 안에다가 소시지를 몇 개나 숨겨놨길래 저렇게 한쪽 볼만 볼록하고 튀어나와 있는 것일까.
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세나는 한짝만 쥔 젓가락을 이용해 팬 안에든 소시지를 콕 찍어서 제 입 안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보아하니 맵고 달달한 양념 맛이 퍽 마음에 든 모양.
"뭐하는 거야. 먹을 거면 그릇에 담아서 먹던가."
"뭐래, 너 대신 간 봐주고 있는 거거든?"
"두 번 간 봤다간 반찬으로 먹을 것도 안 남겠다."
그리 말하고는 세나의 옆으로 다가가 남은 걸 확인해보니 야채는 그대로인데 유독 소시지만 줄어들어 있었다.
그게 참 세나다워서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민망한 짓을 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는 것일까.
흘깃 세나를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하얬던 그녀의 두 볼이 빨갛게 변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먹었으면 먹은 값을 해야겠지?"
"으, 응?"
"자, 곧 있으면 지나 누나도 돌아올테니까 미리미리 다 세팅을 해둡시다."
그리 말하며 손가락으로 식사할 때 쓰는 그릇이 놓여져있는 찬장 쪽을 가리키니 세나가 치사하다는 듯 '칫..'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순순히 그쪽으로 향했다.
"아, 그나저나 오늘이었나?"
"응? 뭐가?"
"니 새터인지 뭔지 간다면서."
"아, 응. 그래서 좀 있다가 출발하려고."
"왠일이냐? 너 그런 거 잘 안 가잖아."
별 일도 다 있다는 투로 지나가듯 내뱉어진 한 마디가 은근히 중심을 꿰뚫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하고 크게 뛰었지만 어찌어찌 그 이상으로 티내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뭐- 그냥? 문득 궁금하더라고."
"그런델 뭐하러 가냐. 니가 신입생도 아니고."
"왜? 2박 3일동안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벌써 그리워?"
"뭐래, 벌써부터 기대되서 죽을 것 같구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 피식하고 코웃음을 친 세나가 주걱으로 밥을 푹 떠서 자기 그릇에다가 꾹꾹 눌러담았다.
그 양이 평소보다 많은 걸 보면 역시나 아침 반찬으로 쏘야를 선택한 건 정답이었나 보다.
"..또 뭐 도와줘?"
"그러면 국 좀 퍼줘."
그에 고개를 끄덕인 세나가 냄비 안에 담겨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군필자라면 익숙할 수밖에 없는 조합이긴 했다.
여기다가 배추김치에 조미김까지 가져다 놓으면 그야말로 군대 한 상이라 할 수 있겠지.
"왜? 미역국 별로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다. 니가 뭘 알겠냐."
"뭐래."
"그런 게 있어. 남자들은 모르는."
살짝 재수없는 표정으로 훗하고 웃은 세나가 다시금 입을 연 건 밥상 차리는 게 얼추 끝나가던 와중이었다.
"야."
"응? 아, 이제 그냥 앉아있어. 나머지는 내가 할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면 뭐 그저께처럼 계란프라이라도 해줘?"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면 뭐."
"그.. 새터 갈 때 보통 버스같은 거 타고 가냐?"
"뭐, 그렇겠지? 선배들 중에 차 있는 사람 있으면 그거 얻어타고 가기도 한다더라."
아직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보이니 세나가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뭔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대체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둘다 겁나 불편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러니까 진작에 면허 좀 따두라니까. 2종은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
"면허 따면 뭐해 차도 없는데."
"차야 내 차 빌려타면 되지."
"됐네요. 미쳤다고 그 비싼 걸 타고 다닐까.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쩔 건데."
그리 말하니 안 그래도 삐죽하고 튀어나와 있던 세나의 입술이 조금 더 앞으로 튀어나왔다.
"사고 나면 나는 거지. 왜? 너한테 물어내라고 하기라도 할까봐?"
"내가 몰다가 사고 낸 거면 당연히 내가 물어줘야지."
"됐어. 돈도 못 버는 게 무슨.."
툴툴대던 것도 잠시, 세나가 다시금 내 얼굴을 힐끔힐끔 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ㅡ
"아, 답답한데 드라이브나 갔다 올까."
속이 빤히 보이는 중얼거림을 입밖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덕분에 비로소 눈치챌 수 있었다.
세나가 내게 원했던 게 무엇인지.
분명 데려다주면 안 되겠냐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겠지.
물론, 당연히 눈치채지 못한 척 했다.
"그럼 다녀오든가. 어차피 방송 시간 전까지 딱히 할 것도 없잖아."
"갈만한 데가 없어서 그렇지."
"꼭 목적지가 있어야 되는 건 아니잖아."
그 편이 좀 더 귀여운 반응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오늘은 안 되겠네. 갈 거면 오늘 말고 내일 가."
"..응?"
"지나 누나가 나 새터 장소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거든."
이 집에서 차를 가진 건 세나 뿐이다.
그러니 지나가 누구의 차를 빌리려 들지야 뻔했다.
분명 세나의 차를 빌려서 날 태워다줄 생각이겠지.
오랜만에 누나 노릇 좀 해보려고 했는데 이미 지나에게 선수를 뺏겨버린 상황.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있는 세나의 표정은 오묘하면서도 복잡했다.
허나 그 표정 자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만 마침내 아침 조깅이 끝난 것인지 도어락 누르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지나가 일찌감치 식탁 앞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세나를 보자마자 마침 잘 됐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으니까.
"야, 유세나. 너 오늘 어디 갈 일 없지?"
"어.. 잘 모르겠는데..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아직 잘-"
"혹시 있어도 오늘만 택시 좀 타라."
그리 말한 지나가 세나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어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휴대폰이라도 꺼내서 올려놓을 뻔 했다.
"그리고 차키 좀 줘봐."
"차, 차는 왜?"
"유한이 좀 데려다 주려고. 왜? 싫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택시비 때문에 그러면 내 카드 줄테니까 그걸로 쓰던가."
"아, 아니 언니 오토바이 있잖아.."
"바보냐? 고속도로 타야되는데 바이크를 어떻게 타."
세나의 저항은 딱 거기까지였다.
언니로부터 쏟아지는 따끔한 눈빛을 더 견딜 수가 없었던 건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그대로 2층으로 호다닥 뛰어올라갔으니까. 그러더니 그곳에서 가져온 키를 지나에게 바쳤다.
"깔끔하게 쓰고 돌려줄게."
"으, 응.."
"왜? 휴게소에서 뭐 간식같은 거라도 사다줘?"
그 말에 세나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런 세나를 보며 지나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세나가 가져다 준 키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빙글빙글 돌리며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그렇게 깔끔하게 씻고 나온 지나가 물기 때문에 부슬부슬하게 변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아대는 동안 마침내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것이 그나마 좀 정리가 되었는지 가영또한 방에서 나와 자리에 합류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고모?"
"으, 응."
"응? 엄마 어디 아파?"
"아까 살짝 어지러우시다고 하셨거든."
"괜찮아? 약이라도 먹어야 되는 거 아냐? 아니면 병원이라도-"
"이, 이제 괜찮아. 이제 괜찮으니까.."
"그래도 병원은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저혈압이라도 계속 그러는 거면.."
"응? 저혈압? 엄마 저혈압이었어?"
줄곧 가영을 향해 걱정을 토해내던 지나와 세나가 동시에 의문어린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그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녀들 입장에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일테니 말이다.
둘 입장에서는 정말 걱정이 되서 그랬을텐데 그런 둘의 효심이 가영을 곤란 속으로 밀어넣었다.
덕분에 흠칫했던 것도 잠시, 금세 표정을 회복한 가영이 말만 저혈압이지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며 적당히 둘러댔다.
"얼른 아침이나 먹자. 식겠다."
그러더니 아예 말을 돌려버리더라.
그렇게 시작된 아침 식사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물론, 지나와 세나는 느낄 수 없는 어색함이었다.
그 어색함을 느낄 수 있었던 건 가영과 나뿐이었으니까.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가영은 끊임없이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녀는 끝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속에 담고 있는 본론을 꺼내들지 못했다.
"그, 유한아."
"네?"
"..오늘이지? 놀러가는게?"
"아, 네."
"가서 노는 건 좋지만.. 그.. 너무 흐트러지지는 말렴. 술같은 것도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고."
어찌어찌 내게 말을 붙이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했으니까.
"네, 그럴게요."
"그, 그래.."
뭐, 그런 가영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는 나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황 자체가 꽤나 고역일테니까.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불과 몇 분 전에 자신의 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들이 제멋대로 머릿속으로 떠올라 그 안을 미친듯이 헤집어댈테니까.
이를테면 자신의 입안을 훑던 내 혀의 감촉이라던지 내가 키스를 끝마친 후에 입밖으로 흘렸던 거칠기 짝이 없는, 그렇기에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며 잔뜩 흥분했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던 숨소리 같은 것들이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가영이 지금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아마 저 자리에 있는 게 가영이 아니라 나였다면?
내가 가영의 입장이었다면?
민망해서라도 진작에 다른 곳으로 도망쳤겠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가영이 조심스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드르륵-하고 주방 안으로 울려퍼진 의자끄는 소리에 자리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가영에게로 쏠렸다.
"그만 드시려고요?"
"으, 응- 오늘따라 입맛이 좀 없네.."
"엄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아냐, 그냥..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요, 요즘들어 이래저래 생각할 것도 많고 해서.."
그 순간 가영의 눈동자가 내 쪽을 한 차례 훑으며 지나갔다.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혹시 샵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이, 일이야 늘상 있지.. 아, 아무튼 엄마는 들어가서 좀 쉬고 있을테니까.. 그 맛있게 먹고."
덩달아 몸을 일으키려 하는 두 딸을 제지한 가영이 이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부터 2박 3일동안 집을 비우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평소'답지 않을 거라 판단한 것일까.
그녀의 눈동자가 내쪽에 머무르고 있는 사이 가영의 목울대가 한 차례 흔들렸다.
"그.. 유한이도 조심히, 재밌게 놀다 오고."
그리 말하고는 천천히 돌아서서 자신의 방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가영의 목덜미는ㅡ
"..네, 고모."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