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1부
가영이 방에서 나오는대로 바로 식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욱씬거리는 몸을 이끌고 밥상을 차리고 있으니 세나는 자기가 데리고 오겠다며 지나가 2층으로 총총 뛰어올라갔다.
"자자, 얼른 가서 앉아."
그리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2층으로 올라갈 때보다 더 생생해진 듯한 지나와 웬 좀비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자세히 확인해보니 그건 좀비가 아니고 세나였다.
지나에 의해 앞세워짐 당한 채 식탁을 향해 느릿느릿하게 다가오는 세나의 얼굴은 그 정도로 심각했다.
어떤 얼굴이냐면 잠이 오질 않아서 해가 뜰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가 겨우겨우 잠드는데 성공했는데 한 두 시간쯤 자다가 강제로 깨워진 듯한 그런 얼굴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그런 지 몰라도 세나의 눈밑에는 미처 다 풀어내지 못한 피로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아.. 배.. 안 고픈데.."
발을 질질 끌며 겨우겨우 식탁 앞에 도착한 세나가 그리 말하고는 그대로 식탁 위로 엎어졌다.
물론, 그런 세나의 항변은 지나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잔말말고 차려줄 때 먹어. 설거지까지 다 했는데 그때가서 배고프니 어쩌니 징징대지 말고."
"아으으.."
졸려죽겠는데 잠도 못 자게 하는 언니가 못내 원망스러웠는지 식탁 위에 엎어진 채 입술을 삐죽하고 내미는 세나를 힐끔거리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누나 설마 진짜로 잠 못 잔거야?"
정곡이었나 보다.
식탁 위에 엎어져있던 세나의 몸이 저리도 움찔대는 걸 보면 틀림없이 그런 거겠지.
"어휴, 그게 뭐가 무섭다고."
"...."
"못 잘 정도로 무서웠으면 그냥 올라오지 그랬어. 진짜로 문 안 잠궈놨는데."
"그.. 런 거 아니거든? 브튜브 채널 때문에 회의가 길어져서 그것 때문에 늦게 잔 거거든?"
"네에네에 그러시겠죠."
평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대화.
그걸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지나가 놓칠 리 없었다.
탁-!
"무슨 소리야. 그건 또."
아니나 다를까 나를 도와 식기를 세팅하고 있던 지나의 눈이 착 가늘어졌다.
"아, 어제 세나 누나랑 같이 공포게임 했거든. 그런데 엄청 무서워 하더라고."
물론 나는 그때 봤던 것들보다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지나가 훨씬 더 무서웠다.
걔들은 암만 살벌하게 생겼어도 사실 실체도 뭣도 없는, 말 그대로 데이터 쪼가리일 뿐이지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지나는 실체도, 물리력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니까.
똑같이 살벌하게 생겼어도 파급력이 다를 수 밖에 없달까. 물론, 지나가 날 때리는 경우는 잘 상상이 되지 않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내가 무서워서 혼자 못 잘 것 같으면 내 방 올라와서 자라고 했지."
내가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은 순간 지나가 자신의 얼굴 위로 띄워올린 표정은 뭐라고 해야할까.. 그래, 복잡함 그 자체였다.
마치 신입사원이 처음으로 작성해서 올린 보고서를 마주한 듯한 대리나 보일 법한 그런 표정이랄까.
그 왜 있지 않은가.
지적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 지 혼란마저 느끼는 표정 말이다.
지금 지나의 얼굴 위에 맺혀있는 게 딱 그랬다.
"아니, 그게 무슨.."
그렇게 얼을 타고 있던 것도 잠시, 지나가 이내 황당하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 중얼거림 자체는 끝을 맺지 못했다. 내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연기하며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응? 왜?"
"왜냐니 그야.."
지나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그렇겠지.
방금 내 발언으로 인해 내가 그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과 자신이 그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깨달았을테니까.
그런데 여기서 그 간극을 지적해버린다면..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나라는 존재를 '동생'이자 '가족'이 아닌 '이성'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이다.
"어렸을 때는 몇 번 같이 잔 적 있잖아."
"그건.. 어렸을 때잖아."
없으면 내가 꿈을 꿨는 갑다라고 대충 둘러대려고 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던 모양이다.
해서 안심하고 있으니 지나의 입에서 목메인 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다를 게 있어?"
"..아무튼 안 돼. 남자가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설령 그게 가족이더라고 해도."
날 다그치듯 말하는 지나의 목소리에서는 어딘가 조급함마저 느껴졌다.
"누나는 맨날 그러더라."
"..뭐?"
"맨날 남자가 남자가.. 나도 이제 22살이거든?"
설마 내가 자신의 말에 그런 식으로 말대꾸를 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일까. 지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긴 그렇겠지.
지금까지 지나에게 있어 유한은 말 잘듣는 착한 동생이었을테니까.
그게 보통이었던 이가 말대꾸는 물론 반항적인 모습까지 내보이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물론, 그건 말 그대로 잠깐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원래 모습을 회복한 지나가 내게 운동을 가르칠 때보다도 엄해보이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렸다.
"이유한."
평소보다 훨씬 낮게 깔린 지나의 목소리에는 듣는 이를 위축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나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한 아까 전부터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바짝 엎드려있던 세나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과거에 지나한테 까불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알았어. 알았다고. 안 하면 되잖아."
"후.."
"내가 뭐 아무한테나 그러는 줄 알아? 다 누나들이니까.."
"가족이니까 더더욱 지킬 건 지켜야 되는 거야."
"네엡."
그렇게 지나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으니 가영의 방문이 열리며 옷 갈아입는데 뭐 이리 오래 걸리나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 있었니?"
"아니에요. 고모 얼른 와서 앉으세요."
숙취 때문에 속이 많이 쓰린가 보다.
표정이 저렇게 불편한 걸 보면 틀림없이 그런 거겠지.
그나저나 오늘따라 왜 저렇게 꽁꽁 싸맨 걸까. 아직 출근시간도 멀었는데 말이다.
'혹시 춥나?'
숙취에 하도 시달리다보니 오한이라도 든 건 아닐지 걱정이 돼서 얼른 몸을 움직여 가영이 앉을 자리에다가 뜨끈한 김을 피워올리는 된장국부터 떠다놓았다.
"속 많이 쓰리시죠? 국부터 드세요."
그녀들과 함께 생활한지 이제 고작 3일째긴 하지만 늘 미소가 기본사양이었던 가영이 그런 식으로 표정을 어색하게 굳히고 있으니 걱정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아프면 저러나 싶었으니까.
"그, 그래.."
내 딴에는 다른 뜻은 없고 정말 그래서 그리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가영의 표정이 자리에 앉기 전보다 훨씬 더 어색하게 변했다.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혹시 내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게 부담스러운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여태껏 가영은 대접하는 입장이었지 대접을 받는 입장은 아니었을테니까.
일터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집에서도 그랬을테지.
헌데 이제와서 남이 해주는 대접을 받으려니 민망하기도 하고, 낯간지럽기도 하고 그런가 보다.
그것과는 별개로 국만큼은 빨리 맛봐줬으면 했다. 그래야 속이 확 풀릴테니까.
"얼른 드세요."
"으, 응.. 그래.."
무슨 고사라도 지내는 것마냥 국그릇 안에 담긴 걸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가영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평소같지 않은 가영의 모습에 의문을 느낀 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세나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그녀가 가영의 앞에 놓여져있던 것을 기웃거렸다.
그러더니 그 안에 둥둥 떠다니고 있던 것을 확인하고는 와락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게 아닌가.
"엑.. 야, 이거 뭐야? 설마 베이컨이야?"
"응, 베이컨 맞는데? 왜?"
"아니, 베이컨을 왜 된장국에다가.."
이럴 거면 차라리 구워서 주지 그랬냐고 툴툴대는 세나의 앞에다가도 국을 떠서 놓아주었다.
"밥상 차리는 동안 손 한 번 까딱 안 한 사람이 반찬 투정까지 하는 거야?"
"아니.. 그러면 불러서 시키든가. 지가 안 불러놓고 씨이.."
"잔말말고 일단 드셔보시기나 하세요."
그리 말하고는 지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내가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나 당분간 나트륨섭취 줄여야 되서 국은 패스."
누가봐도 핑계였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해서 내 몫만 떠서 자리에 앉았다.
"근데 에어프라이어로 뭐 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아."
그리고 보니까 고등어도 구워놨었지.
어쩐지 반찬이 영 부실한 것 같더라니만..
충분히 다 구워지고도 남았을 시간이라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까지 접시에 가지런하게 담아서 내왔다.
"엑.. 생선.."
"왜? 고등어 맛있잖아."
"비린 건 좀.."
냉장고 안에 소세지가 햄같은 게 엄청 많길래 유한을 위한 것인가 했더니만 세나를 위한 것이었나 보다.
아니 그런데 24살먹고 반찬투정이라니.. 이 안타까운 누나를 어쩌면 좋을까.
"계란프라이라도 해주면 안 돼..?"
젓가락을 입에 문채 그리 말하는데 차마 거기에 대고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귀여웠으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란프라이면 돼?"
"하는 김에 소, 소시지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세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런 세나를 가만히 내버려둘 지나가 아니었다.
"야, 할 거면 네가 직접 해. 괜히 유한이 시키지 말고."
"아니.. 유, 유한이가 해준다고 그래서.."
담당일진의 등판에 순식간에 쪼그라든 세나가 날 향해 구조신호를 보내왔다.
"괜찮아 누나. 어려운 것도 아닌데 뭐."
"후우.. 진짜 저건 언제 철이 들런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지나에게서 눈을 돌려 그 새 기가 살아난 세나를 향해 싱긋하고 웃어보였다.
"어제 누나 덕분에 즐거웠으니까 특별히 오늘만 해주는거야."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냉장고 앞으로 향하니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등뒤로 따라붙었다.
"그, 흠흠, 그럼 나도 프라이 하나만.. 그.. 노른자에 소금 살짝 뿌려서."
"소금 섭취 줄여야 된다고 그러지 않았어?"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아니이.. 그.. 운동하니까 단백질이 좀 땡기네..?"
단백질이 땡긴다라.
나도 단백질 줄 수 있는데.
민망하다는 표정을 한채 그리 말하는 지나를 보니 대충 그런 내용의 섹드립이 입밖으로 튀어나가려 했지만 다시 잡아서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며 가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모는요?"
"으, 응?"
"고모도 해드릴까요?"
"아, 아냐.. 고모는 괜찮아.."
그렇다길래 딱 계란 세 개하고 비엔나 소시지만 꺼냈다.
그렇게 챙겨든 것들을 빠르게 구워 식탁 위로 내가니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세나의 젓가락이 접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비엔나 소시지를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를 한 번에 집어 입 안으로 밀어넣고는 그대로 와앙하고 베어무는데ㅡ
"아으.."
확실히 초딩입맛이긴 한가 보다. 고작 소세지 하나에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입 안으로 쫘악하고 터지는 짭쪼름한 육즙이 각별하기라도 했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세나를 바라보다가 맞은 편에 앉아있는 가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응?'
뭐지 방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가영의 시선은 식사 중임에도 불구하고 식탁이 아닌 냉장고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게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 해도 부자연스럽게 느낄만한 시선처리였고, 그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소시지, 밥, 그리고 또 소시지하고 밥.
다른 반찬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오직 그 두 개만 열심히 퍼먹다보니 목이 메이기라도 했던 것일까.
목에 뭔가 걸리기라도 한 것같은 표정을 한채 살짝 허둥대던 세나가 그녀의 앞에 놓여져있던 국그릇을 집어들어 호록 소리를 내며 들이켰다.
아직 잠기운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던 세나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하고 뜨인 건 그 직후였다.
"어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지?"
그런 내 물음에 세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호록하는 소리를 연거푸 터뜨리며 열심히 국을 들이켜댔다.
보아하니 상당히 입에 맞는 모양.
순식간에 한 그릇을 싹 비우고서는 빈 그릇을 손에 든채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는 세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드르륵ㅡ
바로 옆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신세계를 맛본 세나와 그런 세나를 보고 뒤늦게 합류한 지나가 된장국을 박살내는 동안 난 뭘 하고 있었냐면..
"여기요. 고모."
가영에게 생선 살을 발라주고 있었다.
가만히 숨쉬고만 있어도 골이 울리는 듯한 느낌일텐데 그런 그녀에게 잔가시까지 발라내라 시키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라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리했던 것이었는데..
'뭐지..?'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오늘의 가영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내가 지난 이틀 동안 봣던 그녀라면 그런 내 행동에 민망해하면서도 은근히 기뻐했을텐데 지금 내 식사시중을 받고 있는 그녀에게서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내 시중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표정만이 가득할 뿐.
대체 왜 저러나 싶어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오늘 아침에 그녀에게 했던 일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행동에 대한 기억.
그것이 머리를 장악한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덜컥하고 흔들리며 불안이라는 감정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씨발.. 설마..'
그때 깨어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