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1부
내 손 안에다가 맡겨놓았던 휴대폰을 홱하고 낚아챈 세나가 캠에다 대고 통화 결과를 밝혔다.
"님들 리아 언니 곧 온대요."
"아까 마이크 끄지 않았어?"
"아."
깜빡했나 보다.
켜져있지도 않은 마이크에 대고 말한 게 많이 민망했는지 볼이 빨갛게 변한 세나가 황급히 마이크의 버튼을 올렸다.
"큼..! 통화해보니까 이제 다 치웠다고 바로 방송킨다고 하네요. 한 5분내로 켜질 거에요."
[아 뭐야 그 말 한 거였음?]
[우린 또 벙긋벙긋하길래 우리한테 욕한 줄 알았자너~]
[사실 욕한 거 맞음 ㅇㅇ]
[나 독순술 자격증 보유잔데 욕한 거 마따]
[나만 내가 소리 꺼놓은 줄 알고 볼륨 확인함?]
[나도 ㅋㅋㅋ 소리 왜 안나오나 했네 ㅋㅋㅋ]
[ㅇㄱㅇ 곰보겜 가즈아ㅏㅏㅏㅏ]
[아 ㅋㅋ 메모장 켜놔야겠네]
[난 이미 겜화면 가려놓고 캠만 나오게 해놓음 ㅋㅋ]
[쫄보 련들 데이터 쪼가리가 뭐가 무섭다고]
[ㄹㅇ ㅋㅋ 아 오늘 오랜만에 아빠 손 잡고 자야겠다]
[아버님은 대체 무슨 죄죠?]
[날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무친련..]
[(대충 캐루가 미친녀나!하고 있는 콘)]
[캐루 또 너야?]
[아 배신자 놈 꿀밤 마렵네 ㅋㅋㅋ]
[너희들 이거 캐혐이야!! 캐혐이라고!!]
"아무튼 오는대로 시작할 수 있게 미리미리 준비 좀 해놓을게요."
그리 말한 세나가 내몫으로 놓아둔 컴퓨터 쪽으로 다가가 이것저것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세나의 방송용 컴퓨터 뿐만 아니라 내 몫으로 놓아둔 컴퓨터 화면까지 송출용 컴퓨터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채신 기술 무냐고!!!]
[세팅 개 깔끔하네 ㅋㅋㅋ]
['방송의 신']
[역시 세나야 성능 확실하구만..!]
"어디보자 마이크는.."
혹시 몰라 뽑아놓았던 마이크 선까지 깔끔하게 연결을 끝낸 세나가 이내 날 향해 턱짓을 해댔다.
"야, 한 번 말해봐. 목소리 제대로 들어가나 보게."
"야?"
어딜 프로페셔널한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벌칙을 제낄려고.
어림도 없지.
[너 지금 무라고 했냐?]
[벌칙 자연스럽게 제껴보려다가 딱 걸렸쥬? ㅋㅋㅋㅋ]
[이걸 걸리네 ㅋㅋㅋ]
[세흐나야..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다]
[ㄹㅇ 미드빵 져서 서열정리 당했으면 알아서 기어야지~]
[저렇게 되면 세나네 집에서 이제 세나가 서열 최하위임?]
[ㅇㅇ 그럴 듯]
[뭐 안 길러서 망정이지 고양이라도 길렀으면 그 이하였겠누 ㅋㅋㅋ]
[세나(24세, 방송기계겸 츄르자판기)]
[아 츄르나 내놓으라고 ㅋㅋㅋ]
[소리아도 맨날 방송하고 있으면 치키랑 차카가 간식 내놓으라고 툭툭 건드리고 가잖아 ㅋㅋ]
"아무튼 마이크 제대로 작동되나 확인하게 말좀 해보라고.."
"해보라고?"
"..요."
[여자분 혹시 교포신가요? 왜 말끝마다 요를 붙이시나요?]
[그건 말이죠..]
[알려드렸읍니다^^7]
[요? 너 지금 요라고 했냐? 미쳤네 ㅋㅋ 이게 빠져가지고]
[아 여기 사회 아니라고 다나까 쓰라고 ㅋㅋ]
[요즘 다나까 안쓰는데 틀딱련들 개많네 ㅋㅋ]
[ㄹㅇ..? 그럼 뭐라고 함?]
[아니 그러면 이등병이 병장한테 안녕하세요 이럼?]
[ㅅㅂ 군기 개 빻았네 ㅋㅋㅋ]
[아니 요즘 군대가 군대냐고~ 캠프지 ㅋㅋ 휴대폰도 쓰게 해준다면서]
[월급도 개 많이 준다더만 ㅋㅋㅋ 병장이 얼마랬지?]
[생활관도 동기끼리 쓴다더라 ㅋㅋ]
[그래서 재입대 하쉴?]
[10련이^^ 디질라고]
[10억 주면 생각해봄]
[10억이 뭐임 솔직히 1억만 줘도 재입대한다]
[ㄹㅇ ㅋㅋ]
여자들이 신나게 군대 이야기를 하는 세상이라니.
뭐 이 세계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라지만 보고 있으니 기분이 자꾸만 요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치 남자들이 잔뜩 신이 난 얼굴로 화장품 얘기, 드라마 얘기를 하는 걸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우욱 씹..'
끔찍하구만.
내가 치를 떨고 있는 사이, 어느새 자신의 컴퓨터 앞으로 돌아간 세나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군시절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님들 그거 알아요? 저 군대 때 특급 전사였음."
[아니 선생님.. 우리가 확인 못한다고 자꾸 그렇게 구라치시면 곤란합니다?]
[그런 년이 저번 공방에서는 대체 왜..]
[세 걸음마다 한 번씩 미끄러지시는 분이 특급전사요? 엌ㅋㅋㅋㅋ]
[하여간에 입만 벌리면 구라여 ㅋ]
[여섯 글자로 웃겨드리겠습니다. '특급전사 세나.']
[엌ㅋㅋㅋㅋㅋㅋㅋㅋ]
[트하하하하 팡파레~ 트하하하하 팡파레~ 트하하하하 팡파레~ 트하하하하 팡파레~]
"저번 공방이요? 그게 뭐에요?"
대체 거기서 무슨 짓을 했길래 사람들이 저렇게 조리돌림을 해대는 걸까.
어차피 아직 시간도 좀 남았겠다 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도 해볼 겸 물었던 것인데 아무래도.. 세나의 역린 비스무리한 거였나 보다.
"이, 있어 그런게..!"
[아 그걸 안 보셨네 ㅋㅋㅋㅋㅋ]
[씹 레전드였는데 ㅋㅋㅋ]
[ㄹㅇ 그때 진짜 배 찢어지는 줄 암]
[시작하기 전에 지가 송파구 제라니 어쩌니 하더니만 제라가 아니라 훔바였구연 ㅋㅋ]
[제라 언니.. 그립읍니다..]
[아니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이고 그래 ㅋㅋ 제라 언니 살아있다고!!]
[언니.. 그곳에선 행복하시죠?]
[언니.. 거기서라도 우승했으면 좋겠다..]
[살아있다니까? 더비에서 감독보고 있다고 ㅋㅋ]
[그거 브이튜브에 세나 훔바 치시면 나올 걸요?]
"그래요? 그럼 한 번.."
"야!! 미쳤어?!"
인터넷을 키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나가 내쪽으로 우다다다 달려왔다.
그러더니 그대로 날 향해 달려들었다.
목표는 다름아닌 내 손에 쥐어져있는 마우스였고.
무슨 날다람쥐마냥 폴짝 뛰어서 마우스를 향해 손을 뻗는 세나의 움직임을 회피하며 그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야?"
"오, 오빠..! 이, 이제 됐냐?! 그러니까 얼른 꺼!!"
뭘까.
대체 그 영상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 걸까.
"아, 아니다! 잊어버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라고!"
어느새 세나는 내가 앉아있는 의자에 반쯤 올라탄채 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대고 있었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펑하고 터져버릴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알겠어. 알겠다니까."
"진짜지? 나중에 검색해보지 마라. 죽는다 진짜.."
"알겠다니까? 근데 우리 세나 오빠한테 자꾸 말버릇이 험하네?"
"씨이이이.. 지도 평소에 나한테 존댓말 안 쓰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벌칙이잖아?"
어떻게든 내게서 마우스를 뺏어보겠다고 자연스레 나와 바짝 밀착하게된 세나를 향해 싱긋하고 웃으니 그제서야 거리가 좀 많이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순간 움찔하고 몸을 떤 그녀가 후다닥 뒤로 물러나더니 그대로 째릿하고 눈을 흘겼다.
"아, 제대로 하면 될 거 아냐."
"그럼 지금까지는 연습이었던 걸로 치고 지금부터 제대로 하는 걸로?"
"그래."
"근데 어기면?"
"..뭐?"
"어겼을 때 벌칙도 왠지 있어야할 것 같아서."
"아니 사람이 실수도 좀 할 수 있는 거지 뭘 그렇게 또 빡빡하게.."
"응? 뭐라고? 패배자가 하는 말이라서 잘 안 들리는데?"
"..."
[맞지 패배자는 i got it해야지 ㅋㅋ]
[부들부들한데 맞는 말이라 아무 말도 못하쥬?]
[77ㅓㅓㅓㅓㅓㅓ억 꼬시다~]
[아 치킨 먹고 살짝 더부룩했던 거 싹 내려갔네 ㅋㅋㅋㅋ]
"음, 그냥 깔끔하게 실수 한 번 할 때마다 딱밤 한 대씩 맞는 걸로 하자."
"그러든가 말든가.. 요."
"그럼 지금부터 시작!"
시작 선언과 함께 세나가 입을 꾹 닫았다.
말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실수할 게 뻔하니 아예 말을 안 하겠다는 걸까.
그렇게 스스로의 입을 봉인한 세나가 몸을 돌려 다시 그녀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마우스를 움직여 문제의 영상을 검색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재생시켰다.
그러자 방송 화면 위로 펼쳐진 건 아마도 풋살장일 가능성이 큰 곳에서 멋있게 헛다리를 짚으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상대를 뚫어내려다가..
-악!
잔디밭 위로 벌러덩 미끄러지며 자기가 드리블 하고 있던 공에다가 머리를 박는 세나의 모습이었다.
"이.. 이.. 이..."
송출용 컴퓨터 화면 위로 떠오른 자신의 흑역사를 확인한 세나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미친 놈아!!!!!!!"
오케이 벌칙 1스택 좋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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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도 아니고 내게 흑역사가 까발려진게 상당히 충격이었던 걸까.
소리아가 방송을 켰다는 소식을 듣고 합방 진행을 위해 방송용 컴퓨터 앞에 앉은 세나의 얼굴은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괜찮아?"
"..."
"아니 난 그런.. 영상일 줄 몰랐지.."
"너어는.."
"너?"
"오, 오빠는.. 방송 끝나고 보자.. 요."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듯 앙증맞은 주먹을 날 향해 흔들어 보인 세나가 이내 헤드셋을 뒤집어 썼다.
"어? 언니 들어와 있었네?"
그리고는 디스코드를 키더니 그대로 누군가와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응, 곧 들어올거야."
보아하니 오늘 같이 합방하기로 한 그 소리아라는 여자인 듯 해서 나도 세나를 따라 헤드셋을 뒤집어 쓴 뒤 디스코드에 접속했다.
그리고는 목록에 딱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세나 놀이터' 채널로 접속했다.
띠링-
"아, 들어왔네."
가장 먼저 들려온 건 역시나 세나의 목소리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세나 동생 분 맞으시죠?"
그 뒤로 이어진 건 그 소리아라는 여자 스트리머의 목소리였고.
"아뇨, 아닌데요."
"..네?"
"처음 뵙겠습니다. 세나 오빠입니다."
"야..! 미쳤냐?!"
"벌써 세 번째지?"
"씨이이이.. 진짜 방송 끝나고 보자아.."
그렇게 세나의 저항을 분쇄하고 있으니 소리아가 눈치 좋게 말을 덧붙여왔다.
"아, 혹시 그건가? 벌칙?"
"네, 제가 이겼거든요. 그래서 오늘 방송끝날 때까지는 제가 오빠입니다."
"그랬구나. 세나 다이아인데.. 게임 잘 하시나 보다."
"그보다는 세나가 많이 못하더라구요."
"하긴 세나가 플레이는 화려한데 실속은 영.."
"그렇더라구요."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이게 세 명이서 힘을 합쳐서 깨는 방식이라 한 명이라도 쳐지면은 오래 걸릴텐데.."
"세나 몫만큼 저희 둘이 힘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그래야겠네요. 아, 근데 제가 그.. 혹시 뭐라고 부르면.."
"편하게 유한이라고 불러주세요. 말씀도 편히하셔도 되고요."
"응, 유한아. 너도 편하게 리아 누나라고 불러."
"네, 누나."
그런 식으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건 다름아닌 세나였다.
오늘 처음 대화를 나누는 사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퍽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둘의 행태에 세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뭐가 그리 거슬리냐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딱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대체 뭐가 그리 좋다고 저렇게 하하호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늦었으면 빨리빨리 게임이나 킬 것이지..'
저게 대체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이래가지고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세나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소리아를 바라보는 방식은 이미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멀리갈 필요도 없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세나에게 있어서 소리아는 '조금 얄밉기는 해도 같이 방송을 하면 즐거운 동료이자 친한 언니'였다.
그렇기에 기회만 생겼다 하면 놀려대기 바쁜 소리아를 상대로 짜증을 내는 척을 해본 적은 있어도 진심으로 짜증을 냈던 적은 없었다.
헌데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소리아'가 짜증난다고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아가 유한과 친밀하게 대화를 주고 받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쟤도 그래.'
흰 옷에 튄 얼룩이 스멀스멀 번지는 것처럼 세나의 마음을 좀먹은 이유모를 짜증은 곧 유한에게도 번져나갔다.
아니 대체 이름은 뭐하러 알려준단 말인가.
물론,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라도 호칭 정리는 필수인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걸 듣고 있는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닌데 저건 조심성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은가.
적어도 주저하는 척이라도 하던가.
물어본다고 덥썩 알려주기는.
누가보면 좋아하는 사람이 이름이라도 물어본 줄 알겠ㅡ
그리 되뇌이고 있던 순간 세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그녀와 소리아의 사진을 앞에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유한의 모습이었다.
ㅡ난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결정했던 건데.
뒤이어 그 말까지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순간, 세나는 이미 둘 사이로 끼어들어있었다.
"..둘 다 하루종일 그러고 있을 거야? 얼른 둘다 게임이나 켜."
그런 세나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유한은 그저 자기가 너무 놀려서 짜증이 났는 갑다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