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183 도향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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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람 중엔 자신이 상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 이들이 있다.
남의 연애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분석하고 조언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도향이 그러했다.
'마, 말도 안 돼.'
서후, 내 아이가 이렇게 내 품을 떠난다고…?
"어디 가는 거야? 설마 그년에게 가는 거야?"
"응. 맞아. 한 번 잘 살아보려고. 모처럼 다시 찾은 사랑이니."
사랑이라니.
'사랑이라니…!!'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서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 자신이 오랜 기간 동안 품어왔던 감정이란 게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아, 안 돼. 넌 날 떠나면 안 돼. 아니,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그건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결과야.'
늘 도향이 그리던 그림에는 그녀 또한 함께 있었다.
비록 관조자적 위치에 있긴 했지만, 어찌됐든 늘 서후는 그녀를 찾아올 수밖에 없도록 설계를 해왔다.
그러나 지금 서후가 가는 길에는 그녀 자신은 없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이건 꿈일 거야. 꿈. 지독한 악…몽."
여인이 머리를 쥐어뜯는다.
입술을 짓씹는가 하면 쉴 새 없이 발을 떤다.
마치 약이라도 한 듯 중얼거리길 잠시, 거칠게 흔들거리던 눈동자가 돌연 우뚝 멈춰 섰다.
"아…. 그런 거야? 나도 걔네들이랑 같은 거였어?"
도향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집착녀였네?"
여우나 링링처럼, 애착의 대상이 된 상대가 고통을 느낄 정도로 과도한 애정과 탐욕을 보이는 병.
"큭큭. 나도… 나도 집착녀였다니. 큭큭큭."
문득 25년 전이 떠오른다.
처량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나아오던 한 소년이.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한 아이가.
당시엔 그 감정이 모성이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었다니…. 아하하핫."
뒤늦게 찾아온 각성이 머리를 흔든다.
선택받지 못한 사랑이 여인의 마음을 혼란케 한다.
냉혹한 현실이 그녀를 미치게 만든다.
서후가 길가로 나아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도향은 고장이 나버렸다.
그리고 고장이 난 물건은 늘 예기치 못한 사고를 일으키는 법.
제자리에 주저앉아 미친년처럼 웃던 도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길가에 서 있는 서후에게 달려갔다.
"서후. 잠깐만! 그 여자에게 가기 전에, 예림이 진정 좀 시켜줘야 하는 거 아냐?"
"응?"
"너 바로 장례식 가고 그러느라 모르나본데, 예림이 당시 인질로 잡힌 일… 아직도 악몽을 꿀 정도로 놀란 상태라고. 아무리 네 사랑이 좋다고 해도 챙겨 줘야지."
"아…. 그것도 그러네."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방긋 웃는다.
"역시… 누님이 없으면 난 아직도 안 되나봐."
"후훗. 그걸 말이라고. 어서 가봐."
"응."
서후가 택시를 잡고는 여우와 그 아이들이 묵는 숙소로 나아간다.
그걸 본 도향 또한 택시를 잡고는 이동했다.
그런 그녀의 눈은 마치 심연과 같이 깊게 가라앉은 채였다.
티디딕
손을 놀려 문자를 날리는 그녀.
도향 : 여우야 타깃 집 알지? 거기로 좀 와줄래?
여우 : 지금요?
도향 : 응 지금
여우 : 네 언니!
***
택시를 타고 아이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이동한다.
바다 옆 도로를 타고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차량 속에서 난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 너머에는 광활한 바다의 전경이 펼쳐져 내 꿀꿀한 마음을 다소 해소시켜 주고 있었다.
'사라는 바다가 좋다고 했었지.'
먼젓번에 같이 바다에 가서 살자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나 또한 바다가 좋다.
산이 자리한 곳은 이따금씩 어릴 때의 추억이 떠올라, 옛 상처까지 거슬러 올라가곤 했으니까.
'사라와 함께,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으로 떠나자.'
지금 사라와 내게 필요한 건 휴식.
상처를 회복할 시간.
그리 마음을 먹은 난 육지로 넘어와 부서지는 파도를 가만히 지켜보며, 과거의 상처를 하나씩 털어내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잔돈은 됐습니다."
택시에서 내린다.
거대한 호텔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일단 그 전에 애들도 정리를 해야겠지.'
그러나 급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냥 접점이 뜸해지고 하다보면 그 순간엔 더욱 불타오를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은 만남이 적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다.
아마 발길이 뚝 끊기면 1년 정도 힘들어하다 알아서 일어날 것이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여우인데….'
집착녀…. 후우. 고민이 된다.
어떻게 하지. 일단은 데리고 다녀야 하나?
그리 고민을 하는 그 때, 어느새 난 아이들 숙소에 도착한 상태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누르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달려 나와 날 들어 나른다.(?)
"와아아 아저씨다!"
"아저씨! 후 아저씨!"
"하핫. 그래그래. 어떻게 다들 어디 안 가고 숙소에 모여 있었네?"
"넵. 어제까지 열심히 돌아다녔거든요!"
활짝 웃으며 달려드는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모두 안아준다.
그러며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숫자가 한 명 부족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방문한 목적이 되는 대상이.
"근데 예림이는?"
"예림이는 왜요? 왜 예림이를 찾아온 듯한 기분이 들지? 우리가 아저씨 찾을 땐 바쁘다고만 하시고!"
"맞아맞아!"
민아의 예리한 추측에 난 하하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 납치 일을 겪었잖니.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괜찮나 확인해 보러 왔단다."
"아하. 근데 예림이 지금 없는데요?"
"응?"
서연이가 머리카락을 돌돌 말며 말한다.
"도향 언니가 나오라고 불렀대요. 그래서 15분 전에 나갔어요. 맞지, 하나야?"
"응. 분명 그렇게 들었어."
"그…래?"
근데 왤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드는 건.
그것은 오랜 기간 사람을 상대하며 터득한 일종의 직감이었다.
문득 스승의 집을 나올 때 보았던 도향의 표정이 떠오른다.
깜짝 놀라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광기가 어른 거렸던 그 모습이.
그래. 마치 뭔 일을 낼 것 같은 얼굴이었….
'설마….'
나는 곧바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
"도착했습니다, 손님."
"여기요. 잔돈은 필요 없어요."
"예? 거스름돈이 90달러 이상 남는데…."
그러나 도향은 손을 내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에서 내려 고개를 든다.
임무를 위해 수차례 보아왔던 의뢰자이자 타깃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도향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시죠?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 아니면 그다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요."
"안녕하세요. 도향이라고 서후와 함께 일하는 동료입니다."
"서후요? 자, 잠시만요."
후다닥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문을 열어 주는 진갈색 머리의 백인 미녀.
그녀는 도향을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러나 눈 아래가 빨갛게 부은 것이 도향이 오기 전까지도 집 안에서 울고 있었던 듯했다.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 들렀습니다, 사라 씨."
"앗. 네. 안으로 들어오세요."
백인 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도향을 거실 한가운데 자리한 소파로 인도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소파에 앉는 두 사람.
둘 사이로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다.
"그… 할 이야기란 게 무엇인가요?"
"혹시 서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서후…요? 왜 그런 질문을?"
"아, 제가 누군지 모르시나 보네요. 서후는 어릴 적부터 제가 업어 키우다시피 해왔습니다. 친누…나라고 생각하면…. 예. 친누나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겠네요."
"아…."
그제야 사라가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후가 아무래도 그쪽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인데, 누나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동생이 걱정되서 절 찾아오신 거군요."
사라의 행동이 급 공손해진다.
그녀는 마치 시어머니를 마주대한 것처럼 도향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직 제 질문에 대답을 안했습니다, 사라 씨. 서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그… 정말 좋아합니다. 서후도, 저도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어요."
"제 동생이 그쪽 오빠에게 의뢰를 받아 일부러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금도요?"
도향은 일부러 그녀의 상처를 후벼 팠다.
그러나 사라는 그것에 크게 아랑곳 않고 대답했다.
"예.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 동생을 볼 때마다 그 일이 자꾸 떠오를 텐데요? 오빠 일도 그렇고?"
"…그 괴로움을 넘어설 만큼 서로를 좋아합니다."
칫. 도향이 혀를 찼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다.
생긴 건 또 어떻고?
물론 키도 크고 가슴과 엉덩이가 큼지막해 스타일이 좋은 건 인정한다.
그러나 웃는 모습이며 하는 행동이며,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도향에게 그녀는 합격점에 한참 미달인 여자였다.
'이런 년하고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산다고?'
머리로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나보다 한참 못난 이런 년이 대체 어디가 좋다고?
적어도 도향 자신보다 더 뛰어나기라도 했으면 이런 불만도 좀 덜했을지 몰랐다. 도향은 도저히 그녀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서후 누님 분께서 오셨는데 마실 걸 내어 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잠시만요."
실수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라.
도향은 부엌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절대 허락 못해.'
서후가 저런 맹하고 눈치도 없는 년이랑 사는 건 죽어도 허락 못한다.
그녀가 키운 그 아이는 여자들 위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살 사내. 저런 덜떨어진 여자랑 늙어 죽을 때까지 살며 속박되게 둘 순 없었다.
"…죽여야 해."
도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