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부
"그런데 쟤 방송 여덟 시에 시작하잖아. 난 오후타임이고."
시간이 서로 겹칠텐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지나가 손가락으로 세나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날 향해 물었다.
"어.. 그럼 내일부터가 아니라 모레부터 하는 걸로.. 하면 되지 않을까?"
"될 거라고 생각하니?"
그리 말하며 이제서야 속이 좀 후련하다는 듯 씩 웃는 게 은근히 얄밉더라.
"아니, 모레부터 시작해도.."
"그런 식으로 한 번 핑계대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거 알지?"
그리고 난 그걸 용납할 생각따위 없다.
라고 지나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제대로 가르쳐 달라며?"
그래서 부탁받은대로 해주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어느새 득의양양하게 변한 지나의 표정은 꼭 그리 말하는 듯 했다.
"화, 환불할게요."
"안타깝지만 저희 피트니스 센터에는 환불규정이 없습니다."
"그럼 취소할게요."
"취소도 안 돼. 넌 무조건 내일 나랑 같이 운동하러 가는 거야."
어느새 사악하게 빛나기 시작한 지나의 눈빛이 날 향해 속삭였다.
-응, 여덟 시까지 절대 집에 안 보내줄거야~
라고.
'씨바 좆 됐네?'
보자마자 감이 딱 왔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합방이고 나발이고 내일 지나가 퇴근할 때까지 헬스장에 붙잡혀 있게 될 거라는 걸.
지나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도망이라도 치지 않는 한 필히 그렇게 되겠지.
해서 내일 있을 합방의 이해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세나를 향해 시선을 던져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허나 지나가 한 발 더 빨랐다.
내가 고개를 돌리려 하기 무섭게 지나의 고개가 세나를 향해 홱 돌아가더니 세나 쪽에서 '히익..!'하고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듣자마자 알아차렸다. 저거한테 도움받긴 글렀다는 걸.
그래서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지나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을 향해 시선을 던져 도움을 청했다.
헌데 아무 소용 없었다.
내 시선을 받은 가영이 싱긋 웃더니 지나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으니까.
"그래,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게 시키지는 말고.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니."
"걱정을 하질 마셔요. 돈받았을 때보다 더 확실하게 할테니까."
날 보며 씩 웃는 모양새가 그렇게 오금이 저릴 수가 없었다.
뭐, 아무튼 그렇게 된 관계로..
"자자, 얼른 씻고 준비해야지?"
방 안에 틀어박혀 이세계 납치 이틀차를 만끽하던 나는 지나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노크 따위 개나 주라는 것처럼 문을 박차고 들어온 지나의 모습에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하체를 가렸다.
"뭐, 뭐하는 거야!"
당황한 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브이튜브 들여다보며 뒹굴거리는 것도 슬슬 질려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남성 전용 딸감들은 대충 어떤 느낌일지 찾아보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분명 실망스러운 결과를 마주하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괜찮은게 많았다.
그래서 물건에 슬금슬금 힘이 들어가고 있던 참이었고.
지나가 문을 열고 들이닥친 건 바로 그 와중이었다.
급한대로 가린다고 가려봤는데 가리기 위해 동원한 게 얇기도 얇았을 뿐더러 다리 사이에 달린 게 워낙 흉악하다보니 딱히 아무 소용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대놓고 그러고 있을 때보다 더 노골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얇은 담요의 한 가운데가 볼록하니 치솟아있었으니까.
"미, 미안!"
이런 상황은 정말 생각치도 못했던 모양이다.
눈을 크게 뜬채 굳어있던 지나가 허둥지둥 방 밖으로 물러났다.
웃긴 건 그 와중에 그녀의 신체가 보인 어떤 반응이었다.
워낙 황급히 몸을 돌려서 확신까지는 하기 힘들지만 순간적으로 그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린 것 같았으니까.
뿐만아니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있을 때도 지나의 두 눈만큼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부분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걸 좋아해야하나 어째야하나..'
지나에게도 그랬듯 내게도 정말 생각치도 못했던 상황이라 솔직히 좀 헷갈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게 될 정도로.
'아무튼..'
굳이 내 방까지 올라온 걸 보면 슬슬 나갈 준비를 된다는 뜻이겠지.
마침 물건도 얼추 가라앉았겠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그렇게 씻고, 말리고, 갈아입기까지 끝마치니 30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이 정도면 지나도 얼추 당황을 수습했겠다 싶어서 곧바로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 날 반긴 건 지나가 아닌 세나였다.
"운동가는 거야?"
"어."
세나의 물음에 대충 답하고는 지나의 모습을 쫓았다.
"언니 찾아?"
"어? 응."
"먼저 나가있을테니까 준비끝나면 내려오라고 하던데?"
"그래?"
그래서 곧바로 집을 나서려하니 뒤쪽에서 제지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렇게 입고 가려고?"
"응? 왜?"
"미쳤냐?"
뭐 문제라도 있나?
흘깃 시선을 밑으로 내려 몸에 걸쳐둔 것들을 스캔했다.
난방이 24시간 빵빵하게 돌아가는 집과는 달리 바깥은 분명 추울테니 추위를 막아줄 카키색 개파카에 안에는 노말하게 흰색 반팔 티셔츠, 그리고 청바지까지.
어디 거창한 곳도 가는 것도 아니고 헬스장에 가는 것이니만큼 편하게 입었는데 세나가 볼 땐 영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혹시-
"옷에 뭐 묻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왜?"
"얼어 뒤지고 싶냐? 밖이 얼마나 추운데.."
나무라듯 말한 세나가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말하더니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힐끔힐끔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시간이 흘러가는 걸 확인하고 있으니 쿵쿵하고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세나가 목도리를 손에 든채 등장했다.
그러더니 그대로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서 그걸 내 목덜미에다가 칭칭 두르더라.
꽈악-
"아, 숨막혀."
"감기 걸려서 고생하고 싶으면 풀던가."
퉁명스레 쏘아붙인 세나가 그대로 홱 돌아섰다.
"다녀올게."
"그러던가."
마찬가지로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으로 쏙 들어가버린 세나를 뒤로한채 현관을 나섰다.
그런 날 반긴 건 거실을 두 개 합쳐놓은 듯한 크기의 마당이었다. 지나는 그 끝에 서 있었다.
"..왔어?"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풀풀 풍기는 목소리로 날 맞이하는 지나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내심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안 춥나?'
그 정도로 지나의 출근 복장은 뭐랄까.. 과감했다.
가죽으로 된 검은색 라이더 자켓에 몸에 찰싹 달라붙는 흰 티셔츠.
그리고 대체 어떻게 입은 걸까 싶을 정도로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바지까지.
신발까지 킬힐이었다면 기 센 누나 그 자체였겠지만 애석하게도 신발은 운동화였다.
"안 추워?"
혹시 이 세계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추위를 훨씬 심하게 탄다는 법칙같은 거라도 존재하는 걸까.
이제 막 밖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한 내 몸과는 달리 날 기다린답시고 이 추위 속에 훨씬 더 오래 서 있었을 지나는 나보다 훨씬 얇은 복장을 하고서도 끄덕 없어보였다.
"춥기는.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나갈테니까."
피식 웃은 지나가 아마도 차고일 확률이 높은 곳의 문을 열고 그 밑으로 내려갔다.
해서 그녀가 시킨대로 대문 앞에 서서 기다리니 지나가 바이크를 끌고 등장했다.
'오우 쉣..'
어쩐지 복장부터 라이더 느낌을 풀풀 풍기더라니만..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구만 그래.
"타."
솔직한 감상을 밝혀보자면 바이크와 지나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
"음, 택시타고 가면 안 될까?"
둘이 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잘 어울리는 것과는 별개로 남자가 되서 앞자리도 아니고 뒷자리에 올라타고 싶지는 않았다.
해서 나름대로 회피를 시도해봤건만 아무 소용없었다.
"알잖아? 이 동네에 택시 못 들어오는거."
"으응?"
"그러니까 잔말말고 얼른 타. 천천히 갈테니까."
그렇다니 어쩌겠는가.
더는 저항하길 포기하고 순순히 지나의 뒤에 올라탔다.
"자, 헬맷 쓰고."
바이크 앞쪽에 걸려있던 헬맷까지 건네받아 푹 눌러쓰니 걷어올리고 있던 바이저 부분을 다시 밑으로 내린 지나가 내게 요구해왔다.
이제 출발할테니 허리를 잡으라고.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영감이라고 해야할까. 해서 지나가 입고 있는 자켓의 끝부분을 어색하게 움켜쥐었다.
"이, 이렇게?"
"출발하자마자 떨어지겠다. 더 꽉잡아."
"이렇게?"
"더."
그런 실랑이가 몇 번이나 반복되었고 결국 참다참다 못한 지나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잡기 힘들면 차라리 안아."
"..응?"
"누나 허리 끌어 안으라고."
그리 말하면서 내가 끌어안기 좋도록 등을 쫙 펴는데 덕분에 자켓 끝자락이 살짝 올라가며 그 아래에 숨겨져있던 풍경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팬티의 밴드 부분과 그 위로 아주 살짝 드러난 엉덩이 골의 모습이 말이다.
'미친..'
자꾸만 시선이 가는 그 풍경을 못본 척 외면하며 지나가 요구한대로 양팔로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잘록하면서도 탄탄한 허리가 팔에 착 감겨듬과 동시에 나와 지나의 몸이 바짝 밀착했다.
그 순간 지나의 몸에 내 팔안에서 흠칫하고 떨린 건.. 분명 순간적으로 엉덩이를 꾸욱하고 누른 무언가 때문이었겠지.
몇 시간도 아니고 불과 몇 분 전에 나와 그녀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고를 딱히 의식하지 않는 척 최선을 다해 연기를 펼치고 있던 지나에게는 그 감촉이 어떻게 느껴졌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원래 그녀가 느꼈어야할 것보다 몇 배는 더 또렷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래 그렇게 꽉 잡고 있어. 이제 출발할테니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날 향해 그리말하는 지나의 목소리는 어딘가 어색했다.
부릉-!
달리기 시작하면 그 묘한 느낌도 금방 씻겨나갈 거라 생각한 걸까.
천천히 달리겠다더니만 지나가 초장부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야 좋았다.
"천천히 간다며!!"
"이게 천천히야!"
그 핑계를 대며 지나의 허리를 좀 더 꽉 끌어안을 수 있었으니까.
있는 힘 없는 힘 다 쥐어짜내서 지나의 허리를 꽉 끌어안을수록 그녀의 엉덩이와 내 하복부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거기에 오토바이 특유의 흔들림까지 더해지니?
내 물건이 지나의 엉덩이와 비벼지기 시작했다.
'시바 바지 좀 더 얇은 거 입고 올 걸.'
그럼 이 감촉을 좀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을텐데.
속으로 아쉬움을 곱씹으면서 지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눈으로 들어온 건 푹 눌러쓰고 있는 헬맷 아래로 살짝 드러난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모습이었다.
'의식하고 있구만.'
하긴, 의식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겠지.
굳이 빨딱 서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큰데다가 동생동생해도 결국에는 남이고, 남자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지나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번뇌들이 휘몰아치고 있지 않을까.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조금 자제하기로 했다.
이러다가 혹시 사고라도 나면 기껏 이런 세계에 이런 외모로 살게 되었는데 떡 한 번 제대로 못 쳐보고 골로 가게될 수도 있으니까.
해서 지나의 허리를 꽈악하고 끌어안고 있던 팔을 살짝 풀었다.
동시에 겁이라도 먹은 것마냥 그녀의 등에 바짝 밀착시키고 있던 몸을 슬며시 떨어뜨리니 헬맷에 와서 부딪히는 바람 소리 사이로 '후우..'하고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섞여들었다.
안도의 한숨같기도 하고, 아쉬움의 한숨같기도 한 그 소리에 속으로 피식피식 웃었다.
왠지 모르게 지금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으니까.
"다 왔네."
"응? 벌써?"
"응, 저기 앞에 파란색 건물 보이지?"
그 말대로 대충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대충 7층 정도 되어보이는 높이의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저게 통째로 피트니스 센터라니.
어쩌면 가영네 가족 중에서 가장 돈이 많은 건 세나가 아니라 지나 아닐까?
능숙하게 바이크를 몰아 길가에 세운 지나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들어가있어. 주차만 얼른해놓고 바로 올라갈테니까."
"응."
"헬맷 이리 주고."
"자."
"들어가면 딱봐도 안내데스크같이 생긴 곳에 직원 분 앉아계실 거거든? 거기가서 누나 이름 말하면 알아서 해주실거야."
그에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니 내쪽으로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준 지나가 바이크를 몰아 지하주차장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옆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이 생전 처음 와보는 거리에 홀로 서게 되니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뭐야 연예인?"
"씨발 봊나 잘생겼다.."
"야, 너무 대놓고 쳐다보는 거 아니냐?"
"연예인인가? 여기 연예인들 많이 다닌다던데.."
"아이돌 아냐?"
"아이돌 중에 저렇게 생긴 애도 있었어? 왜 몰랐지?"
"데뷔한지 얼마 안 됐을 수도 있지. 연습생일 수도 있고."
"아무튼 봊나 잘생겼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세계가 남녀의 성욕이 서로 뒤바뀐 정조역전 세계라는 것과..
"가서 번호 따볼까?"
"미쳤냐? 딱봐도 방금 내려주고간 사람이 여친이잖아."
"저런 놈하고 떡치면 어떤 느낌일까."
"개쩔겠지. 얼굴만 봐도 봇물 터질듯."
"좀 닥쳐. 다 들리겠다 이년들아."
날 이 세계로 납치한 여신 덕에 새로이 갖게된 외모가 지닌 파괴력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라는 걸.
그야말로 쉬지않고 들려오는 음담패설 때문에 자꾸만 아득해지려고 하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그대로 건물 안으로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