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184 십 년도 더 전부터
* * *
***
"서후."
"응?"
침대 위. 정사의 여운을 느끼고 있는 사내에게 도향이 물을 건넨다.
그녀는 물을 마시고 있는 남자 위에 젖가슴을 올린 채, 검지로 남자의 볼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넌 혹시 결혼할 생각 없어?"
"결혼?"
"어. 결혼."
"글쎄. 딱히…. 그다지 하고픈 마음이 없네."
"과거 상처 때문에?"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냥…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도향이 흥미롭다는 듯, 남자의 가슴에 턱을 괴었다.
"희한하네. 그래도 살면서… 아. 이 사람이랑은 진짜 평생 함께 하고 싶다. 이 사람이랑 아침에 같은 침대에서 눈 뜨고 싶다. 뭐 그런 기분이 드는 여자가 한 명 정도는 있었을 거 아냐?"
"음. 굳이 따지자면 지금까지 두 명 정도 있긴 했는데…."
"오오? 한 명은 네 첫사랑이겠고, 다른 한 명은 누구지? 내가 놓친 여자가 있었나?"
서후가 빤히 도향을 내려다본다.
도향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서후, 왜 날 그렇게 쳐다봐?"
"…아무것도 아냐."
"그래서 그게 누군데? 누군지 나한테만 말해주라~"
"몰라. 안 가르쳐줄 거야."
"아, 왜! 내가 예상치도 못할 인물인가? 그래서 말 못하는 건가?"
"응. 도향 넌 아마 평생토록 상상도 못할 거야."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그래서 도향은 지금의 상황을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여 버리겠어."
도향은 핸드백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호신용 전기충격기였다. 납치 사건 이후로 그녀 또한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챙겨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한 여인이 보인다.
진갈색 머리칼을 나풀대며 움직이는 백인 여성이.
'난 네가 미워. 서후를 망친 네가 미워!'
내게서 내 아이를 빼앗아간 네가 미워!!
도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목에 물건을 가져다댔다.
사라는 이렇다 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도향은 식칼을 들고 그 위에 올라탔다.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만나서 반가워, 꼬마야. 난 도향이야.
응? 나 애인 있냐고? 후후후. 그게 왜 궁금할까 우리 꼬맹이?
지금 나랑 한 번 했다고 애인 행세라도 하고 싶은 거야?
우리 서후. 이제 많이 늘었네. 누나를 헐떡거리게 만들 줄도 알고.
결혼? 글쎄. 그냥 평생 혼자 살까 생각 중.
혼잡스런 상념으로 인해 도향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아악!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도향. 지금이라도 멈추면 돼. 그러면 최소한이라도 서후에게 미움을 받진 않을 거야.'
이성이 도향의 손목을 붙든다.
필사적으로 그녀의 행동을 막아선다.
"하지만…."
도향은 그걸 뿌리쳤다.
흔들거리던 두 눈동자는 조금씩 표독스러워졌다.
'그 아인 내 거야. 내 거라고!'
너만 없었어도. 너만 없었어도!
언젠가는 이 감정의 정체를 깨달아, 내 것이 될 거였어. 다른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내 것이 됐을 거였다고!
"그런데 네가! 네가아아아!"
손이 점점 위로 들린다.
칼을 높이 쳐든 손이 파르르 떨린다.
"서후는 아름답게 자라야 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하지만 서후가 이 일을 원하지 않는다면?
도향은 입술을 짓씹었다.
과연 내가 하는 이 행동이 옳은 걸까?
"……."
서서히 손이 내려온다.
수직으로 서 있던 칼날이 비스듬하게 눕는다.
"서후는 내 건데. 내 것인데…. 흑흑."
도향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껏 살면서 울음이란 걸 터뜨려본 적 없는 그녀였으나, 부모의 죽음에도 흘러나오지 않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도향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순간, 한 소음이 그녀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스마트폰 진동이 울린다.
액정 화면에는 서후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도향은 자신의 가방 안쪽에 손을 집어 넣어보았다.
슥 바깥으로 나오는 그녀의 스마트폰.
"……."
자신의 스마트폰은 시커먼 화면일 뿐이다.
그에 반해 사라의 폰에는 그녀가 아끼고 아낀 아이의 이름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
그걸 보는 순간, 거의 고장이 나 삐꺽거리던 도향의 이성이 뚝 끊어졌다.
내려갔던 양 손이 머리 위로 다시 들린 것도 이때였다.
'이것은 거름을 주는 행위일 뿐이야. 보호자인 내가… 사랑하는 내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희생…!'
도향의 팔이 움직였다.
한 번 내려갔다 올라갈 때마다 붉은 물줄기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핏방울이 자욱한 그녀의 얼굴 위로, 투명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새하얀 빛무리가 시야에 내려앉았다.
몸은 무겁지만 나른한 느낌이 기분을 편안케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스케줄이….'
일어나서 내 아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 한 번 하고, 정원에 있는 귀여운 새끼들 인사 해주고.
아마 그게 다 일 것이다.
'오늘은 좀 피곤하니, 이따 내 아이 자는 얼굴만 한 번 보도록 하자.'
그에 다시금 의식을 저 너머로 내보내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날 부르는 게 느껴졌다.
"…양."
뭔가 살짝은 다급한 음성.
그러면서도 애정이 담긴 어조.
"…향!"
다시금 들린다.
조금씩이지만 선명해지고 있다.
익숙한 목소리. 아니 잊을 수 없는 내 아이의 목소리.
"도향!"
온전히 들리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들이 되돌아왔다.
도향의 눈이 번쩍 뜨인 것도 그때였다.
"서…후?"
"도향. 괜찮아?!"
눈을 들어 천정을 바라본다.
창에서 들어온 새하얀 빛이 온 방을 하얗게 물들고 있다.
몽롱하면서도 아련한 기운이 내 시야에 앉아, 마치 꿈같은 기분을 선사해줬다.
난 그 속에 있었다.
빛을 받아서건, 아니면 그 어떤 감정적인 요소에 의해서건, 순백의 공간보다도 더 환하게 빛이 나는 사내와 함께.
'여기는 천국?'
분명 난 죽었을 텐데?
사라를 죽이기 위해 쳐든 칼로 나 자신을 찔렀는데…?
그런데 지금 이것은 지금 무슨 상황일까.
죽어서도 내 아이를 볼 수 있다니.
혹여나 신께서 날 불쌍히 여기셔서, 영원하고도 달콤한 꿈을 꾸게 해 주신 것일까?
타인을 죽이는 대신 스스로를 희생한 그 행위를 숭고히 인정해주신 걸까?
눈을 옮겨 사내를 바라본다.
손을 뻗어 그의 볼에 가져다 대본다.
'내 아이. 아아…. 나의 서후.'
이것은….
"꿈이 아냐…."
"도향."
"서후."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랜 기간을 서로에 대해 알아온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궁금한 게 있어 입을 열었다.
"서후. 왜 날 살려준 거야?"
"……."
"넌 내가 왜 죽으려 했는지 알잖아."
이 아인 나에 대해 잘 안다.
내가 이 아이에 대해 알 듯.
난 괴물이 되기 싫었다.
지금껏 수많은 집착녀들을 봐왔기에, 난 그들처럼 괴물이 돼 내 아이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죽으려 했다.
그러니 날 죽게 내버려뒀어야지.
그래야… 네 삶이 조금은 편해지잖아.
내 아이의 눈이 날 훑는다.
그러고 나온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나도 누나 감정 알고 있었어."
"뭐…?"
내 감정을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좀 됐어. 십 년도 넘었지? 누나가 내게 좀 거리를 두기 시작한 순간부터니까."
그런….
그리 오래전부터….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말을 했다면…!"
"왠지 누나가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어…?"
"당시 누나는 그 감정에 낯설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으니까. 굉장히 불안해 보였거든. 그래서 나도 내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었어."
그랬…던가…?
그 당시에 난 그랬었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모를 만하지. 누나도 알잖아? 내가 마음먹고 감정 숨기면 아무리 스…승이라도 눈치 채지 못하는 거."
"그랬지. 그랬지…."
서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입맛대로 키운 아이.
그래서 언제고 내 생각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늘 내게 요구하고 보호받고, 그럴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날 위해… 그런 기특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니.
"우리… 서로 엇갈렸던 거네."
"무슨 소리. 누나가 방황기간이 너무 길었던 거야."
"쿡쿡. 그러게."
도향이 웃다 찡그리며 배를 만졌다. 환자복 밑으로 거친 붕대의 감촉이 느껴졌다.
"회복하려면 좀 걸릴 거야. 그동안 나 서포트 해주느라 바삐 움직였으니 좀 쉬어."
"응."
고마워.
"그리고 맞다. 누나 구해준 건 내가 아니라 여우야. 그날 앰뷸런스 부르는 건 물론, 누나 일어날 때까지 잠도 안 자고 있더라. 지금까지. 혹시 서로 사귀는 그런 사인 아니지?"
"흥. 뭐래."
그리고 감사합니다.
"여우, 불러다 줄까?"
"응."
그렇게 서후는 밖으로 나갔다.
도향은 홀로 자리한 병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나직이 한마디 내뱉었다.
"조금 더 내 아이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주택가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조용히 묻히길 바랐던 도향의 사건은 매스컴을 탔다.
아무래도 그 유명한 찰스 밀러의 집에서 벌어진 일이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
"윽. 제가 조금 신중하게 행동했어야 했는데요. 하필 구급차를 부르는 바람에…."
"아냐. 잘했어. 너도 들었잖아?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네가 누님을 살린 거야."
"헤헷. 그런 가요? 아무튼 사라 씨도 이해해주셔서 천만 다행이에요."
"그러게 말이다."
갑작스레 전기충격기에 당해 꽤나 충격이 클 텐데, 정작 그 행동을 저지른 이가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그래도 그녀는 도향을 이해하는 눈치였다.
친누나라더니 정말 서후를 아끼는 게 느껴졌어요. 대화를 나누는데, 마치 시어머니에게 눈총 받는 기분이었다니까요? 후훗.
정말이지 사라는 얼굴도 예쁜데 마음씨도 천사 같다.
아, 사라 보고 싶다.
"그건 그렇고, 아저씨.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뭘?"
"아무래도 도향 언니, 이곳에 있는 것보단 한국에 돌아가서 요양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긴 하지…."
다만 한 가지 문제점. 그것은 바로 사라.
나는 사라와 결혼을 하고 새 삶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앞뒤 생각 없이 일을 벌이는 바람에, 이 사달이 일어나고 말았다.
'멍청하게도 집착녀란 존재에 대해 그새 까먹은 거지.'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
사회적 관념이나 도덕, 상식을 벗어나는 걸 조금도 주체하지 않는 이들 아닌가?
링링만 해도 처음부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람을 통조림 시키고 그러진 않았다.
그녀도 첫 만남 땐 그저 작디작은 소녀였다.
그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군가를 순수하게 사랑한.
'같은 실수는 절대 안 돼.'
피를 보는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일단은 적당히 둘러대는 수밖에 없나.
"그래도 당장은 움직이기 어려우니, 조금 더 있도록 하자."
"넹."
그러면서 어떻게 사라와 이어질지를 구상해 보면 될 것 같다.
천천히 가자. 천천히.
그때 웬 진동이 울렸다.
"음? 제 건 아니에요. 아저씨 건가 봐요."
"그래."
번호를 본다. 지역 번호?
원래 지역 번호는 잘 안 받지만, 왠지 받지 않으면 안 되겠단 직감이 들어 수신했다.
그리고 듣게 된 말.
"예? 재민이가 입원했다고요?"
그것은 민아의 아버지이자, 하나 남은 나의 소꿉친구. 재민이가 오늘 내일 한다는 소식이었다.
(2부 끝. 이후 3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