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1부
"우리과 환상종이면.. 걔 말하는 거 맞지? 이름이.. 유한이었나?"
"맞아. 이유한."
"걔.. 이런 행사같은 거 거의 참여 안 하는 편 아니었나?"
"거의가 아니라 입학한 후로 한 번도 참여 안 했을 걸."
쉽게 말해 학과 생활을 아예 안 하는 쪽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사실상 학과 내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야 정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학과 내에서, 아니 학교 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축에 속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외모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외모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을 몇 번이나 겪은 경험이 있는 유한은 집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꽁꽁 싸매고 다니는 편이긴 했지만 그런 그라도 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존재했다.
그건 다름아닌 시험을 치룰 때.
신분증에 박힌 사진과 대조를 위해서라도 시험을 볼 때마다 맨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보니 유한은 자연스레 유명해졌다.
그러니까 학과 내에 평소에는 얼굴을 꽁꽁 싸매고 다니는, 어지간한 연예인은 가볍게 씹어먹는 외모의 미남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소문을 전해들은, 혹은 유한의 외모를 직접 목도한 이들이 같은 수업이라는 것을 빌미로 삼아 유한과 친분을 쌓아보려 했지만 그렇게 나선 이들 중에서 유한과 친해지는데 성공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군가 좀 치근덕거린다 싶으면 유한이 그 다음 수업부터는 강의실에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한에게 환상종이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별명이 붙게된 것도 사실 그 탓이 컸다.
어떻게 좀 친해져보려고만 하면 다음 날부터는 애초에 존재하질 않았던 사람마냥 모습을 보이질 않으니 당연히 그런 별명이 붙을 수밖에.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보통이었던 존재가 입학 후 처음으로 학과 행사에 참가의사를 밝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올해 입학하는 새내기들을 위해서라도 새터를 무사히 끝마쳐야할 의무가 있는 세린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야."
"으, 응?"
"너 아는 애들 많지."
"많기야 많은데.."
"그럼 지금부터 은근히 좀 흘려봐. 새터에 환상종 뜰 거라고."
"그, 그래도 될까? 그러다가 소식 전해듣고 갑자기 안 한다고 그러면.."
우리 망하는 거 아니냐.
그 물음이 고스란히 함축되어있는 진희의 표정을 확인한 세린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생각할 때 그리될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으니까.
누군가로부터 자신에 관한 소식을 전해듣는 것도 학과 내에 아는 사람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 점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부터 걱정해야할 건..
이 소식이 바깥으로 흘렀을 때 거기에 반응해서 미친듯이 모여들 신청자들을 어떤 식으로 걸러내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대놓고 말하지는 말고."
"그, 그래. 아, 그러면 너는 뭐하려고?"
"나?"
그거야 당연히 정해져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 동앗줄을 혹시라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붙들어 매는 것.
그게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이었다.
'시발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걔한테 보낸 문자만 따로 빼서 참가비 안 받는다고 하는 건데..
선뜻 참가의사를 밝혀온 걸 보면 그리 될 확률은 낮긴 하지만 만약에 참가비 때문에 마음을 돌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차라리 대신 내버려?'
참가비는 5만원.
시설을 예산이 허락하는 내에서 최고로 좋은 곳으로 잡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분명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 돈이면 치킨을 시켜먹는다면?
두 마리인 척만 하는 두 마리 세트말고 진짜배기 두 마리 세트를 무려 두 번이나 시켜먹을 수 있다.
하물며 피시방을 간다면?
50시간 풀정액을 때릴 수 있는 돈이다.
코노를 가면 진짜 성대가 박살날 때까지 노래를 불러도 남을만한 금액이고.
당연히 자신에게도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그걸 써서 학기 중에도 보기 힘든 환상종의 얼굴을 2박 3일동안 풀코스로 구경할 수 있다면? 덤으로 이대로 가면 폭삭 망할게 분명한 새터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더 나아가 그 누구에게도 친분을 허락하지 않았던 유한과 이걸 계기로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된다면..?
'..5만원이면 싼 거 아닌가?'
단돈 5만원에 무려 세 가지 이득이라니.
더는 고민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문제는 참가비를 내야한다는 사실을 이미 유한이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무턱대고 참가비를 면제시켜주겠다고 말해버리면 이전까지 유한이 보여주었던 패턴상 참가를 철회할 매우매우 컸다.
그렇기에 핑계가 필요했다.
유한의 참가비를 면제시켜줄 수 있을만한 핑계가.
'아.'
그 순간 머리를 스친 것은 자신이 보낸 단체문자에 처음으로 답장을 한 이가 유한이라는 점이었다.
원래 새로 개업하는 가게나 마트에서도 첫 손님에게는 이런저런 상품을 쥐어주지 않던가.
그걸 명분으로 삼아서 학생회에서 대납해주는 식으로 처리를 한다면..
급조해낸 것 치고는 상당히 쓸만할 것 같은 핑계에 세린이 흡족한 표정을 한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쓸만한 핑계를 마련했으니 이제 답장만 하면 되는 상황.
그걸 위해 시선을 밑으로 내린 순간 그런 세린의 눈으로 들어온 것은 유한의 보낸 문자였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흐흫.."
살짝 빙구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가만히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세린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기쁨의 기색이 묻어나왔다.
그랬다.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학생회장이라는, 상당한 책임감이 요구되는 자리에 앉아있는 그녀도 결국 남자와 야한 것에 관심이 많은 한창 때의 여성에 불과했다.
그렇게 헤실헤실대면서도 세린은 유한을 상대로 보낼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혹시 오타라도 날세랴 신중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한채.
그런 식으로 세린이 유한에게 보낼 문자를 주르륵 써내려 갔다가 이건 좀 길다 싶어서 지웠다가 이건 또 너무 짧지 않나 싶어서 다시 써내려가길 반복하고 있을 때 유한은 뭘하고 있었냐 하면..
'뭐야, 왜 답장이 안 오지?'
느긋하게 세나의 브이튜브 채널을 구경하며 답장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그새 인원이 꽉찬 건가?'
확인하자마자 바로 보내긴 했지만 솔직히 그렇게 빨리 보낸 건 아니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괜히 아쉬운 마음에 살짝 입맛을 다시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띵-!
골을 띵하게 만드는 소리와 함께 나름 재밌게 보고 있던 영상이 멈춰버렸다.
기다리던 문자가 드디어 도착한 듯 해서 곧바로 확인해보니 꽤나 급하게 작성한 듯한 문자 하나가 도착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네네 상관업씁니다.
뒤이어 도착한 건 정정된 것이었고.
-네 괜챃습니다.
물론 새로 도착한 것에도 오타는 있었다.
보아하니 처음에 낸 오타 때문에 살짝 당황한 듯 해서 모르는 척 해주기로 했다.
그리고는 참가비를 어디다가 입금하면 될지 묻는 계좌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참가비는 저희 학생회 측에서 대납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져버렸다.
-사실은 저희가 학우 분들의 참여가 꽤 급했던 상황이라 처음으로 신청하신 학우 분한테는 참가비를 면제해드리기로 했거든요.
그러시단다.
왠지 모르게 급조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내용이었지만 굳이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받아야하는 돈을 안 받겠다는데 나야 사양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 그런가요? 제가 처음이었나 보네요?
-네 ㅠㅠ 아무래도 방학 중이라서 신청주시는 분이 적네요.
그런 식으로 앓는 소리를 한 번한 여자가 이내 이런저런 사항들에 대해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쉬지 않고 띵띵하는 소리를 뱉어대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아까 보낸 단체문자에도 다 적혀있었던 것을 굳이 손가락 아프게 다시 적어서 보내고 있는 걸 보면 나한테 관심있어서 이러는 건가 싶었으니까.
'하긴..'
없을 수가 없겠지.
-그러면 출발하는 날 뵙겠습니다.
-네!!
아무튼 가만히 있으면 계속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문자를 보낼 기세라 대충 그런 식으로 마무리하고서 침대에 뉘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화장실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솔직히 좀 귀찮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오후가 되면 지나의 손에 잡혀 체육관으로 끌려가게 될 예정이니 미리 씻어두긴 해야했으니까.
'아, 맞다.'
새터 다녀올 거라고 말도 해놔야 되는데 말이다.
다 괜찮은데 지나가 문제였다. 이제 딱 3일차긴 하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순순히 보내주려 할 리가 없었으니까.
물론, 이미 참가비까지 낸 상태라고 하면 제 아무리 지나라 해도 끝까지 반대할 수는 없을테지만..
'몸살나게 만들어서 못가게 만든다던지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을 차마 배제할 수가 없어서 문제였다.
내가 세나의 방송에 출연한다고 하니 날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내 체력을 쥐어짰던 사람이 바로 지나다.
그런데 학교 행사라고는 하지만 하루도 아니고 무려 2박 3일동안 외박을 한다고 하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밝히지도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지나의 기분이 좋아보이는 때를 노려 은근슬쩍 그 이야기를 꺼내봤는데ㅡ
"..뭐?"
내 다리를 잡고 내가 봐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던 지나의 표정이 단번에 험악해졌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불과 몇 초전까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말이다.
'뭐지..'
버근가?
어떻게 사람 표정이 저렇게 단 한 순간에 싹 바뀔 수가 있지?
연기로 밥 벌어먹고 사시는 분들도 저렇게는 못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문제는 얼굴만 험악해진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꾸우우욱-
내 다리를 감싸쥐고 있던 손, 그곳에도 얼굴처럼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은 견딜만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응? 유한아. 다시 말해봐."
"그.. 새터 가기로 했거든. 그래서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운동을 못하지 않을까.."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라는 말은 2박 3일이라는 소리네?"
"그, 그렇지? 그런데 누나 나 슬슬 다리가 좀 아픈.."
"2박 3일?"
이건 명백히 내 실수가 맞았다.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적어도 몸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꺼냈어야 했는데.
꽈아아악-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내 무릎 위를 감싸쥔 지나의 손에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손등에 핏줄이 툭 불거져나와 있는 게 흡사 레몬이라도 짜는 듯 했다.
아마 저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내 무릎이 아니라 레몬이었다면 지금쯤 그 레몬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뭉개져 있었겠지.
문제는 내 무릎도 곧 그리 될 것 같다는 것이었고.
"유한아."
"으, 응."
"너 운동시작한지 며칠 째지?"
"이틀..?"
"그래 이틀 째지. 내일이면 삼일 째고."
"..."
"목요일이면 어디 보자.. 5일째네?"
지나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운동 시작한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땡땡이부터 칠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이럴 거면 왜 가르쳐달라고 한 거냐고.
"자꾸 이렇게 누나 실망시키고 그럴 거야?"
'허..'
무턱대고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이야.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생각도 없었지만.
"그.. 나도 원래는 거절하려고 했는데.. 친구가 제발 한 번만 어떻게 안 되겠냐고 그러길래.."
유한의 휴대폰을 보면 알 수 있듯 유한에게는 친구라 부를 수 있을만한 대상이 존재하질 않았다.
너무 압도적으로 잘생긴 탓에 거기에 압도당해버린 같은 남자들이 다가오질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유한이 애초에 친구같은 걸 사귈 생각을 안 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고.'
중요한 건 그 사실을 지나가 모를 리 없다는 점이었다.
일부러 존재하지도 않는 친구 핑계를 댔던 건 그래서였다. 유한에게 친구라 부를만한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라면 어떤 식으로든 그 단어에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그게 정답이었다.
"친구?"
"어."
"..혹시 여자야? 같은 학과?"
"친구라고 했잖아. 당연히 남자지."
"어떻게 알게 된 앤데?"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꼬치꼬치 캐물을 거라고는 생각 못하긴 했지만.
물론, 조금 집요할 뿐이지 그렇게까지 어려운 질문들은 아니어서 적당히 둘러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알겠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다녀와."
결국 지나의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아니지."
네?
"재학생이면 따로 차타고 가도 상관없을 거 아냐?"
"어, 글쎄.. 거기까진 나도 잘.."
"아마 상관없을거야. 그러니까 그냥 누나가 태워다줄게."
"그, 그래.."
뭐, 어쨌든 허락을 받긴 했으니까..
"유한이 너도 불편한 버스보다는 그 편이 훨씬 좋지?"
"어, 응.."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속으로 그리 되뇌이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지나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