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1부
잠에서 깨기 무섭게 감탄부터 나왔다.
'와ㅡ'
어쩜 이렇게 안 쑤시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을 수가 있지.
역시 괜히 한국 헬스계 최고 존엄이라 불리는게 아니구만.
아주 그냥 몸을 확실하게 조져놨네.
몸 상태가 이래가지고 오늘 운동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눈을 꿈뻑꿈뻑하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던 것도 잠시, 이내 깨달았다. 고민의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걸.
지금은 운동같은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과연 침대에서 자력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ㅡ
그래, 그것부터 걱정해야함이 맞았다.
맘 같아서는 평생토록 이대로 가만히 있고만 싶었다. 그 정도로 몸이 미친듯이 쑤셨으니까.
그럼에도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던 건 해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방송이 너무 늦게 끝나버려서 걸렀으니까..'
저녁을 못 차려줬으면 아침이라도 차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끌고 밑으로 내려갔다.
솔직히 쉽지는 않았다. 다리가 하도 떨려서 손으로 벽을 짚고 걸어야 했으니까.
'진짜 더럽게 허약하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서 살던 내 원래 몸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푹 고꾸라질 것만 같은 위험천만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 몸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짓던 것도 잠시, 발을 질질 끌며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 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뭐가 좋으려나.
아침이니만큼 거창하게 차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봐야 부담스럽기만 할테니까.
그래도 국 정도는 있는 게 좋겠지.
뭘 끓인다..
고민하고 있으니 눈으로 들어온 건 냉장고 맨 윗칸에 몰래 모습을 숨기고 있던 일본식 된장이었다.
'적된장인가?'
확인해보니 백된장이었다.
백된장이라.
항아리 모양을 한 용기 안에 담겨있는 것을 요리조리 돌려보고 있으니 마침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레시피가 하나 있었다. 뜨끈하게 국이 먹고 싶은데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끓이기는 귀찮을 때 종종 써먹었던 것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분이면 되는 마법의 레시피.
짧은 조리 시간만큼이나 재료도 간단한 편이었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본 버전에는 딱 세 개밖에 안 들어가니까.
된장이야 이미 내 손에 있으니 패스하고.
양파도.. 뭐 당연히 있을 거고.
문제는 역시 베이컨인데..
'있으려나?'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신선칸부터 뒤져보니 손이 시려워서 뒤질 것 같을 때쯤 야채들 사이에 교묘하게 몸을 숨기고 있던 베이컨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러면 국 끓이는데 필요한 재료는 다 갖춰졌고..
그래도 이 고생을 해가며 차리는 건데 달랑 국 하나만 끓이고 끝내자니 뭔가 좀 아쉬워서 마침 눈에 띈 고등어나 굽기로 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흰 쌀밥에 된장국,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구운 고등어.
상상만해도 침이 절로 나오는 조합 아닌가.
'어우 씁..'
그새 입 안 가득 흘러나온 것을 꿀꺽 삼키고는 그대로 조리대로 향했다.
오늘이나 내일 쯤 밥상 위로 올라올 예정이었는지 고등어는 생물이었고, 덕분에 따로 해동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걸 굽는 건 에어프라이어에게 맡기기로 했다.
먼저 종이 호일부터 깔고 그 위에다가 고등어를 넓게 펼쳐서 올렸다. 에어프라이어 자체가 대용량이라서 한 번에 두 마리까지 들어가더라.
딱 보니까 자반 고등어인 것 같아서 따로 소금을 뿌리진 않았다.
그렇게 에어프라이어를 돌려놓고, 싱크대 앞으로 돌아와 물부터 올린 뒤 양파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더럽게 미끌거리네.'
아무래도 이 몸은 단순히 몸만 약한게 아니라 눈물샘마저 허약한 듯 했다.
양파를 썬 것도 아니고 껍질만 벗겨냈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눈이 따끔따끔거리는 걸 보면.
'쓰읍.."
따끔따끔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눈쪽으로 손을 가져갈 뻔 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다가 참아냈다.
그렇게 힘겹게 벗겨낸 것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겸사겸사 베이컨도 같이 썰어줬다.
그리고는 때마침 팔팔 끓기 시작한 냄비 안에다가 된장을 풀었다.
다만 그냥 풀지는 않았다.
그냥 풀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그래서야 나중에 텁텁한 맛이 날게 뻔하니까.
해서 내 손바닥만한 체에다가 된장을 적당량 덜어서 숟가락을 이용해 살살 풀어주었다.
덜어낸 게 부스러기같은 모습으로 변할 때까지 그 작업을 반복해주니 체에 남은 건 된장 빚는데 희생된 콩들의 파편이었다.
그것을 대충 싱크대 안에다가 던져놓고는 된장국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영롱한 자태를 뽐내며 팔팔 끓고 있는 것 안으로 미리 썰어놓았던 것들을 밀어넣었다.
들어갈 건 전부 들어간 상황.
이제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3분만 더 끓이면 된다.
방금 넣은 양파가 투명한 색으로 변할 때까지 끓여주면 백된장 특유의 단맛에다가 양파의 단맛, 그리고 베이컨의 농후한 풍미와 짭쪼름함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된장국이 탄생하겠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더 남은 상황.
해서 뭐라도 하나 더 할까 고민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거실 안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쾌하기 짝이 없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건 다름아닌 지나였다.
새벽부터 조깅이라도 하고 온 것일까.
딱봐도 굉장히 가벼울 것 같은 바람막이에다가 쫙 달라붙는 레깅스라는, 다소 추워보이는 복장을 한 지나의 얼굴은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응? 뭐야, 유한이 너였어?"
"운동갔다 온 거야?"
"응, 동네 산책로 따라서 가볍게 뛰고 왔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그리 말하며 개운하다는 듯 웃는 지나의 모습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운동을 했는데 개운하다니.
힘들어야 정상 아닌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런 내 속내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신고 있던 신발을 가볍게 벗어던진 지나가 이내 내 등뒤에 자리하고 있던 냄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코를 작게 찡긋찡긋거린 건 덤이었다.
"뭐야, 밥하고 있었어?"
"응, 어제 방송이 너무 늦게 끝나서 저녁 못 챙겨 드렸잖아. 그래서.."
"참..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도 되는데.."
너도 참 어쩔 수 없다는 듯 쓰게 웃은 지나가 이내 날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된장국?"
"응, 냉장고 안에 일본식 된장이 좀 있길래 그걸로 좀 끓여봤어."
"그래? 음, 근데 내용물이.."
대체 된장국에 베이컨이 왜 들어가 있냐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흡사 파인애플이 올라간 피자라도 바라보는 듯한 지나의 눈빛이 심히 거슬렸다.
파인애플피자는 말 그대로 괴식이지만 이건 다르니까.
안 먹어본 사람은 모른다.
이 조합이 말 그대로 치트키라는 걸.
"왜? 맛 없을 것 같아?"
"아, 아냐.. 아, 그나저나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프지는 않고?"
"음.. 밖에서 한 3일정도 노숙한 것 같은 느낌?"
"응?"
"죽을 것 같다고."
"아."
뭔가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것도 잠시, 지나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번졌다.
꼭 마치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말인데 오늘 운동은.."
"오늘은 살살 할거야. 어제는 말 그대로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좀 무리하게 했던 거거든."
쉬어도 되지 않겠냐고 말하려 했는데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지나가 선수를 쳤다.
"그, 그래.."
"아, 그나저나 어제 세나 방송 나간다던건 어떻게 됐어? 별 일 없었지?"
"응, 세나 누나가 신경 써줘서 잘 끝났어."
"당연히 그래야지. 재미는? 있었고?"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지나가 씩 웃으며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 세나한테도 재미있었다고 말했고?"
"응, 어제 방송 끝나자마자 말했어."
"그래? 세나가 엄청 좋아했겠다."
당장 말은 저렇게 하지만 만약 내가 본격적으로 인터넷방송을 하겠다고 말하면 아마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싹 바꿀 가능성이 컸다.
딱 여기까지가,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재미삼아 한 번 정도 출연하는 것까지가 지나가 납득할 수 있는 최대치일테니까.
헌데 그것이 단순히 한 번에서 두 번이 되는 수준을 넘어서 세나처럼 주기적으로 방송을 하는 식이 된다면 지나는 분명 가영의 당부고 뭐고 자긴 모른다는 것처럼 기를 쓰고 반대를 외쳐댈 터.
그렇기에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내 편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다.
세나에다가 가영까지 내 뜻에 찬성하고 나선다면 아무리 지나라 해도 마냥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진 못할테니까.
"그나저나 거의 다 된 거 아냐? 슬슬 엄마랑 세나 깨워야겠다."
"깨우는 건 내가 해도 되니까 누나는 일단 샤워부터 해."
그걸 위해서라도 지나가 동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영이나 세나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늘릴 필요가 있어서 그리 말했던 것인데 막 운동하고 돌아온 지나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렸나 보다.
겨울용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얇은 옷가지에 감싸인 지나의 몸이 흠칫하고 떨리더니 그녀의 두 뺨위로 작게나마 홍조가 어리기 시작했다.
민망함, 그리고 부끄러움.
그런 것들로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지나가 살짝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더니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냈다.
"미, 미안 땀냄새 심하지.."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땀냄새가 나긴 했다.
땀을 흘렸는데 땀냄새가 안 날 수는 없는 거니까.
다만 지나가 말한 것만큼 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호냐 불호냐를 따지자면 명백히 호였다.
내게 이런 취향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평소 상태의 지나보다는 살짝이라도 땀에 젖어있는 편이 더 꼴리더라.
"아니? 하나도 안 나는데?"
그리 말하며 지나의 목덜미를 향해 얼굴을 쑥 들이밀었던 건 다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눈 깜짝 하는 사이에 훅 줄어든 거리감에 지나가 당황해서 몸을 움찔거리는 사이 나는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그녀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척을 했다.
아니, 척만 한 게 아니고 실제로 맡았다.
바깥을 열심히 뛰다가 막 돌아온 지나의 몸에는 겨울 특유의 건조한 냄새가 잔뜩 묻어있었다.
거기에 약간의 땀냄새와 탄 낙엽의 냄새가 섞여있는 것이 상당히 중독적이었다.
지나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하루종일 이러고 있고 싶을 정도로.
물론, 지나는 당연히 그걸 허락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걸 견디질 못할 것 같았다.
지금도 봐라.
뭐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제 한 1분은 됐을까 싶은데 이미 지나의 목덜미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간 기운에 점령당해 있었다.
거기서 올라오는 뭔가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내 몸을 살짝 뒤로 떠민 그녀가 바로 조금 전까지 내 숨결이 흩뿌려지고 있던 곳을 손으로 가리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ㅡ
"바, 밥 먹어야 되니까..! 씨, 씻고 올게!"
그대로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동네 몇 바퀴 돌고 왔다더니만 고작 그 정도로는 그녀의 굳건하기 그지없는 체력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던 건지 빠르긴 정말 더럽게 빠르더라.
나는 내려올 때 한참 걸렸던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주파해 그대로 2층에 있는 욕실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지나의 뒷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그새 딱 알맞게 끓은 된장국의 불을 끄고는 그대로 가영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 앞에 서서 조심스레 문을 두들겼다.
똑똑-
고요하던 거실 안으로 그 소리가 울려퍼지는 걸 듣고 있다가 문에 대고 입을 열었다.
"고모? 주무세요?"
물론, 당연히 자는 중일 거다.
일어나 있는 상태면 처음에 문을 두들겼을 때 대답했겠지.
그렇게 착실하게 가영의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한 나는 닫혀있던 문을 밀어젖히며 그대로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날 반긴 건 강렬하기 그지없는 술냄새였다.
'어제 미용실 직원들이랑 회식이라도 했나?'
모르긴 몰라도 꽤나 많이 마셨나 보다.
저렇게 어제 출근할 때 입고 나갔던 복장을 그대로 입은 채 잠들어있는 걸 보면.
'많이 불편한가 보네..'
하긴 편할 리가 없겠지.
몸에 쫙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은 채로 자고 있는데 편할 리 있겠는가.
뭐,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생각보다는 꼴림이 훨씬 더 컸다.
옷조차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골아떨어져버릴 정도로 만취한채 잠들어있는 가영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뭐랄까 절대로 훔쳐봐선 안 되는 은밀한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거기에 잠들어있는 동안 가영이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댄 탓인지는 몰라도 입고 있는 하늘색 원피스가 팬티에 감싸인 엉덩이가 살짝 드러날 정도로 말려올라가 있는 상태라 더 그랬다.
'씨발..'
개꼴리네 진짜.
확 덮쳐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