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1부
뭐지?
무엇을 하자는 것이지?
공개 속박플레이를 하자는 것인가?
팔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동의따위는 받지 않고 지나가 제멋대로 입혀버린 바람에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옷 안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으니까.
덕분에 비닐을 생각나게 하는 재질로 만들어진 바람막이가 보톡스라도 맞은 것마냥 팽팽하게 늘어나있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이걸 빠져나가보겠다고 팔을 움직인다면?
그야 뻔하지 뭐.
옷이 찢어지든 목깃 부분까지 바짝 채워진 지퍼가 터지든 하지 않겠는가.
"이게 뭐야. 풀어."
퉁명스레 말하며 옆구리쪽에 딱 붙은 팔을 꼼질꼼질 움직였다.
그러자 내 상체를 완벽하게 커버치고 있던 바람막이가 스르륵 말려올라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지 혼자 올라간 게 아니라는 것 정도?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덩달아 말려올라가버린 옷 아래로 슬며시 드러난 배 위를 서늘하다고 해야할지 뜨끈하다고 해야할지 알 수 없는 바깥 공기가 슥 훑으며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 침을 삼킨 순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을 확인한 지나가 기겁하며 기껏 말아올린 것을 그대로 쭉 잡아내렸다.
"아, 답답하다고."
"가만히 있어 제대로 입혀줄테니까."
"꼭 입어야 돼? 더운데.."
"좀 참아."
살짝 인상을 찌푸린채로 툴툴거리면서도 순순히 지나가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었다.
왜 이러는 지 알 것도 같았으니까.
혹시라도 누가 볼세랴 그야말로 순식간에 똑바로 옷을 고쳐입힌 지나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지퍼를 끝까지 채웠다.
"아, 덥다니까?"
"씁."
"답답한데.."
솔직히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참을만 했다.
말은 더위 때문에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사람처럼 했지만 살짝 답답하다는 점을 빼면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으니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노출을 극도로 제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선이 몰려드니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내 얼굴을 어떻게 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일까.
지나가 뒤로 젖혀져있던 후드 부분을 내 머리 위에다가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는 거기에 달린 끈같은 것까지 바짝 잡아당겨 버리더라.
"아니 진짜 뭐하는 거야."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년 이거 브라콤이었구만.'
그것도 꽤 중증인 듯 했다. 이렇게까지 과보호하려 드는 걸 보면 분명 틀림없겠지.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
그러니 일단 쓰고 있으라길래 어떻게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질 때가 아니었으니까. 나중이라면 모를까 아직까지는 그랬다.
내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걸 확인하고는 안심한 듯 한숨을 푹 내쉰 지나가 다시 한 번 고개를 홱홱 돌려 여전히 이쪽을 구경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경고의 의미가 듬뿍 담긴 시선을 보냈다.
그 모습이 꼭 고양이 같았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자신이 가진 생선을 탐내는 다른 도둑고양이들을 째릿하고 노려보며 하악질을 해대는 대장고양이 같달까.
사실 고양이보다는 흑표범에 가까운 느낌이긴 했지만.
"따라와."
그런 식으로 순식간에 주위의 여성들을 깨갱하게 만든 지나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설 안내가 시작되었다.
다만 그 과정이 생각했던 것만큼 순탄치는 않았다.
'시발 지하에 유전이라도 있나.'
뭔 놈의 난방이 이렇게 빵빵해?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덥게 느껴지는데 얇다고는 하지만 후드까지 푹 눌러쓰고 있으려니 답답함이 장난아니었다.
해서 지나가 내쪽을 보지 않는 틈을 타 후드를 뒤로 젖히니?
그때부터 시선이 미친듯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다시 써."
"싫어 더워죽겠구만 후드는 뭔 놈의 후드야."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볼테면 보라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는 더운 게 문제라는 뜻으로 그 잠깐 사이에 뜨끈뜨끈하게 익은 얼굴에 대고 손부채질을 해대니 지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확실히 내 모습이 확실히 많이 더워보이긴 했나 보다. 그 다음부터 그녀는 딱히 후드를 강요하지 않았다.
"근데 넓긴 진짜 넓다.."
"어때? 시설 괜찮지?"
"이 정도면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
대한민국에 여기보다 좋은 시설을 가진 피트니스 센터가 과연 존재하긴 할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지나가 평소 일하는 곳은 넓고, 호화스러웠다. 돈을 이악물고 때려박은 느낌이 사방에서 풀풀 풍긴달까.
심지어 구성물마저도 굉장히 알찼다.
있을만한 것들은 다 있었고, 이런 건 대체 왜 있는 건가 싶은 시설도 군데군데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게 느껴졌던 건 역시 대체 뭐에 쓰이는 건지 알 수 없는, 아무튼 존나게 비싸보이는 원통형의 기계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방이었다.
심지어 조명색깔도 다른 곳과는 다르게 푸르뎅뎅해가지고 사이버펑크틱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래서 여긴 대체 뭐하는 방일까.
"여긴 뭐하는 곳이야?"
왠지 안에 냉동인간이 들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생겨먹은 기계를 손바닥으로 통통 두들기며 그리 물었더니 주의하라는 말부터 날아왔다.
"그거 비싼거야 조심해."
"얼마짜린데?"
"내가 산 거 아니라서 거기까진 잘 모르고 아무튼 그거 3분당 10만원이야."
"..뭐?"
생각치도 못한 금액에 순간 뇌정지가 왔다.
"아, 아니구나."
역시 지나가 착각한 건가 보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기계가 비싸도 그렇지 3분 쓰는데 10만원이 말이 되나. 3분당 만원이라고 해도 존나게 비싸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것 같은데 말이다.
슈퍼컴들로 피시방을 차려도 아마 3분에 10만원보다는 덜 받지 않을까.
"회원은 한 달에 두 번 무료체험할 수 있으니까 공짜네?"
맞나 보다.
3분에 10만원.
대단하구만 K-헬스.
설마 이런 곳에서 돈복사 버그를 쓰고 있었을 줄이야.
어쩐지 서울 한복판에다가 이만한 걸 떡하니 차려놨다 했더니만..
"한 번 해볼래?"
솔직히 말하자면 좀 혹하긴 했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3분에 10만원씩 받아쳐먹는 건가 싶었으니까.
다만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던 건.. 심상치 않은 생김새 때문이었다.
생겨먹은 게 꼭 SF영화에서 우주선 같은 거 폭발할 때 주인공들이 타고 탈출하는 캡슐같았으니까.
왠지 저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세상이 2077년으로 변해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뭐, 상식적으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떻게 하는 건데?"
"그냥 안에 들어가 있기만 하면 돼. 아, 옷은 벗고."
"벗어야 된다고..?"
"..소, 속옷만! 원래 속옷만 입고 들어가는 거야! 그게 어..! 이게 그러니까.. 어떤 원리냐면.. 안에 들어가서 기계를 작동시키면은 액체질소로 내부 온도를 급격하게 떨어뜨려가지고 신체의 신진대사를.."
많이 당황한 모양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은 걸 보면.
물론,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액체질소니 뭐니 하는 단어가 등장한 시점에서 이해하길 포기했을 뿐더러 그딴 쓸데없는 말에 관심을 기울이기엔 뺨을 당황이라는 감정으로 빨갛게 물들인 채 횡설수설하는 지나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으니까.
이 귀여운 생물은 대체 뭘까.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만 보여주던 지나가 뜬금없이 귀여운 모습을 선보이니 파괴력이 어마어마했다.
그 사실을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게 또 킬링포인트였고.
'키스하고 싶네.'
여전히 횡설수설하기 바쁜 저 분홍빛 입술에 입을 맞추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변명아닌 변명을 하려니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라도 했는지 지나가 혀로 슬쩍 입술을 훑었다.
덕분에 반들반들하게 변한 것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박-
"응? 뭐야? 지나 아니니?"
가볍기 그지없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울려퍼진 낯선 목소리가 방 안을 따라 메아리쳤다.
누굴까.
누구길래 한 마리 포식자나 다름없는 지나를 저리도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걸까.
"아, 센터장님."
"오늘 오후 타임 아니었어? 왜 벌써.."
출근한 거냐고 물으려 했던 것일까.
호칭상 이 피트니스 센터의 주인일 가능성이 높은 여성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쪽을 향해 돌아서던 나와 눈이 딱 마주쳐버렸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좀 놀랐다.
센터장이라길래 분명 나이하고 근육 좀 있으신 아주머니를 생각했는데 실제로 확인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10살 정도는 젊어보였으니까.
저 정도면 지나하고도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나지 않을까.
센터장은 어딘가 느긋해보이는 인상의 미녀였다. 왠지 모르게 '쉬엄쉬엄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것만 같은 인상이랄까.
다만 눈밑에 작게 찍힌 점 하나가 느긋해보이는 인상에다가 묘한 색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가슴팍에 매달려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는 명찰에 적혀있는 걸 보면 이름은 '나예리'인 듯 했고.
'음..'
왠지 달리기를 잘할 것 같은 이름이구만.
뭐, 그쪽은 나애리고 이쪽은 나예리긴 하지만.
아무튼 지나의 상사일게 분명한 여자를 상대로 잘보여서 나쁠 건 없었기에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제서야 정신이 좀 든 것일까.
"새로 등록하신 회원님.. 은 아니신 것 같고."
정신이 들기 무섭게 내 모습을 눈으로 훑던 예리가 내 가슴팍에 매달려있는 지나의 명찰을 확인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남자친구 분?"
예리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터져나왔다.
"..나, 남자친구라뇨. 동생이에요. 동생."
"동생? 아, 아! 그러고보니까 남동생 한 명 있다고 그랬었지?"
"네, 네.."
그 순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예리의 눈이 다시금 가늘게 변하며 내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는 것을.
먹잇감을 노리는 뱀의 눈빛이 저러할까.
순간 몸을 타고 소름이 확 올라왔지만 모르는 척 하며 몸에 힘을 꽉 주고 버텨냈다.
"여기 다니게 하려고?"
"네, 아무래도 아무데나 보내자니 안심이 안 되서.."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예리의 두 눈은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게 못내 불편했던 것일까.
"아직 안내해줘야할 곳이 남아있어서 그럼 저희는 이만.."
지나가 예리를 떨궈내려했다.
"흠, 그러면 이 다음부터는 내가 안내해드리는 걸로 할까?"
"..네?"
"아랫층에서부터 올라오는 식으로 둘러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렇기는 한데.."
"그러면 남은 7층하고 8층은 내가 소개시켜드리는 걸로 할게."
"..아뇨, 괜찮습니다. 센터장님께 폐를 끼칠 순 없죠."
그리 말하는 지나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웃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폐는 무슨 우리 사이에. 너하고 내가 남이니?"
"그래도.."
"그리고 어차피 난 오늘 따로 할 일도 없는 걸?"
그런 식으로 지나의 입을 틀어막은 예리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들여다보는 척 하며 레슨 준비니 뭐니 하는 말을 들먹였다.
"아니면 혹시.. 내가 못 미더워서 그래?"
"..."
"얘는.. 너도 알잖아. 내가 회원분들하고 임자있는 남자는 절대로 안 건드리는 거."
아니, 여기서 가불기를 쓴다고?
이렇게 되면 지나가 할 수 있는 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던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싹 바꾸었다.
"알죠. 다만 저는 따로 할 일 있으신 듯 해서 폐끼치기 싫어가지고 그랬던 것 뿐인데.."
싱긋 웃으며 그리 말한 지나가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바로 조금 전에 내가 손바닥으로 탕탕 두들겼던 기계를 향해 시선을 던지는 식으로 말이다.
너 저거하러 이 방에 온 것 아니었냐. 저거 하러 왔으면 얌전히 저거나 해라. 쓸데없는데 관심 보이지 말고.
지나의 눈빛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상사를 향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불손하기 짝이 없는 눈빛.
그것을 예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그래봐야 3분밖에 안 걸리는데 뭐. 금방 하고 나와서 안내해드리면 되지. 그쵸? 3분 정도는 괜찮으시죠?"
"네? 아, 네.."
"그러시다네?"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보인 예리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기계 옆에 놓여져있던 락커 앞으로 향하더니 몸에 걸치고 있던 것들을 훌러덩 벗어서 그 안에다가 쑤셔넣었다.
그러니까 딱 속옷만 빼고.
'오우.. 야..'
그러더니 기계에 달린 버튼을 조작해 그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더라.
이윽고 웅웅하는 소리와 함께 훈훈하던 방 안으로 서늘한 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고..
"하.. 저 발정난 암캐같은 년이.."
그에 맞춰 지나의 입에서도 욕설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