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1부
웅웅- 웅웅웅ㅡ
어느 순간부터 귓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휴대폰 진동음이 잠기운에 퐁당 빠져있던 정신을 일깨웠다.
곤히 잠들어있던 날 깨운 시점에서 이미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져주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따윈 없다는 듯 맹렬하게 울려퍼지는 진동음에 맞춰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본다.
'아..'
더럽게 거슬리네 진짜.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긴 하다.
평소에는 못 듣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은 것이 진동음인데 말이다. 왜 알람으로 해놓으면 이토록 찰지게 귓속으로 박혀드는 걸까.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늘따라 유독 몸이 무겁다는 걸.
마치 보이지 않는 뭔가가 내 사지를 부여잡고 끌어당기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이런 느낌이 드는 건 새터 가기 전 마지막 운동이라고 지나가 한층 더 확실하게 내 몸을 조져놨기 때문일까 아니면 요 며칠들어 바짝 당겨진 기상 시간 때문일까.
덕분에 새삼스레 가영이 존경스러워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한다.
글로 표현하면 딱 한 문장에 불과한 행위가 직접 해보면 얼마나 피곤하고 고된 일인지를 요 며칠 들어 아주 그냥 확실하게 체감하고 있었으니까.
며칠이라고 해봐야 이제 고작 3일차에 불과한데 그런 내가 느끼는 피로감이 이 정도면 이 짓거리를 10년이 넘도록 매일같이 해왔을 가영은 대체 얼마나 피곤했을까.
물론, 가정적인 성격인 가영에게는 자식들이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고생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겠지만ㅡ
'난 아니지.'
세나나 지나, 그리고 가영이 내가 차려준 것들을 배부르게, 또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당연히 흡족하긴 하다.
허나 고작 그것만 바라보고 이 피로를 감수하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
그래서 가영과는 달리 나는 내가 받을 보상을 따로 정해놓았다.
그게 지금 내가 졸린 눈을 비비적대며 화장실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진짜 이유기도 했다.
일단 빠르게 몸부터 씻었다.
그래도 물을 맞으니까 좀 낫긴 하더라.
그렇게 몸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에 거울 앞에 섰다.
'씨발 진짜 사기라니까..'
오늘도 탄식에 가까운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거울 속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채 고개를 주억거리던 것도 잠시, 치약을 듬뿍 묻힌 칫솔을 입 안에다가 쑤셔넣었다.
그리고는 꼼꼼하게 닦았다.
지금부터 할 일을 생각하면 괜히 이상한 냄새라도 나면 안 되니까.
어디사는 멀록 새끼들마냥 아옭옭옭하는 소리까지 내가며 꼼꼼하게 입 안을 헹궈준 뒤 시험삼아 손바닥에 대고 후하고 바람을 불어보니 민트를 생각나게 하는 상쾌한 향기가 주변으로 후욱하고 퍼져나갔다.
'오케이.'
이 정도면 걱정 안 해도 되겠지.
그러니 이제 옷을 갈아입고 밑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
해서 적당한 것을 골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웅웅웅ㅡ 웅웅웅웅ㅡ
침대 위에다가 방치해두었던 휴대폰이 다시금 진동하기 시작했다.
'응?'
내가 알람을 안 껐었나?
순간적으로 그 생각부터 들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아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바로 알람을 끄는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저건 또 왜 울리고 있는 걸까.
설마 이 새벽부터 누군가 스팸전화라도 돌리고 있는 걸까.
참 서글픈 이야기긴 하지만 그럴 확률이 가장 높긴 했다.
유한에게 전화를 걸 지인이라고 해봐야 가영, 세나, 지나가 전부인데 그들이 이 새벽부터 전화를 걸 리는 없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 화면 위에 뜬 번호를 확인해보니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였다.
그래서 그대로 끊어버리려고 그쪽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ㅡ
'..응?'
막 빨간 버튼 위로 손가락을 올리려던 순간 찾아온 건 묘한 기시감이었다.
뭐지.
분명 모르는 번호인데 왜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설마..'
순간 머릿속으로 후욱하고 부상한 한 가지 가정에 허둥지둥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휴대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건ㅡ
-어떻게 그동안 잘 지냈어?
날 이 세계로 납치한 여성, 아니 여신의 목소리였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번호를 보고 어쩌면 그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추측에 불과했던 것이 현실이 되고 나니 추측이 맞아서 기쁘다기 보다는 얼떨떨했다.
-왜? 놀랐냐?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갑자기 연락을 해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에휴.
아니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려고 작정하셨나.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 잘하던 양반이 왜 갑자기 한숨인 걸까.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려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건 마지막 통화에서 여신이 당부했던 말들이었다.
"..설마 저 쫓겨나는 겁니까?"
-그래도 눈치는 좋아서 다행이네. 귀찮게 설명 안 해도 되고 말이야.
"아니, 며칠이나 됐다고.."
-진정해. 지금 당장이라는 소리는 아니니까.
"그 말씀은.."
-당장은 아니지만 이대로 가면 위험할 수도 있단 소리지.
그리 말한 그녀가 다시금 연락을 한 이유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보다보니까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나.
-아니 모처럼 정조역전세계에 미소년으로 떨어뜨려줬는데 말이야. 어? 그러면 니가 주도적으로 따먹고 다니든 아니면 따먹히고 다니든 해야될 거 아냐!
"아니.."
-그럴거면 좆은 왜 달고 있냐?
좆이라니.
여신이 저런 상스러운 단어를 써도 되는 걸까.
-내가 좆이라고 하든 자지라고 하든 니가 뭔 상관인데. 그리고 좆을 좆이라고 부르지 그러면 뭐 아기씨 주입기라 부르리?
말 그대로 순수한 의문을 느끼고 있으려니 휴대폰에서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튼 넌 느긋해도 너무 느긋해.
"아니, 아직 일주일도 안 됐는데.."
-그럼 지금처럼 애무만 하다 원래 세계로 쫒겨나시든가.
"그러면 뭐 덮치기라도 할까요?"
-아니 내 말은 애초에 첫 타겟을 잘못 잡았다는 거지. 야, 상식적으로 겜 시작하자마자 보스몹부터 잡으려고 드는 새끼가 어디있냐?
뭔 소린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여신의 말은 일단 상대적으로 손쉬운 이들과 관계를 맺어서 안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한 다음에 그걸 기반으로 가영이나 세나같은 이들을 공략하라는 소리겠지.
문제가 있다면..
"싫은데요."
바로 그거였지만.
-뭐?
"처음은 무조건 가영이랑 할 겁니다."
-..내 말 이해 못 한 거야? 너 이대로 가다간 뭣도 못해보고 쫓겨난다니까?
"안 그래도 그것과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여신님."
-뭔데.
"보증인을 확보하려면 점막끼리 접촉해야 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러면 꼭 섹스가 아니더라도 키스나.. 뭐 그런 걸로도 가능한 거 아닙니까?"
-..가능하긴 해.
"그럼 그때는 왜.."
섹무새마냥 섹스만 외쳐댄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여신이 한 발 더 빨랐다.
-다른 건 효율이 떨어지니까.
"네?"
-섹스가 뭐야.
섹스가 섹스지 뭐 그럼 다른 의미라도 있나?
-아이 만들기 아냐 아이 만들기.
아까 전부터 느낀 건데 이 여자 여신을 자칭하고 다니는 것 치고는 말본새가.. 거침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쉽게 말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아주 숭고한 의식이라는 소리지.
그래서 가산점이 들어간단다.
아니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키스같은 것도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숭고한 의식 아니냐고 물었더니 꾸중만 들었다.
-키스 한다고 애가 생기니? 펠라 한다고 애가 생겨? 보지에다가! 자지 넣고! 아가방에다가 애기씨 뷰루룻! 해야 생기는 게 아이 아냐. 내 말이 틀려?
"그.. 렇죠."
-그러니까 확실하게 하고 싶으면 섹스가 최고야.
"그런데 그 말씀은.. 노콘아니면 인정이 안 된다는.."
-당연한 거 아냐? 그딴 걸 왜 쓰니?
노콘으로 할거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 하단다.
그래서 물어봤다.
그러다가 애라도 생기면 어떡하냐고.
이런 말을 하면 좀 쓰레기같긴 하지만 아직 이 세계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는데 덜컥 아이라도 생겨서 코가 꿰이는 꼴만큼은 피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게 참으로 가관이었다.
-정 걱정되면 상점에서 뭐라도 사던가.
여기서 뭐라도란 분명 피임 기능을 가진 물건을 말하는 것이겠지.
"노콘 아니면 안 된다면서요?"
-콘돔끼면 점막끼리 접촉이 안 되잖아.
"그 말은 콘돔만 안 끼면 된다는 소리네요."
-그렇지. 안에 사정한다고 무조건 아이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
중요한 건 점막끼리 접촉하는 것, 그리고 안에다가 사정하는 것 그 두 개라는 게 여신의 설명이었다.
-아무튼 난 할 말 다했으니까. 이만 끊는다. 에이 씨.. 너 때문에 괜히 □■■만 쓰고 이게 뭐람..
"네? 뭐라고요?"
-아, 아냐! 아, 그리고 니 전세보증금이랑 주식 처분한 거 캐쉬로 바꿔서 넣어놨으니까 쓸 거면 쓰던가.
아까와는 달리 목소리가 살짝이지만 당황에 젖어있는 걸 보면 자기도 모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을 흘린 것 같은데..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게 뭔지 물어볼 새도 없이 전화가 끊어져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화기록을 확인해봤지만 역시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어우 씨..'
지운 적도 없는데 제멋대로 사라져버린 것 때문에 살짝 오싹해져서 몸을 떨고 있던 것도 잠시, 새로이 확보한 정보를 머릿속에 새기며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꼭 섹스가 아니어도 된다 이거지..'
그럼 쉽지 뭐.
정 위험할 것 같으면 적당히 예쁘장한 여자 한 명 골라서 빨아달라고 하든 빨아주겠다고 하든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고로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분명 입금해놨다고 그랬지?'
해서 과연 얼마나 들어왔을지 확인하기 위해 상점창을 눈앞으로 불러내며 밑으로 내려갔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중간에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대로 계단에서 구를 뻔 했으니까.
'아니 시발..'
왜 이것밖에 안 들어와있지?
이럴 리가 없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전세로 얻은 원룸 보증금으로 들어가있던 게 5천이었고, 주식에다가 때려박은 게 대충 4천 정도였다.
고로 9천 혹은 그에 근접한 금액이 보유 캐쉬란 옆에 찍혀있어야 했다.
헌데 지금 상점 창에 찍혀있는 건ㅡ
[현재 보유 캐쉬:6223만 8750원]
그래, 6천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그것도 충분히 많은 금액이긴 하지만..
'아니 내 3천만원은?'
주식이야 때에 따라 오르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니 약간의 오차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3천만원은 아니지 않은가. 3천만원은.
저번에 여신이 들려주었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세계하고 이 세계하고 시간의 흐름이 크게 차이가 나는 편은 아니라 했으니 그쪽에서도 끽해봐야 5일 정도가 지났을 거라는 소린데 대체 5일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3천만원이 돈삭제 버그에 걸려 증발해 버린걸까.
혹시 뭐 회사 대표가 공식 석상에서 홀딱 벗고 섹시 댄스라도 춘 것일까.
아니, 설령 그게 진짜라 해도 이 정도로 떡락하진 않을 것 같은데..
믿기지가 않았다.
'설마 떼먹었나?'
그래서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시발 내 돈...'
헛웃음을 흘리며 계단 벽에다가 머리는 물론 몸까지 기대고 있던 순간, 주머니 안에다가 쑤셔넣었던 휴대폰이 즈그 주인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띵ㅡ!'하고 경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뱉어냈다.
그렇게 도착한 문자에는ㅡ
무슨 그랜드 캐니언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것마냥 깎아지르는 절벽이 굉장히 인상적인 그래프 하나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가도 하필 이딴 개잡주를 들어가냐? 넌 앞으로는 주식같은 건 절대 하지 마라]
아마도 여신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메시지는 덤이었다.
'아니, 씨발.. 확실하다며..!'
이래서 사람들이 주식하면 안 된다고 그러나 보다.
여신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챙기지도 못했을 돈인데 3천만원이나 되는 금액이 불과 며칠만에 허공에 증발했다고 생각하니 골이 띵하고 가슴 쪽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마냥 마음에 허했다.
동시에 이번에는 정말 확실한 정보라며 일단 넣어두기만 하면 오르면 올랐지 절대로 떨어지진 않을 거라던 친구 놈에 대한 살의가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GME는 씨발.. 니 애미다. 진짜..'
다 털고 나와서 결과만 봐도 이 정도인데 떡락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면 아마 심장이 벌렁벌렁해서 심장마비로 쓰러지든 뒷목 잡고 쓰러지든 하지 않았을까.
'힐링.. 힐링이 필요해..'
해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겨 내 전용 힐링포션이나 다름없는 가영이 기다리고 있을 1층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