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186 직접 보고 싶어요
* * *
"할머니,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그려그려. 의사 선생님도 남편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어멋. 할머니도 참…!"
한 차례 볼을 붉힌 오수정이 웃으며 농을 건넨다.
"그런데 어때요? 저희 둘 잘 어울리나요?"
"말도 말어. 아주 잘 어울려! 남편하고 대낮부터 뜨거우니 참 좋구먼. 홀홀홀. 다음부터는 나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혀. 내가 더 기다려 줄 수도 있응게!"
나이 칠십 먹은 할머니가 응원을 하며 진료실 밖으로 사라졌다.
어찌됐든 사건이 잘 일단락돼 내 입에선 절로 안도의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어휴. 이해심 많은 할머니라 천만 다행이었지….'
아직도 후끈 거리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신고 당했으리라.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푸른색 옷과 그 위의 흰 가운. 얼굴 위의 뿔테 안경이 참으로 매력적인 유부녀가 날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고 있다.
'와아. 내가 이 년이랑 한 판 했단 말이지?'
지적인 이미지와 요염함을 두루 갖춘 여인.
학벌에 지위까지 엘리트인 그녀가 조금 전까지 저 진료침대 위에서 내 좆물을 받아냈다는 사실은 내게 강렬한 정복감을 선사해주었다.
여인이 의자를 끌고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다.
슥슥 움직일 때마다 육덕스러워 보일 만큼 큰 가슴이 흔들거리고, 그 아래 가랑이는 벌어졌다 수그러들기를 반복 한다.
"이런 일로 수줍어하다니. 서후, 너 정말 많이 변했네."
"하핫. 그런가?"
"응. 그뿐만이 아니야. 예전에는 막 여자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좀 선수 같았다면, 지금은 굉장히 뭐랄까. 순수하다고 해야 하나? 아. 그걸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있었는데…."
"총각?"
"응, 그거야! 숫총각 같아!"
참네. 숫총각이라니.
내가 그런 소릴 듣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더 탐이 나네. 후훗."
몸을 배배 꼬는 여의사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들어 갔다.
이대로는 또 한 번 거사를 치러야할 판.
그때 내 구원자가 나타났다.
"아저씨! 오래 걸려요?"
"아냐! 이제 끝났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난 후다닥 그녀의 사거리에서 벗어나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그럼 잘 지내! 나 간다!"
"네, 또 봐요! 쪽♥"
후우. 녹초가 된 난 병원 복도를 걸으며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친구의 몸 상태를 들으러 갔는데, 정작 그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 듣고 역으로 그녀의 상담을 들어주고 욕정만 풀어준 꼴이라니.
심지어 헤어질 각오로 오줌까지 먹였는데도 도리어 활활 불태우는 그녀의 행태에 내 고개는 절로 흔들어졌다.
'어쩌면 M성향이 있을 지도.'
아무튼 앞으로 한동안은, 친구 녀석이 병원을 벗어날 때까지는 시달려야 할 듯하다.
난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친구 녀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근데 왜 이렇게 여우가 조용하지?'
이렇게 조용할 애가 아닌데.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초딩이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윽. 하긴… 예견된 상황이긴 했나.
눈앞에서 딴 여자랑 떡치는 꼴을 봤으니, 그 순간 용케도 안 달려든 게 신기하게까지 느껴졌다.
아무튼 사태 수습.
"저, 저기 예림아."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대답은 없고, 몸은 부들부들 떨어 댄다.
난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아이를 잘 달래보았다.
"그… 아저씨가 미안."
"……."
"예전에 알던 여자였어. 단둘이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따라 들어간 거였는데, 설마하니 오랜만에 만났다고 옷 벗고 달려들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오수정에겐 미안하지만 난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그녀를 변태 여의사로 몰아갔다.
그리고 뭐… 진행사항만 놓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그 말을 들은 여우,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왈.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전 그것도 모르고 오해했네요."
"응? 오해?"
"전 또 아저씨가 발정이 나서, 대낮에 친구 분 담당 의사를 꼬드겨 욕정을 푼 줄 알았지 뭐예요."
"야. 아무리 내가 여자 마음을 잘 안다손 치더라도 그건 불가능해. 어떻게 보자마자 여자를 넘어뜨리겠냐."
"아뇨."
그러나 여우 생각은 다른 듯했다.
"아저씬 매력 넘쳐서 가만있어도 빛이 난단 말이에요. 후우. 내가 더 정신을 차려야지. 언제 어디서 여우들이 낚아채갈지 모르니!"
"그, 그러냐? 아무튼 미안하다. 앞으로 새로이 여자를 만들 일은 없을 테니, 그 부분은 걱정 말렴."
"넵. 저 아저씨 믿어요. 이렇게 멋지시니 그동안 여자들이 많이 달라붙었겠죠. 그로 인해 종종 마주치겠지만, 그건 새로운 애인인 제가 감내해야할 부분!"
어이. 왜 네가 내 새로운 애인이냐?
그러나 굳이 이 좋은 분위기를 초칠 필요는 없어 난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여우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말했다.
"제가 넓은 마음과 아량으로, 아저씨의 더러운 과거 전부를 받아들여줄게요!"
"고, 고맙다."
"그러니 앞으로도 아는 여자를 만나면 저 때문에 막 고민하고 숨기고 그러지 마세요. 아셨죠? 전 그릇이 큰 여자니까, 그것 다 포용해 드릴게용!"
"…그래."
화내거나 삐지거나, 혹은 사고치지 않아 참 다행이다.
불과 며칠 전, 도향을 통해 집착녀가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금 깨우친 난 여우의 그 밝은 행동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래도 말할 순 없지.'
집착녀가 괜히 집착녀가 아니다.
그들의 질투는 일반인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생각 없이 말했다가 각성하느니… 그냥 몰래 해결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근데 민아는 아직 연락 없어?"
"넹. 아직 이야기 중인가 봐용."
"그래? 그럼 밑에 가게 가서 마실 것 좀 사가지고 오자."
그렇게 여우와 병원 1층으로 내려가 편의점에 들어선 그때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청초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여인.
주위를 둘러보는 그 시선마저도 기품이 넘쳐난다.
그녀는 올해 초 2월까지 내가 잠깐 근무했던 회사의 상사. 부장의 부인인 하영이었다.
"어멋. 서후 씨?"
"엑. 아저씨, 누구에요?"
"아…. 내 옛 상사 사모님."
여우의 눈이 좁아진다.
난 그 시선을 피해, 내게 나아와 손을 내미는 여인의 손을 맞잡았다.
"하영 씨, 오랜만입니다."
"정말 반가워요. 여름휴가는 잘 보내셨나요?"
"아, 네. 의뢰가 있어서 미국에서 일하다, 친구 놈이 입원했다 해서 급히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연락이 잘 안 됐던 거였군요."
"하, 하하핫."
오해를 단단히 살 만한 대사.
옆에서 날 노려보는 여우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혼자 팔짱을 낀 채 한쪽에서 매섭게 노려보는 초딩의 행태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하영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입니까? 어디 아픈 건…."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하영이 내게 바짝 다가와 귀에 소곤소곤한다.
"저 임신했잖아요. 누구 아이인지는 아시죠? 후훗."
아… 그랬지.
깜빡했다. 슬슬 배가 커져서 병원을 주기적으로 오고가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근데 부장님은요? 같이 안 오셨나요?"
"예. 지금은 한창 회사에 있을 시간이잖아요."
그러며 슬쩍 내게 윙크한다.
"잠깐 단둘이 시간 될까요?"
"어, 음…. 그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야기 좀 하고 싶어요."
눈웃음을 지으며 하영이 배를 문질렀다.
난 여우에게 손짓했다.
"예림아, 미안한데… 나 잠깐 이분 집까지 데려다 드려야할 것 같다."
"그럼 저도 같이 갈래용!"
"아니. 아저씨,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너도 집에 한번 갔다 오렴. 한 시간 있다가 병원 앞에서 다시 만나자."
"에엑! 싫은…."
"엄마한테 잘 갔다 왔다고 인사는 해야지?"
"윽…."
"그럼 이따가 보자."
"눼에에."
입이 길게 삐져나온 여우가 터덜터덜 걸어 병원 밖으로 나간다.
하영 또한 내 한쪽 팔을 잡고는 밖으로 이끌었다.
"차 이쪽에 있어요, 서후♥"
***
'수상해. 아무리 봐도 수상해.'
오랜 촉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방금 아저씨를 만난 그 임산부, 아저씨와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고.
'설마 아저씨 아이는 아니겠지?'
예림이는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내려쳤다.
"내가 미쳤지. 이젠 생각이 산으로 가네."
아무튼 아저씨 말이 맞긴 하다.
한국으로 돌아왔으면 가족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하는 것을.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예림이의 머릿속은 금세 서후의 생각으로 다시 가득 찼다.
"그 여자, 기분 나빠."
의사면서 뻔뻔스럽게 진료실로 아저씨를 혼자 데리고 가더니, 신나게 궁둥이를 놀리다니.
굉장히 기분이 더러웠다.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옭죄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뒤로 다른 여자가 나타나 아저씨를 또 데려갔다.
이번엔 전 상사의 부인. 임산부.
자꾸만 머릿속에 안 좋은 생각이 들어찬다.
예림이는 머리를 흔들어 그 잡생각을 모조리 털어내었다.
그러나 한 번 잡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
택시에 탈 때도, 내린 뒤 아파트 단지 내로 걷는 와중에도.
잠깐 사라졌다 다시금 나타난다. 끊임없이 떠올라 머릿속과 마음을 뒤죽박죽으로 엉망으로 만든다.
그렇게 한참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때였다.
우우웅
진동이 울렸다.
『 링링 』
잠시 멍하니 액정 화면 속을 바라보던 예림이는 미국을 떠나기 전, 도향과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예림아. 그 노인네랑 서후가 사이가 틀어졌어도 링링과는 연락하고 만나고 하렴."
"예? 아저씨가 상종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마 연락하는 거 알면 싫어하실 거예요."
"서후가 싫어해도, 서후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야. 든든한 배경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매우 크단다."
"…그렇긴 하죠."
"그리고 넌 아직 부족하다. 아직 많이 배워야 해. 그러니 언니 말 들으렴."
"치이. 전 언니에게 배우면 되는데. 언니가 다 낫고 나면 그때…!"
"물론 나한테도 배워야겠지만, 내가 가르쳐주지 못하는 부분은 링링에게서 배워야한다. 언니 부탁이니 제발 들어주렴. 널 위해서. 그리고 서후를 위해서."
아저씨를 위해서….
"네."
"꼭 기억하렴. 때로는 서후가 싫어하더라도 서후를 위해 움직여야 할 때가 있단다. 나도 그래서 그 늙은이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던 거고.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네, 언니."
아저씨는 연락이 와도 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도향 언니 말이 맞았다. 아직 난 부족했다.
액정 위에서 대기 중이던 예림이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여보세요."
"링링입니다. 오랜만이에요, 예림."
"네. 오랜만이에요. 그때 인사도 없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섭섭했는데… 잘 지내시죠, 언니?"
"예. 그… 받을 줄은 몰랐는데, 서후가 아무 말도 안 하던가요?"
"그럴 리가 있나요. 상종도 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래도 언니라면 반드시 연락할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받았어요."
"…그렇군요. 고마워요. 절 그렇게 생각해줘서. 실은 서후가 연락이 안 되는 바람에, 차단 안 된 번호로 연락할까 하다 예림에게 전화하게 되었어요."
"뭔데요? 제가 전해주면 되는 건가요?"
"네. 서후에게 전해주시면 됩니다. 가둬둔 임재상이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아무래도 시설을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네, 임재상을 다른 시설… 잠깐. 임재상이요?"
집 도어락에 손을 대려던 예림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예. 임재상이라고 예전에 서후가 부탁해 저희가 감금해 두고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예림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서후 생각으로 복잡한 그녀의 머릿속에 또 다른 큰 사건이 들이닥치면서 거센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은주가 문을 열고 마중을 나왔다.
"우리 딸 왔어?"
환하게 웃지만 얼굴 한편엔 아직도 그늘이 져 있는 우리 엄마.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날의 일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날의 묻혀뒀던 감정이 새록새록 가슴에 피어올랐다.
"링링 언니."
"네, 예림."
"잠깐 만나볼 수 있을까요? 저…."
떨리던 예림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엄마를 향해 웃어보였다.
환하게.
꽃이 때를 맞아 만개하듯, 아주 환하게.
"그 녀석 직접 보고 싶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