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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화 〉1부 (13/315)



〈 13화 〉1부

지나의 목소리는 아까 들었던 것보다 한결 낮게 변해있었다. 그래서 싸늘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추위에 강해보이는 지연이라도  싸늘함을 버티긴 힘들었던 걸까.


크롭탑과 레깅스에 감싸인 아름다운 육체가 순간 부르르 떨렸다.


왜 그런 반응인지 알 것도 같았다.

분명 내 뒤에 버티고 서 있을  여자 때문이겠지.


"뭐야, 누나 왔어?"

"응, 마저 써 마저."

그런 지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척 하며 슬쩍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난 봤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던 지나의 두 눈이 언제 그랬냐는  사르르 접히는 모습을.

'아니, 선생님 눈동자가 안 웃고 계신데요..'


모르겠다. 다 훔쳐본 업보지 뭐.

아무튼 그렇게 나와 눈이 마주친 지나가 날 향해 손을 휘적휘적 해보였다. 자긴 신경쓰지 말고 얼른 하던 거나 마저 하라는 것처럼.


그에 군말않고 다시금 서류 쪽에다가 시선을 고정하니 시야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지연의 다리가 흠칫흠칫하고 떨리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마치 호랑이를 앞에 둔 토끼같은 반응이랄까.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런 반응인 걸까.

뭐, 눈하고 입모양으로 욕이라도 했나?


무럭무럭 솟구치는 호기심을 만끽하며 남은 것들을 깔끔하게 채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안절부절 못 하는 느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지연을 향해 내밀었다.


"여기요."

"네, 네.."


"그럼, 지연  부탁  할게?"

"네, 넵!"

점점 더 궁금해진다.

그 잠깐 사이에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렇게 군기가 빡 들어간 걸까.

"어, 그 등록비는.."

"됐어. 등록비는 무슨 등록비야. 시설 안내해줄테니까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러 가자."

"그래도.."

"됐어. 누나가 다 알아서 처리해 놨으니까.  따라오기나 해. 길 잃어버리지 말고."


"내가 앤가."

"애지 그럼.  잡아줄까? 우쭈쭈."

따로 체육복을 챙겨올 필요가 없다고 하더니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휘황찬란한 시설을 자랑하는 곳답게 회원으로 등록한 이들에게는 체육복이 지급된다는 것.

그런 경우에는 보통 약간 찜질복 느낌이 나는 옷을 여러명이서 돌려입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곳은 심지어 개인마다 개별로 지급되더라.


이래가지고 과연 남는 게 있긴 할까 싶긴 했지만  할만하니까 하는 거겠지.


그렇게 건네받은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했다.

그런데 구체적인 사이즈같은  모르다보니 느낌적인 느낌으로 대충 불렀던 게 패착이었나 보다.


'시바..'

다른 곳은 다 괜찮은데 가랑이 쪽이 꼈다.


그것도 엄청.

마치 딱 맞는 바지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 그 안에다가 팔을 밀어넣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 느낌이 여간 불편한게 아니라서 기껏 입은 바지를 다시 벗었다.

이대로면 운동은 커녕 제대로 걷기도 힘들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는 지금쯤 탈의실 문 밖에서 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 앞을 지키고 있을 지나에게  상황을 전하기 위해 문쪽으로 향했다.

"누나."


문을 살짝 열고  사이로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그에  눈을 부릅 뜬채 직원용 탈의실이라 적혀있던 팻말 아래를 지키고 있던 지나의 고개가 내쪽으로 돌아왔다.

"응? 왜?  문제라도 있어?"

"그.. 옷이 안 맞는데?"


"안 맞는다고? 그럴 리가 없을텐데.."


그리 중얼거린 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날 향해 물었다.

"어디가 끼는데?"

 여자는 지금 자기가 나한테 어떤 질문을 했는지 과연 알고 있기나 할까.


'알 리가 없지.'


그러니까 저토록 무신경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래서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 거기있잖아."


"거기? 거기가 어딘데."


밑도 끝도 없이 거기라고만 하면 자기가 어떻게 아냐고 중얼거리던 지나의 행동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마침내 거기가 말 그대로 '거기'라는 걸 깨달았는지 지나의 행동이 우뚝하고 정지했으니까.


그 모습이 꼭 뇌에 블루스크린이라도 뜬 듯 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그걸 내게서 숨기고 싶었던 걸까.


"..한 치수 큰 거면 돼?"


지나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리며 날 향해 물었다.

그래서 최대한 사실대로 답했다.

"어.. 부족할 것 같은데.."


그 순간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처럼 느껴졌던 건 꼭 기분탓만은 아니었을 거다.


"..가져다 줄테니까. 문 잠구고 있어."


"응, 부탁할게."


여기서 두 치수 큰  입게 되면 가랑이 쪽이 편해지는 대신  맞던 허리쪽이 헐렁헐렁해질테지만 그거야 뭐 끈같은 걸로 묶어서 고정하면 되는 거고.

사타구니 쪽이 불편한 것보다는 그래도 허리쪽이 불편한 게 낫겠지.


지나가 시킨대로 문 꼭 잠군 채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똑똑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잠구고 있던 문을 여니  사이로  하나가 쑥 들어왔다.

그 끝에 걸려있던 것을 건네받아 그대로 몸에 걸쳤다.

그리고는 벗어놓은 옷들을 차곡차곡 개서 비어있는 락커 안에 넣고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물론, 그 전에 혹시 몰라서 팬티를 맨 위에다가 올려놓는  잊지 않았다.

그러면 락커를 열자마자 팬티부터 보이겠지.


"기다려. 금방 갈아입고 나올테니까."

그리 말하고는 바로 조금 전까지 내가 사용했던 탈의실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지나의 뒷모습을 보며 슬쩍 웃었다.

'어떻게..'

열어보려나?

솔직히 확신하긴 어려웠다.

다만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지금쯤 지나의 머릿속이 많이 혼란스러울 거라는 점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오는 동안 있었던 일도 그렇고, 방금 일도 그렇고 의식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을테니까.


그런 유한의 추측은 정확했다.

지금 지나는 극도의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머릿속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들 때문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있었던 일.

오는 동안 느꼈던.. 감촉.

그리고 바로 조금 전에 들었던 유한의 발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서일까.

시선이 자꾸만 유한에게 내어주었던 락커 쪽으로 향했다.

막 탈의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도 그랬고,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도 그럤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경멸스럽게 느껴졌다.


유한은 동생이다.


남들은 아무리 같이 오래살았어도 그래봐야 결국에는 남남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랬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를 상대로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스스로가 경멸스럽게 느껴졌다.


하도 스스로에게 환멸이 나서 목을 타고 쓴물이 올라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진짜 네가 미쳤구나. 유지나..'


진짜 누구 말대로 남자라도 만나야할  같았다.

그동안은 일에 집중한다고, 그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욕구를 느낄 때마다 몸을 혹사시키는 식으로 해결해왔는데 최근 들어 그런 식으로는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성욕이 솟구치곤 했으니까.


자꾸만 이런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도.. 분명 그 때문일 거다.


그러니 쌓인 걸 해소하면 나아질 거다.

그리고 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같은 것도 더는 들지 않겠지.

'그래, 그럴 거야.'


한편으로는 살짝이지만 억울하기도 했다.


유한이 그런 식으로 부주의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번뇌에 휩싸이는 일도 없었을테니까.

유한은 무방비해도 너무 무방비했다.

여자에 비해 성욕이 적을 뿐이지 성욕이 아예 없는  아니기에 남자도 얼마든지 자위정도는 할 수 있다. 할 수있지만.. 세상 천지 어느 남자가 문도 안 잠궈놓고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물론, 노크조차 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 크기는 했지만 유한이 문단속만 제대로  했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유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토록 부주의해서 어디가서 험한 꼴이라도 겪는 건 아닐까 싶었으니까.


자신이 진심으로 유한을 동생으로, 가족으로 생각해서 망정이지 만약 그렇게 여기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 모습들을 보고 유혹하는 거라 생각했겠지.

어쩌면 그 모습을 보고 눈이 돌아서 그대로 유한을 덮..

생각이 딱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 지나는 그대로 락커에다가 머리를 박았다.


쿵-!

덕분에 요란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탈의실 안으로 울려퍼졌지만 거기에 신경  겨를같은 건 없었다.


'동생이야. 유한이는 동생이라고.'


그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으니까.


그렇게 머릿속에 눌러앉은 상념을 떨쳐내려 노력하면서 동시에 생각했다.

유한에게 주의를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다른 앞에서까지 그러다가 진짜 험한 일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니까.

그 정도로 유한은 부주의했다.


멀리  필요도 없이 데스크 앞에서 있었던 일만 떠올려봐도 그랬다.

여자가 제 몸을 훔쳐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서류를 작성하는데만 집중하고 있지 않았던가.


자신이 적당히 주의를 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마 그러지 않았다면 분명 계속 그러고 있었겠지.

아니, 어쩌면 유한의 외모에 눈이 돌아가서 그 이상의 일을 벌였을지도 모르지.


'그 년이..'

뿌득-

지나의 입술 사이에서 살벌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런 지나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지금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분노보다는 질투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그렇게 지나가 온간 번뇌에 휩싸여 있을 때 유한은 뭘 하고 있었냐하면..


'오우.. 야...'

주변을 오가는 이들을 구경하는데 푹 빠져있었다.

'과연..'


연예인이나 모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하더니만 확실히 그 말대로인 것 같았다.


그만큼 주변을 오가는 이들의 외모나 몸매가 범상치 않았다.

마치 한국에 사는 모든 미녀들이 이곳에 다 모여있는 느낌?


심지어 다들 하나같이 노출도 높은 복장을 하고 있어서 보는 맛이 쏠쏠했다.


그건 저쪽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다.

딱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게 아님에도 사방에서 날아와 꽂히는 시선의 수가 어마어마했으니까.


다만 대놓고 쳐다보긴 그랬는지 옆을 지나치는 척 하며 시선을 흘깃 던져대는 이들이 많았다.

마침 핑계도 좋았다.

내가 자리잡고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수기가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물 마시러 가는 척하면서 한 번, 돌아가는 척 하며 다시 한 번 흘깃거리는 식으로 훔쳐보더라.

'주로 바라보는 곳은..'

역시 얼굴이었다.

그렇게 얼굴을 확인한 다음에 팔뚝이나 살짝 드러나있는 쇄골등을 거쳐서 종극에는 하체 쪽으로 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뭐, 솔직히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당연히 주목받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딱 하나 의외인 부분이 있다면 먼저 선뜻 다가오는 여자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한 명은 옆으로 와서 치근댈 법도 한데 다들 멀리서 얼굴을 붉힌 채 바라보기만 할뿐 다가오지는 않더라.


'이야 이게 절벽의 꽃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이래도  다가올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날 훔쳐보는 이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몇몇과 시선까지 맞춰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가오기는 커녕 오히려 얼굴을 터질 것처럼 물들이고는 그대로 내빼버리더라.


'쯧쯧.. 다들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서야..'

이래가지고 험난하기 짝이 없는 연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

지금이 찬스라니까?

속으로 그리 한탄하긴 했지만 저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많이 찾는 곳에서 남자한테 껄떡거리다가 까이기라도 해봐라.

업계에 소문이 쫙 퍼지는 건 물론 어쩌면 기사까지 날지도 모르지.


기자들이라고 해서 이곳을 안 드나드는 건 아닐테니 말이다.

그렇게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쿵-!


"어우 씨ㅂ.."

요란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지나가 들어가있는 탈의실 안쪽에서부터 터져나왔다.


"..깜짝 놀랐네."


덕분에 욕부터 튀어나올  했지만 시선을 의식해서 중간에 잽싸게 노선을 틀었다.

아니, 대체 안에서 뭘 하면 저런 소리가 나는 걸까.


혹시 옷 갈아입다가 자빠져서 머리라도 깨졌나 싶어서 똑똑하고 문을 두들기며 괜찮냐는 물음을 던져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걱정이라는 놈이 조금씩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순간 눈으로 들어온 건 들어가기 전과는 달리 앞머리를 내려 이마를 가리고 있는 지나의 모습이었다.


"..누나 괜찮아?"

"응, 별 거 아냐."

그런 식으로 대충 둘러댄 지나가 눈을 굴려 주변을 스캔했다.

그렇게 열심히 날 훔쳐보던 이들을 상대로 경고를 한 번씩 던진 지나가 그 다음으로 한 행동은..

"하아-"

한숨을 푹 내쉬며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을 벗는 것이었다.


'..엥?'

생각치도 못한 전개에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지연과 똑같은 크롭탑에 레깅스 조합으로 변한 지나가 바로 조금 전까지 제 몸 위에 걸쳐져있던 것을 그대로 내 몸에다가 둘렀다.


지나한테는 살짝 커보이던 게 나한테는  맞더라.

딱 맞을 수밖에 없었다.

몸통 부분에 몸통하고 팔이 들어갔는데 안 맞을 리가 있나.

그렇게 내 몸을 바람막이로 감싼 지나가..


지이이익-

그대로 바람막이의 지퍼를 올렸다.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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