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1부
'이거 기분이 되게 묘하네..'
이렇게 둘이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으니 꼭 마치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릇끼리 부딪히면서 나는 달그락달그락하는 소리가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지나같은 부인이라.
한 번 상상해봤더니 채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가 무지하게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허나 그게 신경쓰이는 건 나만인 듯 했다.
지나는 아까 전부터 묵묵하게 그릇에 거품칠을 하는데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하긴..'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이유한'이 가영네 가족과 같이 살기 시작한 게 10살때부터였으니 같이 산 세월만 해도 무려 12년이다.
12년이면 다른 것들보다 동생이라는 인식이 또렷해지기에는 충분한 세월이다.
아마 지금쯤 지나의 머릿속에서 이유한이라는 존재는 '지켜줘야 하는 남동생.'이라는 이미지로 고정된 상태겠지.
그건 세나나 가영또한 마찬가지일 거다.
가영에게는 남동생이 아니라 아들에 가깝겠지만.
그녀들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그 벽부터 넘어서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손을 잡든, 키스를 하든, 떡을 치든 할 테니까.
물론, 결코 쉽지는 않겠지.
그도 그럴 것이 어디 뭐 1~2년도 아니고 무려 12년동안 쌓아올린 것 아니던가.
그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것들이 얼마나 높고 두터울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일단 작은 것들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는 게 맞겠지..'
본능은 당장이라도 셋을 덮치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어디 뭐 짐승새끼도 아니고 그 속삭임에 놀아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나저나..'
냄새 개좋네.
바디워시 뭐 쓰냐고 물어볼까.
그만큼 지나에게서는 굉장히 상쾌한 향기가 났다.
티나지 않게 그것을 만끽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운동은 왜?"
난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새 거품칠을 전부 끝냈는지 지나가 손에 끼우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어던지며 그리 물어왔다.
"뭐.. 그냥?"
"그냥은 무슨.. 퍽도 그냥이겠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 피식하고 코웃음을 친 지나가 이내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 시작했다.
"흠, 혹시 뭐 학교에 좋아하는 여자애라도 생겼어?"
"동기야? 아님 선배? 아, 후배려나?"
가늘게 변한 시선이 얼굴을 향해 날아와 푸욱하고 박혀들었다.
'와씨..'
지갑 꺼낼 뻔 했어.
농담하는 게 아니고 진짜로 내 오른손은 이미 뒷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다.
만약 평소처럼 그곳에 지갑이 있었다면?
꺼내서 냅다 바쳤겠지.
그 정도로 방금 지나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내가 아직 코흘리개에 불과했던 시절에 내 소중한 5천원을 삥뜯어가셨던 양아치 고딩 누나를 생각나게 하는 눈빛이랄까.
영영 돌려받지 못하게 되어버린 5천원을 대신해 눈나의 포옹을 받긴 했지만, 돈슨카드 살 돈을 빼앗겨 단풍잎이야기에 캐쉬를 지르지 못하게 된 나는 캐시템과 펫으로 무장한 친구들을 보며 사무치는 부러움을 느꼈드랬지.
'시발 그 시절에는 달팽이 펫도 안 줬다고..'
하지만 지금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누나. 눈나의 품 안은 지금 생각해봐도 최고였어요.
기억 속 저 편에 묻어두었던 나름 므훗한 에피소드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방금 지나가 보인 반응은 굉장히 격렬했다.
왜 저렇게 격한 반응인 걸까.
설마 질투?
일 리는 없겠지. 그보다는 차라리 아끼는 동생의 마음을 앗아간 도동년이 누굴지 그만큼 궁금한 걸 거다.
기본적으로 무뚝뚝한 편인 지나지만 '돌봐줘야하는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는 유한에게만큼은 유한 편이니까. 살짝이지만 브라콤 기질이 있다고 해야할까.
'하긴..'
거울을 통해 확인했던 유한의 외모를 생각하면 내가 지나였어도 브라콤으로 전직했을 것 같긴 했다.
아니, 브라콤이 아니라 진작에 덮쳐서 따먹었을 거다.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메챠쿠챠 따먹었겠지.
'대체 어떻게 참은 거지?'
운동계 여자 답게 성욕도 다른 여자들보다 강한 편이라고 설정해뒀는데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참은 걸까.
그야 뭐 설정 때문이겠지.
유한을 볼 때마다 성욕으로 자궁이 쿵쿵하고 뛰어도 돌봐줘야 한다는 동생이라는 인식이 세뇌레벨로 머릿속에 박혀있어서 덮치지 못한 게 아닐까.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지나의 물음에 답했다.
"뭔 소리야. 그냥 요즘 살찐 것 같아서 그래."
"설마 살 빼려고?"
"뭐어.. 빼면 좋지."
"아냐, 넌 오히려 쪄야 돼."
"아 됐고, 그래서 운동 알려줄거야 말거야."
있지도 않은 물기를 툭툭 털어대던 걸 멈추고 생각에 잠겨있던 것도 잠시, 지나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안 가르쳐주면?"
"그럼 뭐.. 그냥 근처에 있는 헬스장이라도 끊어야지."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지나의 눈썹이 꿈틀하고 떨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됐어. 돈 아깝게 무슨. 그냥 누나네 체육관으로 와. 시간이 날지는 잘 모르겠지만.. 짬 날 때마다 가르쳐줄테니까."
"진짜?"
"그래."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지나가 이내 거들먹대기 시작했다.
"아, 내가 원래 이런 거 잘 안해주는데.. 야, 나한테 PT 한 번 받으려면 얼만 줄 알아?"
그야 당연히 비싸겠지.
설정상 지나는 모델이나 연예인들이 먼저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헬스트레이너니까.
"에이, 가족 좋다는 게 뭐야."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그녀의 팔뚝을 손으로 가볍게 툭 치니 지나가 몸을 움찔거렸다.
어랍쇼?
요것 봐라?
왜 얼굴이 빨개지는 걸까?
저건 누가봐도 '누나'의 반응은 아니었다. 세상 어느 '누나'가 '동생'이 몸좀 쳤다고 저런 식으로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인단 말인가?
'설마..'
브라콤 기질이 발전해서 '동생'인 유한에게 성욕을 느끼는 수준으로까지 진화하기라도 한 걸까.
"흠흠, 그래서 목표가 뭔데."
"목표?"
"뭐, 몇 키로를 감량하겠다던지 그런 거 있을 거 아니야."
"음.."
뭐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팔뚝을 살짝 들어올려 지나를 향해 내밀었다.
그러자 날아온 건 어리둥절해하는 시선이었고.
"한 번 만져봐봐."
"어, 어..?"
당황하던 것도 잠시,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해 당황을 몰아낸 지나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왔다.
몰캉몰캉.
지나가 느꼈을 감촉이 대충 저렇지 않을까.
모르긴 몰라도 중독성 하나만큼은 상당한 듯 했다.
어느새 지나의 입은 살짝 벌어져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못 본 척하며 팔에 힘을 주어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뭐야? 설마 힘 준거야?"
이게?
내가 상처받기라도 할까봐 지나가 차마 내뱉지 못하고 다시 속으로 삼켰을게 분명한 말이 귓가를 맴도는 듯 했다.
"응.."
"확실히.. 심각하긴 하네."
그 말대로였다. 이건 이 세계 남자 기준으로도 기준 미달이었으니까.
이래서야 섹스할 때 몇 번 허리를 튕기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져버릴게 뻔했다.
물론, 이 세계의 남자들은 보통 주도적으로 허리를 흔드는 쪽보다는 가만히 있는 쪽이 대다수긴하지만 남자가 돼서 따먹었으면 따먹었지 치욕스럽게 여자 밑에 깔려서 앙앙 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남자는 힘이지.'
암 그렇고 말고.
상점을 통해 정력을 늘렸으면 뭘하겠는가. 그걸 받쳐줄 힘이 없으면 다 무용지물인 것을.
그렇기에 내 목표는 에너자이저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자보다 먼저 지쳐서 헤으윽거리지 않을만한 체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여신이 넘겨주고 간 상점이 있으니까.
상점을 잘 뒤져보면 도움이 될만한 물건 하나쯤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들어올렸던 팔뚝을 원위치시키니 졸지에 조물딱대고 있던 것을 뺴앗겨버린 지나의 얼굴 위로 살짝이지만 아쉬움이 맴돌았다.
그것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는 순식간에 그것을 얼굴 위에서 지운 그녀가 날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가 데스크에 말해둘게."
언제부터 나올래?
지나는 날 향해 그리 물었고, 그에 나는 내일이라 답했다.
"그럼 내일 나 출근할 때 같이 나가면 되겠다."
"그럼 나야 편하고 좋지 뭐."
지나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바로 자신이 일하는 체육관에 말해둘 생각인지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으니까.
그 사이 남아있던 설거지 거리들을 모두 해치운 나는 내 방으로 향하는 대신 지나의 방 정반대편에 위치한 방으로 향했다.
'보는 사람..'
은 없고.
바로 확인해보실까.
안 그래도 됐는데 굳이 손에 물 묻히길 자청했던 건 다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지켜보는 사람도 없으니 거리낄 것또한 없는 상황.
묘하게 심장이 두근두근대는 걸 느껴면서 조심스레 닫혀있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진입했다.
그렇게 들어선 가영의 방 안에서는 묘하게 포근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더 두근거렸다.
이유한의 방에서 났던 것하고는 전혀 다른 냄새 덕분에 남의 방에 몰래 들어와있다는 사실이 몸에 확 와닿았으니까.
마찬가지로 코흘리개에 불과했던 시절,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하나하나 주워먹는데 지쳐서 불순한 의도를 품은 채 부모님 방에 몰래 잠입했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이 무덤 속에서 부활하는 걸 느끼면서 천천히 방 안을 살폈다.
'어디보자 노트북이..'
저기 계시는 구만.
내가 살던 세계에서 남자들이 자기 컴퓨터 하드하고 휴대폰을 남들에게 공개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이 세계 여자들이 자기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컴퓨터 속에 숨겨져있는 '오빠'들이었다.
그리고 가영에게는 그와 관련된 설정이 하나 존재한다.
성욕이 사무칠 때마다 야한 동영상을 보며 스스로를 달랜다는, 어찌보면 이 세계 여자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일 뿐인 설정이 말이다.
오늘 이렇게 가영의 방에 몰래 숨어든 건 다 그 때문이었다.
'어디보자 우리 가영이 누나 취향이..'
어떻게 되시려나.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이건 상당히 중요했다.
야동이라고 해서 다 같은 야동이 아니듯 야동에도 엄연히 장르라는 게 존재하니까.
능욕물, 소프물, 농밀물, 기획물, 치한물 등등.
그 수많은 장르들 중에서 그녀가 어떤 것을 주로 '사용'하는지 필히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특정 장르를 자주 사용한다는 건 그쪽과 관련된 판타지와 패티쉬를 지니고 있다는 뜻일테니까.
그것만 알아낸다면?
사실상 책 펴놓고 시험을 치는 거나 다름없겠지.
'그러니까..'
얼른 좀 켜져라.
어우 이건 뭐, 이렇게 느려가지고 동영상은 제대로 재생되나 몰라.
자가발전 할때 딸감으로 삼은 영상이 버벅대는 것만큼 빡치는 상황도 또 없었기에 진지하게 효도 선물로다가 성능 짱짱한 노트북 하나라도 놓아드려야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마침내 길고 긴 부팅이 끝이 났다.
퍽 익숙한 모양의 아이콘을 눈에 담으며 가볍게 엔터 버튼을 두들겼다.
그러기 무섭게 눈앞으로 등장한 건 바탕화면..이 아니라 암호를 요구하는 창이었다.
'쯧..'
아무래도 가영의 나이가 있다보니 프리패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는 역시였던 모양이다.
하긴, 안에 '오빠'들이 계시는데 비밀번호를 안 걸어둘 수는 없었겠지.
'암호..'
뭘까.
노트북을 허벅지 위에 얹은 채 나름대로 추측해봤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자기 이름에다가 적당한 숫자를 비밀번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긴 한데..
시험삼아 유가영이나 가영을 입력해봤지만 안타깝게도 정답은 아니었다.
그럼 혹시 생일?
근데 가영이 누나 생일이 언제더라?
가영이 들었다면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새끼라며 대성통곡을 했을테지만 '이유한'으로 생활하기 시작한지 이제 몇 시간 차에 불과한 내가 그딴 걸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건 설정한 적도 없었고.
하지만 유한의 휴대폰이라면 어떨까.
머릿속으로 떠오른 가능성에 일단 노트북을 곱게 접어서 원래 자리에다가 돌려놓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물론, 빠져나올 때도 주의를 기울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렇게 3층에 위치한 내 방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켜서 캘린더부터 확인했다.
역시나 캘린더는 답을 알고 있었다.
1월부터 시작해서 12월까지 차례대로 넘겨보니 중간중간에 눈에 확 띄는 빨간색 별로다가 표시가 되어있었으니까.
가영은 5월 17일이었고, 지나는 7월 2일이었으며 세나는 12월 24일이었다.
'와 개불쌍하네.'
하필이면 태어난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니.
이러면 남들은 1년마다 생일선물과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나씩 꼬박꼬박 챙겨먹을 때 세나만 생일선물겸 크리스마스 선물로 퉁치기를 당했다는 소리 아닌가.
물론, 시기가 겹치는 만큼 한 번에 더 크게 받았을 가능성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묘하게 엄격한 편인 가영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솔직히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생일같은 것도 설정해줬을텐데.
친구들은 일 년에 어린이날까지 포함해서 세 탕씩 뛰는데 혼자서만 두 탕으로 만족했어야 했을 어린 세나에게 심심한 사과를 보내며 휴대폰을 입고 있던 바지 주머니 안에다가 쑤셔넣었다.
그리고는 발뒤꿈치를 치켜든채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셋 모두 정답이 아니었다.
가영0517도 지나0702도 세나1224도 전부 시도해봤지만 암호가 틀렸다는 문구만 떠올랐으니까.
숫자만 따로 떼서 입력해보는 건 물론 숫자끼리 더하고 곱하고 별 생쑈를 다 해봤지만 그또한 정답이 아닌 건 마찬가지였고.
'이럴 리가 없는데..?'
아니 이렇게까지 했는데 확인을 못한다고?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머릿속을 스친 건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조합이었다.
유한0920.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그것을 쳐넣은 순간..
띠로롱-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바탕화면이 등장했다.
식겁해서 일단 소리부터 껐다.
'아무튼 뭐.'
무사히 보안을 뚫어냈으니 이제 정말 확인해보실까.
물건이 물건이다보니 가영이 아무렇게나 방치해뒀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봐야 아마추어의 솜씨일 뿐.
숨기는 방법을 모두 꿰고 있으면 그만큼 찾기도 쉬운 법.
늘상 뭔가를 숨기기 바빴던 내가 이제는 찾는 쪽이 되었다는 사실에 묘한 감상을 느끼며 내가 아는 모든 방법들을 모조리 동원했다.
동원했건만..
'왜..'
아무 것도 없지?
설마 소장 파가 아니라 스트리밍 파인가 싶어서 인터넷 기록까지 싹 뒤져봤지만 깨끗한 건 그쪽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어젯밤에 갑자기 현자타임이라도 와서 싹 밀어버린 건가?
이미 결과가 나왔지만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애꿏은 마우스만 딸칵거리고 있던 순간 눈으로 들어온 건 누가봐도 가영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사진과 서류들이었다.
'아.'
아무래도 이 노트북은 가영과 지나가 같이 사용하는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안에 없지.
딸에게 딸감으로 쓰는 오빠들을 들키는 것만큼 엄마로서 민망한 상황도 또 없을텐데 미쳤다고 이 안에다가 놔두겠는가.
그러니까 지금 찾아야할 건.. 방주였다.
어디다가 숨겼을까.
일단 노트북이 들어있던 가방부터 뒤져봤지만 거기에는 없었다. 그래서 느낌적인 느낌으로 침대 매트리스 밑에다가 손을 밀어넣고 더듬거려봤더니..
'여기였구만.'
서늘하고도 딱딱한 감촉이 손바닥 안으로 착 감겨들었다.
그렇게 꺼내든 것을 컴퓨터에 연결해서 안에 든 걸 확인해보니?
'오우야..'
자연스레 알게되었다.
가영은 귀염귀염한 외모와는 다르게 꽤나 과격한 취향의 소유자라는 걸.
특별히 고르고 고른 컬렉션이라도 되는지 썸네일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을 풀풀 풍겨대는 작품들의 향연에 나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