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1부
'설마..'하는 의심이 확신으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순간이면 충분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밖에는 없었으니까.
가영이 다름아닌 날 상대로 저런 모습을 보일 이유가 말이다.
'좆됐네..'
물론, 당혹스럽고 당황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때 충동적으로 가영의 입술에 입을 맞춘 순간 몸을 타고 올라왔던 쾌감은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으니까.
맘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또 느껴보고 싶을 정도였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가영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하면 좋을까.
아니, 어떻게 할 수는 있나 이거?
어떤 느낌이냐면 친구들하고 신나게 놀고 집에 들어왔는데 거실 테이블 위에 떡하니 놓여져있던 입대영장을 발견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아니 그 이상으로 당황스러웠다.
덕분에 삐질하고 배어져나온 땀방울들이 등을 따라 흘러내리는 게 아주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감각이 어찌나 선명한지 다시는 느껴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표정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그것을 부여잡고 있는 것 뿐이었다.
만에 하나라고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가영이 그 상황을 꿈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어쩌면 그것 때문에 저렇게 불편해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표정을 관리했다. 그 와중에도 시시각각 뿜어져나오는 식은땀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지만.
아마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내 등을 봤다면 틀림없이 저거저거 어디 아픈갑다 했겠지.
그런 식으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려대고 있는 동안에도 가영은 예의 그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은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채 묵묵히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직감했다.
무언가 큰 게 온다면 그건 아마도 식사 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해야할지 아니면 이 자리가 머지않아 마무리 될 거라는 사실을 앞에 두고 두려움에 벌벌 떨어야할지 솔직히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세나와 지나가 제몫으로 푼 것들을 깔끔하게 비워내며 식사를 마무리 지었고..
달그락-
둘의 뒤를 이어 가영이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가 내게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느껴졌다. 귓가로 울려퍼진 건 분명 달그락하고 자그마한 소리였는데 내 옆으로 쿠궁하고 번개가 떨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뭐야, 아직 한참 남았네?"
지나가는 길에 내 밥그릇이 아직도 반이 넘게 채워져있는 걸 확인한 세나가 그리 지껄이고는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고, 지나도 이빨이나 닦아야겠다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 둘의 뒷모습을 향해 제발 가지말라고, 날 버리지 말라고 속으로 애타게 외쳐봤지만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방 안에는 나와 가영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유한아."
어제 들었던 것에 비하면 살짝 무겁게 변한 목소리가 푸욱하고 귀를 꿰뚫었다.
"..네?"
맘 같아서는 못 들은 척 하고 싶었지만 이름을 불린 상황에서 그래봐야 내가 그녀에게 몰래 한 일을 인정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기에 그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내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사람마냥 창백하지 않기만을 속으로 간절히 바라면서.
그렇게 가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을 향해 날아든 것은 나같은 건 감히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고모?"
시선이 무거웠다.
그래서 덩달아 마음도 무거워졌다.
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러버리고 만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진짜 깨어있었구나..'
이제 어쩌지?
이제 어떻게 해야..
제멋대로 팽팽 돌아가려 하는 눈동자를 원래 자리에다가 붙들어놓고 속으로 미친듯이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영의 얼굴 위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번지더니..
"..아무 것도 아니란다."
'어..?'
"천천히 먹으렴."
"네, 네.."
그녀가 그런 식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듯 차마 식사 중인 날 상대로 그런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들 순 없었던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끝이었다.
충분히 식사 후를 기약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가영은 자긴 그럼 이만 들어가서 쉬어야겠다며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설거지는 자신이 할테니 다 먹고 나서 물에 담궈놓으라는 말과 함께.
'아니, 이걸.. 살았다고? 진짜로?'
솔직히 기쁨 보다는 얼떨떨함이 더 컸다.
설마하니 가영 쪽에서 회피를 택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한 걸까.
밥그릇 안에 반도 넘게 남은 밥이 이러다가 누룽지마냥 딱딱해지겠다며 푸념을 해대는 듯 했지만, 지금 그런 것따윈 중요치 않았다.
가영이 어째서 방금과 같은 선택을 했는지 추측해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방금 가영이 보여준 행동은 명백히 일반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아니, 일반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할만한 행동조차 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한 번 상상해봤다.
만약 내가 가영과 같은 입장에 처해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를.
답은 금방 나왔다.
그것만큼 간단한 것도 또 없었으니까.
분명 그런 짓을 벌인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든 차분하게 잘 이야기해서 설득을 하든 했겠지.
그게 일반적으로 보일만한 대처다.
허나 가영은 그런 식으로 대처하는 대신 '회피'라는 말도 안 되는 선택지를 택했다.
'왜?'
나로서는 그게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뭘까.
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일까.
추측은 더 먹을 생각도 들지 않는 아침밥을 대충 정리하고 3층으로 올라오고 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추측의 끝에서 내 머릿속을 반짝하고 빛낸 것은ㅡ
'아.'
가영과 관련된 한 가지 설정이었다.
그러니까 바깥에 나가서 일하는 게 일반적인 이 세계 여성들과는 다르게 가정적인 성격이라는 설정 말이다.
가정적인 성격을 지닌 이에게 소중한 건 무엇일까.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본인의 가정일 것이다.
그러니 가영에게도 그녀가 본인의 손으로 직접 꾸리고 여기까지 이끌고 온 이 가정이 소중할테지. 어쩌면 본인보다도 더.
그런데 만약 아까 거기서 내가 그녀에게 몰래 한 짓에 대해 언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답이야 뻔했다.
그토록 소중한 것이 망가져버리고 말겠지.
어쩌면 망가지는 수준을 넘어서 산산조각 나버릴 수도 있었고.
물론, 그렇게 되고 나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다면 고칠 수야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친 것이 과연 망가지기 전과 똑같을까.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만큼은 자신있게 답할 수 있었다.
'그럴 리 없지.'
속으로 그리 되뇌인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가영이 날 꾸짖어도 모자란 상황에서 어째서 회피라는 말도 안되는 결정을 내렸던 건지를.
그녀는 할 수 없었던 거다.
본인이 평생을 다 바쳐 가꾸어 온 이 공동체가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기에 그걸 본인의 손으로 망가뜨린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가 없었던 거다.
'그랬구나.'
그랬단 말이지.
참으로 우습게도 가영의 진심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도달한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가영이 괘씸하다는 것이었다.
입을 맞출 수 밖에 없도록 유혹해놓고선 없던 일로 하자니.
물론 본인은 정말 아무런 자각없이 한 행동이었을테지만 당시 나는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당장이라도 가영의 몸 위로 내 몸을 포개고 싶다는 욕망이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울컥울컥하고 솟구치는데 덕분에 손까지 덜덜 떨릴 정도였다.
난 그랬는데, 그래서 키스만으로 참으려고 했는데.. 소년의 첫키스를 가져가 놓고서는 이제와서 없던 일로 하자니.
'그럴 순 없지.'
암, 그렇고 말고.
가영이 현실을 직시하는대신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영의 본심이라면..
'어울려줘야겠지.'
과연 그녀가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덕분에 당분간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할 것 같았다.
그래야 세나나 지나에게 의심받지 않고 가영의 방을 드나들 수 있을테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아예 휴대폰까지 챙겨와 일주일짜리 알람을 세팅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띵-!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휴대폰으로부터 터져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듣자마자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이제와서 부르는 건가 싶었으니까.
그런데 아니더라.
가영이 보낸 문자였다면 그녀의 이름이 떴을 텐데 짤막한 알림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건 생전 처음보는 번호였으니까.
'스팸인가?'
생겨먹은 것과는 달리 '이유한'의 인간관계는 일천하기 그지없었다. 진짜 이런 얼굴을 가지고 왜 이렇게 사나 싶을 정도로.
그렇기에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컸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기에 확인 정도는 해보기로 했다.
해서 빨간 표시가 달려있는 메시지함으로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예상과는 다르게 스팸은 아니더라.
'아, 얘 대학생이었지..'
사실상 스팸이나 다름없는 것이긴 했지만.
뜬금없이 도착한 문자 한 통.
그것은 다름아닌 유한이 다니고 있는 학과에서 온 것이었다.
보나마나 특강이니 어쩌니 하는 내용일게 뻔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없애두지 않으면 자꾸만 눈에 거슬릴게 뻔한 1표시나 없애자는 마음으로 서두에 문예창작학과라고 떡하니 적혀있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꾹 눌렀다.
'응..?'
헌데 정작 튀어나온 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노아 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학생회장 한세린입니다. 이렇게 연락을 드리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시작된 문자는 끝에 가서 이번 년도에 새로 입학하는 신입생들을 위한 새내기 배움터가 진행되는데 거기에 참가하여 도움을 줄 재학생들을 모집하고 있으니 부디 많은 참여바란다는 식으로 2박 3일동안 노예가 되어줄만한 이들의 참여를 호소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어이가 없었다.
2박 3일동안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가봐야 새내기들 쫓아다니며 챙기고, 모르는 것 있으면 알려주고 한다고 미친듯이 바쁠텐데 참가비까지 내야하면 대체 누가 참가할까 싶었으니까.
이래가지고 인원 모집이나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메시지 말미에 찍혀있는 번호를 꾹 눌러서 복사했다.
그리고는 그 번호로 받는 사람이라 적힌 칸에다가 때려넣고는 휴대폰을 두들겨가며 거기로 보낼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대충 이제 막 3학년이 되었는데 혹시 3학년도 참가할 수 있는 거냐는 식으로 말이다.
'새내기 배움터?'
이건 못 참지.
유한이 이제 갓 20대로 진입했을 이들을 상상하며 열심히 참가 문자를 써내려가고 있던 그때 유한을 포함해 노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인 이들에게 단체문자를 돌리는 작업을 무사히 끝마친 세린은 푸욱하고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책상 위로 엎어졌다.
유한보다 한 살 많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앳되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근심이라는 감정이 가터벨트에 매달린 콘돔풍선마냥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대체 뭐가 그리 걱정인지 책상 위에 엎어진 세린이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던 그때 그녀가 엎어져있던 학생회실 안으로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하나로 모아묶은 포니테일을 찰랑찰랑 흔들며 등장한 그녀는 학생회에서 총무를 담당하고 있는 홍진희였다.
"어떻게 됐어?"
"일단 문자는 다 보냈어."
"답장은?"
쓸데없이 뜸들이지 말고 얼른 말해보라는 투로 던져진 진희의 물음에 세린이 포옥하고 한숨을 내쉬며 그녀와 함께 엎어져있던 휴대폰을 집어들어 진희를 향해 내밀었다.
그렇게 진희를 향해 내밀어진 휴대폰 안에는 그 어떤 표시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완벽한 공백.
그것을 확인한 진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큰일났네.. 이러다가 한 명도 신청 안 하는 건 아니겠지?"
문자를 돌린지 5분도 안 된 시점이긴 했지만 진희의 우려는 꼭 과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몸담고 있는 문예창작학과에 소속된 이들의 아웃사이더적인 기질은 학교 내에서도 꽤나 유명한 편이었으니까.
나쁘게 말하면 그렇고 좋게 말하면 예술가적인 기질이 강하다고 해야할까.
덕분에 공적인 행사만 벌였다 하면 참여율이 다른 학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떨어졌다.
그렇기에 이번 새터도 따로 참가자들을 받기보다는 학생회 소속 인원으로만 치루려고 했었는데..
"그년들은 왜 하필 지금 식중독에 걸려가지고는.."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방학이랍시고 친한 이들끼리 단체로 동남아로 해외여행을 떠났던 이들이 뭘 잘못 쳐먹었는지 몰라도 사이좋게 노로 바이러스에 걸려 입원해버린 것.
뒤늦게 그 소식을 전해듣고 부랴부랴 재학생 중에 참가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지만.. 자꾸만 불안한 예감이 드는 건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총무와 회장이 사이좋게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웅웅-
다시금 주인과 함께 책상 위에 엎어져있던 세린의 휴대폰이 짧게 두 번 진동했다.
전화가 아닌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그 진동에 퍼뜩 몸을 일으킨 세린이 곧바로 도착한 문자부터 확인했고, 이내 휴대폰에 고개를 쳐박다시피하고 있던 세린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뭐야.. 혹시 스팸이야?"
그에 기대감 가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던 진희의 눈동자 속으로 실망이라는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한 순간..
"진희야.."
덜덜 떨리고 있는 몸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가 세린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우리.. 살았어."
그 말과 함께 진희 쪽으로 쑥 내밀어진 세린의 휴대폰 화면 안에는ㅡ
-그 혹시 3학년도 참가할 수 있나요? 가능하다면 참가하고 싶은데..
다름아닌 유한이 갓 전송한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우리과 환상종'이라는 다소 우스운 호칭을 떡하니 매단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