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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1부 (15/315)



〈 15화 〉1부

갑작스레 터져나온 거칠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놀란 것처럼 몸을 흠칫해보이니 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나 보다.

날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간 지나가 그때부터 예리를 상대로 주의해야할 점들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함부로 웃지 말고, 최대한 단답으로만 대답하고, 개인적인 걸 물어보면 거절하라는 거지?"


"그래."

"그건 너무.. 싸가지 없어보이지 않을까? 그래도 누나 상사분인데.."


밉보이면 안 되는 거 아냐?


라고 물으니 지나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시니컬하게 웃어보였다.

"상사는 무슨 동업자야. 동업자."


"응?"


"나도 여기다가 투자했거든. 이 건물의 40퍼센트 정도는 내꺼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설령 내가 예리 뺨을 발로 후려갈긴다 하더라도 자기가 잘릴 일은 없을 거란다.


"걱정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니까?   남자관계가 얼마나 복잡한 줄 알아? 들으면 분명 기겁할껄?"

그야 당연한  아닐까.

내가 예리였어도 저 나이에 이만한 규모의 피트니스 센터 주인으로 있으면 이 여자  여자 다 후리고 다녔을 것 같은데.

아무튼 알겠다는 뜻으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까 회원하고 임자 있는 남자는 안 건드린다고 했잖아."


설마 본인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해놓고서는 내게 집적거리겠냐는 뉘앙스로 말을 하니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이 지나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아니면 혹시 그건 거짓말이었어?"

"아니, 그런..  아닌데.."


"뭐야, 그럼 걱정할 필요 없는 거잖아."

그런 식으로 지나를 농락하는 건 여기까지 해야할 것 같았다. 답답함이 얼굴 가득 차오른 걸 보니 조금만  건드리면 그대로 펑하고 폭발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했으니까.

"아무튼 알겠어. 누나 말대로 할게. 그러니까 얼른 일하러 가셔요."


"아니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준비도 해야된다면서?"


그리 말하며 지나의 등을 꾹꾹 밀었다.

"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


자기는 내가 걱정이 되서 죽겠는데  자꾸 보내려고만 하니 못내 섭섭했던 모양이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지나의 뒷모습에서 토라진 듯한 기색이 물씬 풍겨져나왔다.


섭섭한 것과는 별개로 나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떨쳐낼 수는 없었는지 중간중간에 한 번씩 내쪽을 돌아보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잘 하고 오라는 뜻으로 그녀를 향해서 손을 흔들어주다가 지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잠깐 나갔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3분이 다 됐나 보다.

예리는 락커 앞에 서서 옷을 입고 있었다.

"응? 지나는 갔나보네요?"

자세히 보면 안이 살짝 들여다보일 것 같은 새하얀 레깅스가 잡아당기는 손길에 맞춰 탄탄해보이는 다리를 타고 쭉 올라갔다.

"네? 아, 네."


"그렇구나.. 아,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옷만 금방 입고 안내해줄테니까."

"네, 네."

어쩌면 지나가 자리를 뜨자마자 태도를 싹 바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예리는 젠틀한 태도를 고수했다.

"여기까지는  둘러본 거죠? 그럼?"


"아, 네."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감상이 어땠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감상이요?"


"음, 네. 뭐,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던지.. 뭐 그런 것들 있잖아요?"

혹시 나와 단둘이 되려 했던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눈으로 들어온  락커 문에 달려있는 자그마한 거울을 통해 열심히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예리의 모습이었다.

"어.. 글쎄요. 제가 사실 이런 곳이 처음이라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야 이러다가 진짜 뒈지겠다 싶어서 헬스 끊고 다녀본 적이  번 있지만 '이유한'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래요? 그럼 혹시 운동도 처음이에요?"

"네, 뭐.. 그래도 숨쉬기 운동 정도는 할 줄 알아요."

"푸흡!"

뭐야, 설마 이런 게 취향인가?

놀랍게도 그런 모양이다. 저렇게 자꾸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질 못하는  보면 분명 그런 거겠지.


"흠흠, 뭐 숨쉬기 운동도 충분히 좋은 운동이죠."


"그렇죠. 안 하면 죽으니까요."

"풉!"

"덕분에 벌써 22년차네요."

"아하하하핰..!"

결국 터져버리고 만 예리가 원래 모습을 회복한 건 그로부터 약 1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였다.

웃을 때는 정말 생각없이 웃었는데 막상 웃음이 잦아들고 나니 남자 앞에서 너무 경박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한 걸까.


"흠흠..!"


민망하기라도 했는지 그녀가 빨갛게 물든 얼굴을 한채 헛기침을 반복했다.

"뭐, 22년 정도면 아직 그렇게까지 오래한 건 아니시네요. 전 이제 29년 차거든요."

그 말은 29살이라는 소리겠지.


지나하고 한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보이더만 딱 예상한 그대로였다.


"흐음, 선배님이셨구나."

"그럼 아닌 줄 알았어요?"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걸까. 그야 뻔하지 뭐.

어려보인다느니 어쩌니하는 말 아니겠는가.

물론, 들려줄 생각은 없었다.


"아뇨, 딱 예상한대로? 음, 선배님이시니까 말씀 편히하셔도 괜찮아요."

"그럴까 그럼?"


빠꾸없는 거 보소.

적어도 한 번은 사양할만도 한데 말이다.


말 한 번 잘했다는 것처럼 씩 웃는  보니 티는 안 냈지만 일곱살이나 어린  상대로 꼬박꼬박 존대를 해야만했던 방금의 상황이 많이 낯간지럽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 음, 내가 뭐라고 부르면.."

"유한이요."

지나는 내게 개인정보같은  절대로 알려주지 말라고 했지만 이름 정도야 뭐..

"그래, 유한이구나. 이름이 한이야? 멋지네-"


이건 또 뭔 소리야?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예리가 날 지나의 친동생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니 저런 착각을 한 것이겠지.

"아뇨, 이름이 유한이고, 성은 이씬데요."

"응?"

고개를 갸웃하는 꼴이 꼭 '지나 동생 아니었어?'라고 묻는  했다.


그래서 대충 둘러댔다.


친동생이 아니라 사촌동생이라고.

"아, 그랬구나. 어쩐지.."

이제야 좀 이해가 된다는  고개를  번 주억거린 예리가 이내 눈꼬리를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내 이름은 알지?"

"거기 나예리라고 써져있네요."


"오올, 예리한데."

"..와아."


"미안. 무리수였나 보네."

"3초 국룰에 따라 특별히 봐드릴게요."

"응? 3초 국룰? 그게 뭐야?"

놀랍게도 3초 국룰에 대해 모르나 보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이래서 인싸들은..


"뭐, 그런 게 있어요."


"아, 뭔데에 알려주라. 요즘 애들이 쓰는 유행어야?"


그런 건 나도 잘 모르는데.

"아! 알겠다! 뭐든 3초 안에 사과하면 용서해준다는 거지?"

"뭐, 대충 그런 뜻이죠."


"흐음, 그렇구나아.."

뭘까.

저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눈빛은.


대체 뭘 상상했길래 저런 눈빛인 걸까.


묘하게 일렁이는 듯한 예리의 눈빛을 모르는 척 하고 있으니 낑낑대며 레깅스 착용을 끝마친 그녀가 골반라인에 살짝 걸쳐있던 것을 하복부 부근까지 끌어올렸다.


그렇게 끌어올려진 것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 존재하는 계곡 사이로 파고들어가며 도끼자국이라는 경치를 슬쩍 드러내보였다.


물론, 예리가 잡고 있던 것을 놓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지만.

"그럼, 옷도 다 입었으니까 출발할까?"

싱긋 웃은 그녀가 앞장을 섰고, 그런 그녀를 따라서 남은 층을 구경했다.

그 와중에 나온 소리가 바로..

"그나저나 지나하고 있을 때하고는 다르네?"


"네? 뭐가요?"


"성격 말이야. 몇 마디만 하고 아무 말도 안 하길래 조용한 성격인줄 알았거든.. 그런데 뭐랄까 음.."

예리가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슬쩍 말끝을 흐렸다.


뭐, 그러면서 생략되었을 말이야 뻔했다.


분명 생긴 거하고 안 어울리게 '여자'같은 성격이라 말하려 했던 거겠지. 막상 그 말을 꺼내려하니 뭔가 좀 아닌  같아서 생략했을 것이고.


"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쓴웃음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지나 누나가 걱정이 심해서요. 물론, 걱정해주는 건 기분 좋긴 한데 뭐랄까 음.."


"과보호하는 것 같다?"

"뭐어.. 쪼금?"


"하긴 살짝 그래보이긴 하더라."


그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 동안 어느덧 8층의 마지막 방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방으로 통하는  위쪽에는..

-유지나

익숙한 이름이 적힌 팻말이 걸려있었고.

"아까 봤지? 여기도 개인지도실이야. 보면 알겠지만 지나가 사용하는 곳이고."


그 말대로 지나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25살정도 되어보이는 여성 곁에 서서 쉬지 않고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방음처리가 잘 되어있어서 뭐라고 하는 지는 하나도  들리긴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아는 척을 하고 싶어져서 문 한가운데에 달린 자그마한 창에 매달려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소득이 있었다.


자기가 관리하는 회원의 자세를 주시하던 지나가 날 발견하고는 언제 엄격한 표정을 하고 있었냐는 듯 표정을 누그러뜨렸으니까.

물론,  표정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갑작스레 변한 강사의 표정에 벤치 프레스 위에 누워서 낑낑대고 있던 여자의 시선이 지나의 시선을 쫓아 움직였고, 이내  발견하고는 표정이 헤벌레해졌으니까.


누그러져있던 지나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간 건, 아니 원래보다 더 엄격해진 건 분명 그 때문일 것이다.


'안 나와보네..'


그래도 잠깐 나와보긴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일할 때는 확실하게 일에 집중한다 이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해서 문쪽에 가져다붙이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다. 여기서 더 알짱거려봐야 일에 집중하고 있는 지나에게는 방해밖에는 되지 않을테니까.

"그럼 시설들도 다 둘러봤겠다. 이제  하려고?"

"글쎄요. 끝나려면 좀 걸릴 것 같으니까.."


 하지?

런닝머신이나 뛰면서 예열이나 좀 해둘까?

그런 식으로 고민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할 거 없으면 기다리는 동안 나라도 좀 봐줄까?"


"네?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걱정돼서 그래. 걱정돼서. 정식으로 운동하는 거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아냐?"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혹시나 실수해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음.."


"뭐, 부담스러우면 어쩔 수 없고."

아주 그냥 치고 빠지는 솜씨가 예술이구만.


그나저나 역시는 역시였던 모양이다.

안내가 끝나기 직전까지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길래 어쩌면 정말 순수하게 지나를 도와주고 싶어서 내 안내를 자처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럼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흠, 어쩐다..

이걸 받아 말아?

라는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생각해보니까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면.. 죄송하지만 부탁  드려도 될까요?"


"죄송은 무슨, 어차피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됐지 뭐."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예리가 내 등을 가볍게 쳤다.

'오호..'


이런 식으로 스킨십을?

지나도 이런 걸 좀 배우면 좋을텐데 말이다.


"그러면 음.. 역시 사람들 많은 곳은 좀 부담스럽지?"

"뭐어..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그러면  개인지도실로 갈까?"


"아까 거기요?"

"어, 거기에 어지간한 장비는 다 들여놨거든."


그리 말하고는 이게  센터장 특권이라며 장난스럽게 거들먹대길래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예리의 개인지도실로 자리를 옮겼다.


확실히  안은 그녀가 말한 그대로였다.


오로지  사람만을 위한 미니 체육관이라고 해야할까.

런닝머신부터 시작해서 없는  없더라.

심지어는 샤워실하고 탈의실도  한켠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샤워실이라..'


설마 여기서 종종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예리의 개인지도실은 뭐랄까 굉장히 교묘하게 꾸며져있었다.


바깥에서 볼 때는 화려해보이기만 하던 벽의 장식들이 안으로 들어와서 확인해보니 죄다 바깥의 시선들로부터 내부의 모습을 숨기는 차단막 역할을 하고 있더라.


거기에 방음처리까지 완벽하게 되어있으니.. 아마 바깥에 있는 사람은 설령 우리가 이 안에서 격렬하게 떡을 치더라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겠지.

"오.."


"어때? 괜찮지?"

이거 꾸미느라고 돈이 장난아니게 깨졌다면서 앓는 소리를 하던 것도 잠시, 일단 인바디부터 하자며 그녀가 날 방 한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곳을 향해 이끌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때부터였다.

예리의 터치가 빈번해지기 시작한 것은.


"허리  펴야지."

"이렇게요?"

"아니, 이렇게 쭉!"

그리 말한 예리가 나와 기계 사이로 손을 쑥 밀어넣어 내 등을 손가락으로 미는 척하며 훑었다.

인바디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엄지를 대고 있으면 돼."

그런 예리의 손은 어느새 내 손 위에 포개져있었다.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터치.

"아, 미안."

그에 뒤늦게  사실을 알아차린 척 몸을 움찔해보이니 그녀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허나 그런 식의 자잘한 스킨십은 말 그대로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는 걸 인바디가 끝나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면 음, 스트레칭하는 법부터 알려줄게."


"넵."

"이 참에 확실하게 몸에 익혀놓으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을거야. 이게 말이 스트레칭이지 사실 이것만해도 칼로리 소모가 상당하거든."


그리 말하는 예리의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진짜는 이제부터라고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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