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182 청산
* * *
의뢰자가 죽었다.
납치사건이 일어난 지 채 1시간도 안 돼 일어난 일이었다.
경찰에서는 이번 사건의 용의자로 그의 경호임무를 수행하던….
범인으로 지목된 이는 잭.
찰스 밀러의 차량 의자 밑에 시한폭탄을 설치해 그것을 터뜨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기 전, 그는 이송 중 난데없는 총기난사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되고, 그 진실 또한 그대로 묻혔다.
내 의뢰 또한… 자연스레 취소되었다.
"사라, 괜찮아?"
"…응."
초췌한 얼굴의 미녀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가족의 죽음이란….
분명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죽은 남편의 일로 인해 한 바탕 싸울 것처럼 기세를 피우던 그녀는… 정작 그 오빠가 죽자, 온몸으로 그 슬픔을 표현해 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곁에서 외롭지 않게 서 있어 주는 것이었다.
"엄마…."
사라가 딸아이를 꼬옥 붙들며 그 슬픔을 말없이 토해낸다.
난 그 둘을 조용히 안아주었다.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뿌연 연기가 하늘 위로 스르륵 퍼져 나간다.
'후우. 사람의 끝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인간사 새옹지마.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의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단 뜻이다.
우리는 인생이란 길을 걸으며 어떻게든 앞날을 예측해 멋진 인생을 계획하려 하지만, 사실 삶이란 제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일단 나부터가 그러지 아니한가?
엄마 여우의 사건.
하와이에서 우연히 갖게 된 사라와의 만남.
그리고 의뢰자의 갑작스런 죽음까지.
내 계획에는 전혀 없었던 사건들이 나타나, 내 인생에 큰 변화를 주며 날 전혀 새로운 곳으로 인도해 나간다.
내가 예상치도 못한 전혀 새로운 곳으로.
그런 내 인생의 끝은 어디 일까.
인생을 뭣 같이 살았으니, 찰스처럼 나의 끝 또한 꽤나 비참하려나?
"……."
파스슥.
손가락이 뜨겁다. 어느새 담배가 끝을 보인다.
그런 그때였다.
"저어. 혹시 서후 씨 맞으십니까?"
"…누구십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차지욱이라고 합니다. 꼭 전해드려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중요한 이야기? 다음에 하시죠. 지금은 제가 정신이 없어서."
"아뇨. 꼭 지금이어야 합니다. 은거 노인과 그 비서가 정신이 없는 지금 이 순간이요. 지금이 아니면 당신은 진실을 듣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며 다시금 환하게 웃는 청년.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냉혹한 현실은 잘 포장된 웃음 뒤에 찾아오는 것이란 것을.
그와의 만남은 지극히 평범했으나, 그가 해준 이야기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당신은 지금껏 누군가의 꼭두각시로서 무대 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
쾅.
거칠게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서후? 갑자기 무슨 일로…."
좌우를 둘러본다. 거실에는 없다.
난 건물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서후. 서후!"
링링이 막아서려 하나, 무시하고는 그대로 안방에 들어간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있는 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목표를 찾은 나 그 노인의 건너편으로 가 거칠게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매섭게 추궁하듯 물었다.
"뭔가 제게 할 이야기 없습니까?"
"…무슨 소리냐."
"25년 전! 당시의 그 사건으로 제게 할 말 없느냐 이 말입니다!"
***
역린. 용의 턱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로, 그걸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해서 건드린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건드리지 말아야 할 역린이 존재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아저씨. 아저씨 부모님은 어떤 사람이셨어요?"
"그냥 일만 하는 사람이셨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서 밤늦게 돌아와 쓰러지듯 잠을 자는. 그런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아버지."
"그럼 어머니는요?"
"……."
"아저씨?"
어머니의 사건은 늘 내게 상처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고, 잊으려 해도 잊혀 지지 않는 악몽이었다.
그건 내 역린이었다.
그렇기에 난 내 역린을 만들어 냈던 당시의 그 바람남과 그 가정을 아주 뭉개버렸다.
그럼에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
외부로 아무리 토해내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분노.
그런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내 스승과 도향이었다.
날 따라오거라.
그래. 분명….
내가 네 부모가 되어주마.
분명히 그랬을 것인데.
"당시 그 일은 은거 노인이 직접 지시한 일입니다."
"뭐?"
"그는 약 1여년에 걸쳐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어줄 괴물을 찾아다녔고, 우연히 공중목욕탕에서 그 적합자를 발견할 수 있었죠. 그게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죠. 일평생 꿈꿔온 꿈이 코앞에 있는데, 당시의 당신은 너무도 행복한 상태였단 겁니다."
그 어떤 유혹으로도 바뀔 이유가 없는, 큰돈을 준다고 유혹해도 넘어오지 않을 이미 충분히 행복한 상태.
"그래서 그는 당신을 지옥으로 끌어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를 위해 한 가지 작업에 착수했죠. 그게 바로 이 남자입니다."
사내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내려놓는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이덕수. 기억 하시나요?"
기억한다. 아마 죽기 직전까지도 녀석의 이름은 잊지 못할 것이다.
"집에서는 애처가로 행세했지만… 실상은 이 여자 저 여자, 남의 부인들을 전문적으로 등쳐먹는 새끼였죠. 살살 꼬드긴 뒤, 돈을 뜯어내고 가정을 파탄 낸 뒤 잠수 타는."
알고 있다. 놈이 어떤 새끼인지. 25년 전에 들었음에도, 놈에 대한 정보는 하나하나 모두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통해 당신의 가족을 건든 것입니다. 그 집 부인을 유혹해 바람을 피우게 만들고, 그 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그 아들 코앞에서 보여주는 것. 그게 그가 받은 의뢰였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내가 알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황은 벌어졌고, 그 안에서 스승은 나라는 카드가 각성되기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
"왜 아무 말도 못하는 겁니까! 예?! 방금 제가 말한 부분이 잘못됐다면, 뭐라고 반박이라도 하란 말입니다!"
서후의 거센 외침에, 눈을 감고 있던 노인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그는 가타부타 여러 말을 늘어놓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네가 들은 것 모두 사실이다. 이미 내 표정과 행동, 분위기를 통해 알고 있지 않느냐."
"어째서! 대체 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후가 노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노인은 마치 솜으로 만든 인형이라도 되듯, 단번에 공중으로 붙들어 올려졌다.
"서후!"
"말해! 대체 왜 그런 거야! 왜!"
"이미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난 오랜 기간 꿈꿔왔다. 병상에 누워있을 적부터 내 꿈을 대신 이루어줄 사람을."
그래. 알고 있다. 얼마 전에도 들었잖은가? 다만 이해가 가질 않는다. 대체 왜. 어째서.
"왜 하필 날 선택한 거야?!"
이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였느냔 말이다!
"난 당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고! 그땐 내게 가족도! 친구도! 그리고 평생을 함께 하고픈 사랑하는 여자도 모두 있었어!"
그래. 모든 게 있었다.
서로를 보듬어줄 가족도.
함께 웃고 놀 친구도.
그리고 평생을 함께할 사랑도.
"그런데 대체 왜! 수많은 인간들 중 하필 왜 날…!!"
"……."
"죽여 버리겠어! 당신, 죽여 버리겠다고!!"
"서후!!"
링링이 달려와 서후의 팔을 붙잡는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풀어보려 하나, 한낱 여인이 풀기에는 너무 힘이 강했다.
서서히 붉어지는 노인의 얼굴.
호흡이 점점 거칠어진다.
그걸 본 링링이 그에게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서후, 제발…! 어차피 주인님은 앞으로 1년도 못 사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뭐?! 죽여 버릴 거야! 이대로 목을 졸라서, 병상에서 쓸쓸히 죽어간 우리 아버지의 복수를 할 거라고!"
우리 아버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생을 일만 하다가… 아내의 외도로 충격을 먹어 쓰러진 우리 불쌍한 아버지.
그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됐었다.
적어도 그 보상을 조금이라도 받고는 돌아가셔야만 했다.
"용서 못해! 절대 용서 못해!!"
"서후, 제발…! 제발 저를 봐서라도 주인님을 살려주세요…. 흑흑…. 이렇게 부탁할게요. 제발…."
눈물을 가득 머금은 여인이 서후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이를 갈며 주먹에 온힘을 주던 서후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노인의 신형이 소파 위로 떨어져 내렸다.
"주인님!"
사실 방금 죽여 버릴 듯 행동했지만, 서후는 깨닫고 있었다.
자신은 저 노인을 절대 죽이지 못할 것이란 것을.
무려 25년을 그에게 돌봄 받았다.
친부모로부터 키워진 기간보다, 친부모와 함께한 기간보다, 눈앞에 노인과 함께 한 기간이 더 길었다. 추억이 더 많았다.
말 그대로 서후에겐 부모보다 더 부모 같았던 존재.
그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나.
자식보단 떠난 부인을 더 생각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늘 그리고 한결 같이 오직 서후만을 생각하고 바라봐온 노인.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헐떡이는 지금 이 순간도 노인의 두 눈동자는 오직 서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서후는 절대 죽일 수 없었다.
그건 애증이었다.
"이제 다 끝내겠습니다. 지금껏 배웠던 모든 일은 그만 잊고, 25년 전… 그때로 돌아가렵니다."
"……."
"그리고 앞으로 얼굴 볼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서후가 허리를 숙여 정중히 예를 차렸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것처럼 성큼성큼 방밖으로 사라졌다.
노인이 열린 문밖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조용히 떠오른다.
"다… 끝났구먼."
"주, 주인님…."
"이만 한국으로 돌아가자구나."
"예…."
***
'오늘은 꼭 말해야겠어.'
은거 노인의 별장.
그 앞에서 도향이 불안한 듯 서성이고 있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얼마 전 겪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잭이란 남자에게 인질로 잡혔을 때,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 자신을 구해줬던 한 아이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상대를 전기충격기로 지지며 활짝 웃던 한 여인을.
'어서 민아에 대해 서후에게 말해야 해.'
안 그러면 언제고 큰 사달이 발생할지 몰랐다.
그때 건물 밖으로 나오는 사내.
도향은 단숨에 발을 놀려 그 앞으로 달려갔다.
"서후!"
"어? 아, 도향. 잘됐다. 마침 할 말이 있었는데."
"응? 뭔데? 아니, 근데 잠깐. 너 왜 그래?"
오랜 기간 그를 관찰해온 그녀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정도로.
'지금껏 서후가 이리 망가진 적이 있었던가?'
불안정했던 첫 만남 당시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응? 링링이 뭐라 한 거야? 아니면 그 노인네가 또 무리한 걸 요구했어? 대체 뭔데?"
걱정을 가득 담아 질문을 쏟아내는 도향.
그 따스한 마음에 서후는 씁쓸한 미소를 띠우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 이제… 지금껏 해온 일 전부 그만 두려고."
"뭐?"
"다 끝내고, 이젠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려고."
도향의 손이 잘게 떨렸다.
두 눈동자 또한 마찬가지.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는 크게 소리 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서후! 당장 설명해!"
"말 그대로야. 그냥 평범하게 살 거란 뜻이야. 그냥 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그냥 조용히 살래. 그러니 도향 너도 이제 날 떠나서 네 삶을 살아. 날 챙기는 일 그만 두고."
서후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아니…. 고마웠어요, 누님. 25년간 부족한 동생 돌봐주느라."
말을 마친 남자가 도향을 지나쳐 길가로 걸어 나갔다.
갈피를 잡지 못해 흔들거리는 눈동자의 주인은 고개를 돌려 그에게 소리쳤다.
"어디 가는 거야? 설마 그년에게 가는 거야?"
"응. 맞아. 한 번 잘 살아보려고. 모처럼 다시 찾은 사랑이니."
사랑…이라고?
도향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녀는 불안한 듯 손가락의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안 돼. 이건 아니야. 이건 내 계획하고는 너무도 달라. 넌 그쪽으로 자라나면 안 돼. 반드시, 반드시 내가 설계해둔 방향으로 커야만 해. 그래야, 그래야 넌 제일 아름다워.'
수그렸던 여인의 고개가 다시금 들린다.
그런 그녀의 눈엔 광기가 어른거렸다.